장재형목사 – 넉넉히 이기느니라

1.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그리고 구원에 대한 확신

장재형(장다윗)목사는 로마서 8장을 강해하면서, 인간이 가진 불안과 한계를 넘어서는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매우 강조한다. 이 장의 28절부터 3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선언한다. 인간은 인생을 살아가며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에 늘 직면한다. 어느 날 내가 좋은 것이라 여겼던 것이 훗날 악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고, 내게 손해처럼 보였던 것이 놀라운 유익으로 바뀔 수도 있다. 이런 한계와 불안정성이 인간의 삶을 뒤덮기 마련인데,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섭리 안에서 해석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해설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이 핵심임을 유의하라고 권면한다. 곧, 우리 안에는 부족함도 있고 여러 연약함도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정체성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요소를 모자이크처럼 맞추시어 선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모자이크는 작은 조각들이 맞물려야 비로소 전체 그림이 드러나듯, 하나님의 백성들의 다양한 모습과 역경, 그리고 그 한계들이 결국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어우러져 선한 결말로 이끈다는 뜻이다. 그것은 단지 개개인의 부르심에만 국한되지 않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렇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로 펼쳐진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아주 개인적으로 체험했다. 그는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를 맹렬히 박해하던 사람이었으나, 도중에 꺾여 오히려 가장 열정적인 전도자로 변했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던 기이한 반전이 일어났고, 초기 교회가 세계 곳곳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바울이 보기엔, 어떤 대적자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릴 수 없었고, 바로 그 사실을 이 로마서 8장에서 힘주어 강조한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이 구절은, 그 안에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함축하고 있다. 예정(predestination)이란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고, 섭리(providence)란 하나님께서 미리 보고 미리 인도하시는 경륜을 말한다. ‘미리(pro) 본다(videre)’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이 섭리 개념은, 우리 인간의 각 순간과 역사가 이미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가리켜 “하나님의 주권성(sovereignty)”이라고도 부르며, 이것이 기독교 역사 안에서 수없이 많은 논쟁과 토론의 중심이 되어왔음을 상기시킨다.

실제로 이 교리는 칼빈의 예정론, 특히 이중예정(double predestination)의 주된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 선택받은 자와 유기된 자로 구분된다는 점 때문에 거센 반발과 논쟁이 있어왔으나, 칼빈이 목적으로 삼았던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와 사랑 안에서 믿는 자가 누리는 놀라운 은혜의 확신”이라는 것이다.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칼빈이 활동하던 당대 이후로 점차 사람들이 이성중심, 합리주의에 치우치면서 신(神)은 우주를 창조했을 뿐 그 뒤로는 개입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이신론(理神論, Deism)이 확산되었다. 이 사조는 하나님과 실제 살아 있는 관계성을 부인하였고, 인간 이성으로 자율적으로 세계를 해석하려 했다. 이에 대항하여 칼빈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력히 설파한 것은, 하나님이 단지 우주 저편에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와 세계 안에 능동적으로 관여하시며, 작은 새 한 마리의 생사까지도 주관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바울도 로마서 8장에서 똑같은 전제를 가지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결국 그분의 절대 통치 안에서 선을 이룬다고 말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교회’가 부름받은 자들의 공동체라고 설명한다. 교회란 문자 그대로 ‘called out’, 곧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되어 부르심을 입은 모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조직이나 외적인 행정 시스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모여, 그분의 신적 통치와 섭리를 믿고 순종하며, 서로를 보듬고 함께 길을 걸어가는 영적 공동체다. 그런 점에서 28절을 다시 살펴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이라는 말은, 곧바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놀라운 결론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 때로는 파편 같은 인생의 조각들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의해 하나의 걸작으로 맞추어진다는 것이다.

29절과 30절로 넘어가면 바울은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의 예지(豫知)와 예정(豫定)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고 하고, 그들을 결국은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고 정리한다. 이것이 교회의 성도들이 받은 구원의 단계이자 여정이다. 요약하면, 예지-예정-부르심(소명)-의롭다 하심(칭의)-영화(glorification)라는 흐름이며, 칭의와 성화와 영화의 과정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점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예지예정론이, 단순히 어떤 운명론적 결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의 절대성”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곧, 사람이 믿음을 가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임했기에 가능한 것이며, 은혜가 ‘선행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서정(序程)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는 것이다.

바울 자신이 가장 강력하게 체험한 바, 그가 스데반을 돌로 치는 데 앞장섰던 흉악한 박해자였으나,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열렬한 사도가 된 과정을 떠올려보면, “왜 이런 나를 택하셨는가?”에 대한 물음은 바울 안에 매우 크게 자리했을 것이다. 스스로 뼈아픈 죄의식을 겪었으나, 결론적으로 그 모든 악함과 부족함을 미리 아시고, 또 그렇게 알면서도 용납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그는 로마서 8장에서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 바울은 그 말의 실제적 증거였다.

하나님이 예지와 예정을 통해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을 구원하시되, 구원에만 그치지 않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 29절의 핵심이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며, 그분을 첫째(맏아들)로 두고, 그분의 뒤를 잇는 많은 형제자매가 되도록 부르심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더 큰 구원의 목적’이다. 단순히 죄 사함과 심판 면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영적 성장과 완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구원의 완전한 의미다.

30절에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은, 구원의 단계에 대한 바울의 확신을 또 한 번 웅장하게 드러낸다. 미리 아시고 정하신 바에 따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며, 마침내 영화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과연 흔들릴 수 있는가? 바울의 대답은 단호하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부분이 기독교 신앙이 가지고 있는 내적 평안과 확신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이 자칫 잘못된 교만이나 타인을 정죄하는 수단으로 비칠 때도 있지만,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교만의 근거가 아니라 “자격 없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더욱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지,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느냐?”라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31절에 이르면 바울은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라고 말한다. 여기에 “이 일”이란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그 전 과정을 뜻한다. 인간의 이성이나 그 어떤 세력이 이 과정을 무효화하거나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없다는 결론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 이어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는 찬양 같은 선언이 나오는데, 이것은 구원에 대한 확고부동한 안전을 나타낸다. 구원받은 우리가 그 은혜 안에 있기에, 결코 다른 어떤 힘도 이 구원을 무너뜨릴 수 없음을 시편의 고백까지 들어서 설명한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는 다윗의 시(시편 27편)나,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시편 62편)라는 시편 기자의 노래가 그 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말씀을 해설하면서, 인간이 죄짓고 넘어지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다만 인간의 불신앙이나 의심, 죄로 인해 휘청일 때도, 우리를 건지시는 쪽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그리고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사실이 변치 않는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죄인은 끊임없이 “정말 내가 구원받았을까?” “내가 이렇게 또 넘어졌으니 버림받은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하지만, 바울은 “누가 우리를 고발하리요?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라고 반문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의롭다 하신 자를 감히 누가 죄인이라 정죄하겠느냐고 묻는다.

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라는 표현은,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그 독자 이삭을 바쳤던 장면을 상기시키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지만, 하나님의 경우에는 신적 전능자이면서 동시에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함으로써 죄인들을 구원하셨다. 바로 이 희생으로 인해 우리의 구원이 가능해졌다. 그러니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말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끝이 없음을 증언한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특히 이 32절을 중심으로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구원을 흔들 수 없음을 재차 강조한다. 인간의 가장 큰 위기는 사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으며,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그러므로 신앙인이란 주님의 사랑으로 옷 입은 자들이며, 설사 외적인 박해가 오거나 내면의 죄책이 엄습한다 해도, 최종적으로 나를 고발할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신데, 그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셨기에 아무런 고발도 유효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33절과 34절에서 “누가 능히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라는 말로 반복되고, 곧이어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완성된다.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고백 역시 로마서 8장 34절과 정확히 일치한다.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인데, 그분이 도리어 우리를 위해 계속 간구하시고 변호하신다. 그러니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는가. 장재형목사는 이는 구원받은 자의 든든한 기초이며, 인간이 의심이나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되어야 할 이유라고 해설한다.

이처럼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선언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이라는 기둥 위에 서 있고, 우리를 부르시는 소명과 의롭다 하시는 칭의,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화로운 자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어지며, 끝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라는 강력한 도전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보존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지금도 우리를 변호하고 계신다. 바로 이런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구원의 불안정성에서 벗어나, ‘확신’이라는 단단한 반석 위에 올라서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결론적으로, 이 로마서 8장에 대한 해설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사랑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순히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실제 삶의 위로와 능력으로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이 살던 시대의 이신론자들이나, 오늘날의 세속주의나 과학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한낱 멀리 계신 어떤 조물주나 지적 원리 정도로 치부해버리면, 신앙은 그 즉시 무력해진다. 그러나 바울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한 믿음을 가질 때, 또“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는 담대한 선포를 할 때, 우리가 얻는 것은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확신이다. 그리고 그 확신이 있기에, 바울은 이어지는 마지막 절들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외칠 수 있었다.

2.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는 삶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 후반부를 해설하면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묻는 바울의 말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신앙고백 중 하나라고 말한다. 35절에서 바울은 성도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어려움을 나열한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등 일곱 가지이며, 이것들은 모두 신앙인의 길에 실질적으로 닥칠 수 있는 극한 상황들이다. 실제로 바울 시대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와 압력을 받았고, 생존 자체가 위협당했다. 기근과 헐벗음, 처형의 공포가 늘 주변을 떠돌았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와 성도들이 이 모든 두려움 앞에서 좌절하고 무너져야 하는가?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절).”

“넉넉히 이긴다”는 것은 간신히 버티다가 마지막에 겨우 살아남는 수준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워낙 견고하기에, 고난의 폭풍이 몰아쳐도 “궁극적 승리”가 확정되어 있다는 표현이다. 이는 궁극적 승리인 구원, 그리고 최종적인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대한 바울의 확신에서 기인한다. 예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다”라고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선언하셨는데, 우리도 그 길을 뒤따라가며, 비록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 37절을 가리켜, “한없이 작고 연약한 존재인 인간이, 전능자의 품 안에 있기에 당당히 고백할 수 있는 문장”이라고 설명한다. 지극히 낮은 자가 가장 높으신 왕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형국이니, 넘어지지 않을 수 있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바울은 38-39절에 이르러 유명한 구절로 절정을 이룬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일곱 가지 고난에 이어, 여기서는 아홉 가지 이상의 가능한 모든 대적 요소를 언급한다. 사망, 생명, 천사, 권세, 현재와 미래, 능력, 높음과 깊음 등 공간과 시간, 영적 세계와 물질 세계, 심지어 우주적 질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며, 이것들이 아무리 거대하고 강력해 보여도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높음(ὕψωμα)이나 깊음(βάθος)이라는 표현은 당시 사람들이 별자리를 보고 미래를 점쳤던 점성술적 세계관까지 포함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 당시 많은 이들이 별들의 배치나 움직임에 의해 인생이 정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점성술적 운명론까지도 부정한다. 아무리 별의 운행과 천체의 질서가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겨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과학적 자료나 환경적 요인, 개인의 경험 등에 의해 좌우되어 결국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체념하기 쉽지만, 바울의 확신은 전혀 다르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보여주신 사랑, 그리고 부활과 승천, 성령의 내주와 중보 사역으로 지금도 계속 보증되는 그 사랑만큼은 그 어떤 피조물도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장래 일이나 현재 일이나”라는 표현은 시간성에 대한 두려움까지도 극복한다. 과거의 죄나 실패가 또다시 발목을 잡을 것 같고, 미래의 불확실성에 떨기도 하지만, 바울은 현재와 장래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붙들려 있다는 것을 선포한다. 그래서 신앙인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히려 ‘이미 이긴 전쟁’을 치르는 자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마치 승리가 확정된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처럼, 현재 당하는 어려움과 문제는 잠시의 아픔이 될 수 있지만 결말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성도의 견인(堅忍)”이라는 신학 용어와 결부시킨다. 한 번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안에서 끝까지 인도되고 지키심을 받기에, 궁극적 실패나 파멸로 돌아서지 않는다는 것이 성도의 견인이다. 물론 인간적인 허물과 죄로 인해 도중에 넘어질 수는 있으나, 최후의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로마서 8장이 이러한 확신을 주는 이유는,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가 완벽해서가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택하셨고, 부르셨고, 의롭다 하셨고, 영화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를 중보하신다. 동시에 성령님 역시 우리 내부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일을 해나가신다. 이것이야말로 바울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말할 수 있는 전적인 근거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읽을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에 특별히 주목하라고 조언한다. 구원의 출발부터 여정과 완성까지, 전부 “사랑하시는 이”에게 달려 있다는 의미다. 어떤 환난이나 고통, 심지어 죽음이 다가와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는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기에,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 그런 점에서 성도의 삶은 늘 평탄하거나 고통이 전무한 길이 아니다. 오히려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 과정조차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하는 시간이 된다.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보여주셨던 삶이 그랬고,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걸어갔던 길이 그러했다. 박해와 기근, 불안과 위험 속에서도, 교회는 계속 자라났고 복음은 편만하게 퍼져나갔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교훈은 유효하다. 예수를 믿는 것이 편안한 길이 아니라, 세상의 조류와 불의와 타협하지 않음으로 인해 때로는 소외와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기근”이나 “적신”까지 체험할 정도로 궁핍한 삶을 살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가족이나 공동체로부터 “박해”를 당하기도 한다. 심지어 목숨의 위협을 받는 지역이나 상황도 지구상에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고난의 항목은 현대인에게도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이걸 극복할 만한 내 능력이 충분하지 않다”며 좌절하기 쉽지만, 바울은 오히려 당당하게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확언한다.

특히 36절에 나오는 시편 44편 22절의 인용,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라는 구절은, 순교적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했던 초기 교회의 위급함을 잘 표현한다. 믿음의 길은 때로 죽음의 위협까지 동반한다. 하지만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37절에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선언하며, 죽음 너머의 부활 소망,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절대적 승리를 바라보았다. 장재형목사는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이 37절 말씀을 묵상하고, “지금의 환난이 내게 주어진 전부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되새기라고 권면한다.

38절과 39절에서 바울이 연달아 열거하는 내용은, 당시 로마 제국의 박해나 영적 도전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음을 극적인 언어로 전달한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모두, 결국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피조물’에 불과하다.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극단적 두려움인 사망도, 가장 강력해 보이는 세상 권세자들도, 신비롭고 거대한 우주적 존재들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이 독생자의 죽음과 부활로 보증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바울의 답은 단연 “아니라”이다.

장재형목사는 최종적으로 이 말씀을 정리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신 때부터 이미 그 영광의 자리에 이르기까지‘지속적인 경륜’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우리가 어떤 연약함과 상황에 놓이든지, 구원은 거기서 미완으로 머무르지 않고 최종적으로 영화롭게 될 때까지 이끌려 간다. 한편으로는 “이 사실을 믿느냐?”가 늘 신앙의 시험대로 우리 앞에 놓인다. 바울이 여러 차례 언급했듯, 우리는 “죄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 사이에서 날마다 싸운다(로마서 7~8장). 때론 실패도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가 돌아갈 곳은 십자가의 은혜요, 성령의 능력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이다. 바로 거기서, “누가 우리를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담대한 고백이 다시금 울려 퍼진다.

로마서 8장의 후반부는, 우리가 성도로서 나아갈 때 맞닥뜨릴 수 있는 모든 위협과 도전, 그리고 인간 내부의 의심을 향해, “하나님이 이미 이기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시니, 너희가 능히 대적하지 못한다”고 선포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루하루의 삶을 지나면서도, 심지어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이라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가운데 평안할 수 있다. 그것이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이며, 바울 사도의 불꽃 같은 열정이 담긴 로마서 8장의 결론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결론을 대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단지 ‘좋은 날만 골라 사는’ 얄팍한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박해가 없어도, 여전히 인생의 무거운 짐은 존재하고, 죄와 싸우는 끊임없는 영적 전쟁이 우리 내부에 벌어진다. 그러나 광야와 같은 삶 속에서도 “주께서 예비하신 선하고 아름다운 결말”을 확신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성도의 참된 자존감이며 영적 힘이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그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두려움과 싸울 수 있는 가장 큰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 확실하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는 마지막 39절의 성찰이자 고백이다.

로마서 8장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이 편지를 받아든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 말씀을 삶 속에서 계속 경험하게 된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때로 갈등이 생기고, 외부적인 환경이나 세상의 사상, 권력으로 인해 고초를 겪을 수도 있다. 신체적 질병이나 경제적 위기 같은 현실적인 시련도 닥쳐온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바라볼 것은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끊으리요, 누가 대적하리요?”라는 바울의 일곱 겹, 아홉 겹으로 덧씌워진 강력한 반문들이다.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내주,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약속이 있는데, 과연 그 무엇이 이 사랑을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장재형목사는“장차 보게 될 영광과 지금 겪는 고난은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 바울의 고백(로마서 8장 18절)을 다시금 상기시키며, 우리가 이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한, 삶의 방향과 결말은 바뀌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결론은 하나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 환난이나 곤고, 박해나 기근, 적신이나 위험, 혹은 칼이 몰려와도 그것들이 우리의 믿음을 최종적으로 파괴할 수는 없다. 비록 현장감 있는 고통과 시련을 겪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하시며,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서 간구하신다는 진리가 약화되거나 삭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랑 때문에, 때로 고난은 더 깊은 은혜 체험의 장이 되고, 약함은 강함이 되며,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변한다. 이처럼 로마서 8장 28-39절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의 확신과 ‘예지예정’의 은혜, 성도의 견인, 그리고 결국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언약의 견고함을 설파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로마서 8장의 강해를 마무리하며, 다시 한 번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이라는 키워드를 상기시킨다. 우리의 삶은 때로 성취와 실패, 기쁨과 슬픔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초월적 관점에서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완성된다. 이 완성의 그림은 아직 우리가 다 보지 못하나, 결국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고 많은 형제 중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속해 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루는 능력은 전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에게서 나오기에, 어떤 세력도 이를 무너뜨릴 수 없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험난하고 때로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신앙인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의지하며,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감사와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다. 로마서 8장 28-39절은 바로 그 비밀을 우리에게 찬란하게 보여주는 복된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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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영원한 사랑 – 장재형목사

1.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환희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바울 사도의 로마서 8장은 성경 전체에서 복음의 정수를 가장 아름답고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는 장으로, 복음 이해의 핵심적인 열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로마서 8장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환희의 삶”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본문으로,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이야말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난 성도들이 얼마나 큰 기쁨과 소망을 누릴 수 있는지 잘 보여 준다고 말한다.

먼저 현대의 성경은 장과 절이 구분되어 있지만, 본래의 성경은 구분이 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로마서7장과 8장을 끊어서 보지 않고 연속된 메시지로 바라볼 때, 우리가 겪는 내적 갈등과 거듭난 이들의 영적인 자유를 더욱 선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로마서 7장 23절에서 24절은 구원받은 자도 심각한 내면의 분열과 곤고함을 겪는 현실을 보여 준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 본문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이미 구원받아 죄 사함을 받은 자들도 여전히 육신에 속한 문제로 인해 갈등을 경험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구원(칭의)은 받은 상태이지만, 동시에 성화라는 진행 과정 안에 있기에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나타나는 심각한 내면의 모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7장에서 이러한 고통을 토로하면서도, 로마서 8장에서 드디어 성령 안에서 누리는 해방과 기쁨을 선포한다.

로마서 8장의 가장 큰 주제 중 하나는 ‘성령 안에서의 삶’이다. 바울이 8장 전체를 통해 보여 주는 메시지를 정리해 보면,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자유가 어떤 환희와 능력을 낳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포도주에 비유되는 성령에 취한 삶”이라 일컫는다. 이는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삶이 전면적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상징한다. 이미 바뀐 존재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구원받은 성도 역시 원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영광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원죄가 사함받았어도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습관적인 죄’ 혹은 ‘자범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포도주가 이미 되었으나, 그 안에 물이 섞여서 싱거워진 상태’에 빗대어 설명한다. 성령에 의해 거듭나 거룩하게 된 자라 할지라도, 과거의 죄적 습관이 우리의 내면에 계속해서 작동하기 때문에 성화의 과정에서 이를 씻고 정결케 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흔히 혼동하는 것이 예레미야 2장 22절과 이사야 1장 18절 사이의 긴장이다. 예레미야는 “너희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너희 죄악이 여호와 앞에 그대로 있다”고 말했고, 이사야는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라고 선포했다. 장재형목사는 “이 두 예언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으로 결코 죄를 온전히 빨 수 없지만,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기에 하나님의 은혜로는 완전히 씻길 수 있다”라는 구원론적 진리를 지적한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원죄’와 ‘자범죄’를 구분해야 한다.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보편적이며 연대적인 죄의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끊어졌음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원죄 사함’이며, 칭의(Justification)로 설명되는 ‘지위의 변화’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위 변화가 우리의 과거와 전혀 다른 운명을 선사한다고 역설한다. 더 이상 아담 안에서 지배받던 ‘사망의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철폐되었고, 실제로 예수를 믿고 거듭난 자들의 삶에서 ‘칠 대 저주’와 같은 운명적 징벌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죄와의 싸움에서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습관적인 죄’ 즉 자범죄가 여전히 남아서 우리의 걸음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정규전은 끝났으나, 소탕전이 남아 있다”라고 비유한다.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이미 큰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일상에서의 작은 전투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은 전투들은 소탕전이기에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하지만 소탕전을 소홀히 하면 그 잔당들이 다시금 우리를 괴롭게 하고, 성결의 길을 방해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가운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요 13장)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미 전신이 깨끗한 자라도, 걸어 다니는 과정에서 발에 묻은 먼지를 씻어야 하듯이, 구원받은 자들도 일상 속에서 짓는 자범죄를 계속 씻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과정을 “성령 안에서 행하는 자기 성찰과 회개”의 과정으로 본다. 이러한 성화의 훈련은 우리가 이미 얻은 칭의의 확신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견고하게 하는 은혜의 수단이다.

결국 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두 측면을 동시에 품어야 한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큰 전쟁을 이기셨다”라는 승리의 관점이다. 다른 하나는 “남은 전투인 소탕전을 우리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라는 긴장감이다. 장재형목사는 신학자들의 연구와 더불어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인간이 죄를 대할 때 이 이중적 시각을 놓치면 극단으로 치우치기 쉽다고 경고한다. 즉, “이미 죄가 완전히 없어졌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라고 착각하거나, 반대로 “우리 안에 여전히 죄가 남아 있으니 구원의 확신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라고 낙심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균형 잡힌 이해 속에서, 로마서 8장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첫 번째 핵심 메시지는 “성령 안에서의 완전한 자유와 환희는 실제로 경험 가능한 실재”라는 점이다. 바울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으며,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고 선언한다(롬 8:1-2). 여기서 우리는 법적 신분이 바뀐 것에 따른 실질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 14절에서 17절을 통해, 이 자유는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된 자가 ‘성령 안에서’ 아바 아버지를 부르며 친밀하게 교제하는 데서 오는 구체적인 기쁨과 영광으로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자녀 된 자들은 하나님의 상속자이자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되기에, 이 땅에서 어떤 고난이 있어도 그 고난이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단순히 머리로만 이해하는 진리가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친히 증언해 주시는 내면의 확신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18절에서 30절에 이르는 말씀, 즉 ‘우주적인 회복’과 ‘산 자의 부활’에 관한 가르침은 바로 이러한 자유가 개인적·영적 차원을 넘어서 창조세계 전체로 확장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해산의 수고를 하는 이유는,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 때문에 함께 회복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롬 8:19-22). 여기서 바울은 인류를 포함한 우주적 재창조의 비전을 제시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리 맛보는 성도들이 누리는 성령 안에서의 자유가, 개인의 내적 평안에 그치지 않고 역사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된다”라고 설명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창세기 9장의 노아 이야기에 연결 지어, 노아가 홍수 심판 후 새로운 땅, 곧 신천신지(new heaven and new earth)에 내려서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누린 자유와 기쁨을 비유로 사용한다. 노아가 취해 벌거벗은 모습은, 에덴동산에서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모습과 통한다고 말한다. 이는 ‘죄 이전의 순수함’, 혹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거룩한 기쁨’을 상징한다.

여기서 포도주는 성령의 상징이자, 죄 사함과 새 생명의 기쁨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이 이를 예표하며,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 사도와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뒤 “새 술에 취했다”라는 비난을 받았던 장면 또한 같은 맥락이다. 즉 성령 강림으로 인해 예언되었던 새 술이 실제로 부어졌고, 이것이야말로 구약의 예언(요엘 2장 등)이 성취된 결과라고 장재형목사는 강조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이 보여 주는 자유는, ‘물 같은 존재’가 ‘포도주’로 변화되어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거듭남의 실체다. 이것이 우리가 이미 이룬 것이면서도 동시에 계속 누려야 할, 그리고 나아가 자범죄의 흔적을 씻어 내는 성화의 과정에서 더욱 완성해 가야 할 삶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미 우리는 새 집에 이사했지만, 과거의 구습으로 인해 이전 집으로 돌아가려는 습관적 죄에 휘둘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깨어 있는 삶을 살면, 점차 그 습관에서 벗어나 점점 더 성결한 모습으로 나아가게 된다”라고 말한다.

이때 ‘죄의 두루마기’를 빨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묵시록(계 22:14)의 이미지가 중요한데, 이것은 칭의 이후에 우리가 게을리하지 말고 수행해야 하는 매일의 회개와 순종의 삶을 뜻한다. 흰 두루마기를 입고 하나님 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다는 비전(계 19:7-8)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최종적인 영광이자 영화(Glorification)의 단계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성도는 이 미래의 영광을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정리한다.

이처럼 로마서 7장과 8장을 연속성 속에서 살펴보면, 구원받은 자가 현실에서 겪는 내적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제공된 거대한 해방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된다. 또한 장재형목사는 이 모든 과정을 총괄해“우주적인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개인의 신앙 여정이 어떻게 통합되는지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죄와 사망의 법을 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그리고 성령의 내주와 인도하심, 그로 말미암는 자유와 환희는 바로 로마서 8장이 가장 심오하게 증언하는 구원의 보화이자 보증이다.

이것이 첫 번째 소주제인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환희”의 전반적 내용이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했듯, 성도들도 칭의를 받아 새 생명으로 탈바꿈했으며, 그 상태를 유지하고 더욱 선명하게 살아내는 힘이 바로 성령이라고 장재형목사는 지속적으로 역설한다. 구원의 핵심은 단지 죄 사함이나 천국 입장의 권리만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성령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 충만한 기쁨, 활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은 결국 구원을 보증하는 열매가 되고, 우리를 더 높은 차원의 영광으로 이끈다.

2.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

앞서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환희”가 로마서 8장의 전반부(1절에서 30절까지)에 걸쳐 펼쳐진다면, 이어지는 31절부터39절은 이 모든 구원과 성령의 역사를 종합하고 결론 내리며, 절정으로 치닫는 장면을 보여 준다. 이 마지막 단락은 흔히“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혹은 “영원한 사랑”에 대한 가르침으로 알려져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두고 로마서 16장 중에서도 가장 웅장하고 확실한 ‘승리의 찬가’라고 칭한다.

먼저 성도의 견인이란, 구원받은 사람이 끝까지 믿음을 지켜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는다는 교리를 말한다. 칼뱅주의 전통에서“성도의 견인”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라는 교리와도 연결되나, 단순히 기계적인 교리적 해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바울은 로마서 8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끝까지 붙드시는 사랑의 능력과 확실성을 증언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해설하면서, “성령 안에서 거듭난 성도들은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 어떤 세력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 없는 굳건한 언약 관계에 들어섰다”라고 강조한다. 이는 구원의 확신과 더불어 우리에게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자범죄로 인한 넘어짐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고, 결코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신다는 약속이다.

그렇다면 이 견인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으니,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라고 반문한다. 즉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절대적인 사랑, 곧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극진한 사랑이, 우리의 구원을 보존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라는 것이다. 우리가 연약할 때, 혹은 신앙적으로 흔들릴 때, 심지어 죄의 습관에 매여 잠시 길을 잃을 때도,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하나님 편의 100% 헌신에 근거한 구원의 보증”이라 부른다.

또한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라는 구절이 말해 주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칭의받은 성도에게는 죄의 정죄 권한이 더 이상 없음을 확실히 보여 준다. 세상이나 사탄이 고소한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우리를 의롭게 선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의 판결은 취소될 수 없다.

장재형목사가 주목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끊을 수 없음’이 곧 방종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그 사랑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사랑을 깨달은 자들은 ‘포도주로 옷을 빨아야 한다’라는 묵시록적 이미지를 기억하고, 더욱 경건과 순종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아는 자는, 그 사랑을 배반하는 길을 택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넘어질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다시 회개하고 돌아와 견인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편에서 결코 끊어지지 않는 언약적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사랑’이라는 표현으로도 설명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랑이 칭의, 성화, 영화까지 이어지는 전 구원의 과정 내내, 성도를 인도하고 지키는 절대적 힘이라고 강조한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셨다”라는 복음의 기초적 선언이며, 이 사실 위에서 로마서 8장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다”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두 축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 로마서 8장 후반부는 마치 구원의 대서사시가 결론 부분에 다다라 울리는 웅장한 합창과 같다. 바울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이 얼마나 견고하며 영원한 것인지를 놀랍도록 힘차게 선포한다. 이 메시지가 주는 위로와 확신은, 우리의 일상적 신앙생활 속에서 커다란 힘이 된다.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성도들은, 계속되는 자범죄와의 싸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성화의 과정을 걸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라는 절대적 약속이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가르침을 삶에 실제로 적용해야 함을 여러 차례 설교와 강의에서 역설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보장된 구원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초월하는 자유와 담대함’을 준다. 세상적 가치나 환경이 우리를 흔들 수 있으나, 결국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 강력하기에, 우리는 어떠한 환난이나 박해도 이겨 낼 수 있다. 실제로 믿음의 선진들, 교회사 속의 무수한 순교자들, 그리고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성도들은, 이 로마서 8장의 약속을 붙들고서 담대히 믿음을 지킨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을 “노아의 포도주 비유”와 함께 연결 지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릴 영원한 기쁨이 이미 이 땅의 성도들에게 예표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노아가 홍수 후 새로운 땅에 발을 디딘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해 마치 심판 이후의 새 세계를 미리 맛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옷을 벗고도 부끄러움이 없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기쁨은 참으로 완전하며, 장차 도래할 천국 잔치의 작은 모형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삶을 지속하도록 붙들어 주는 것이 “영원한 사랑”이다.

또한 이 견인 교리는 우리의 인간적 약함이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구원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교리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선택했고, 죄를 멀리할 의무가 있지만, 여전히 연약해서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이 ‘영원한 사랑’의 본질이다. 하나님 편에서 절대 끊지 않겠다고 하신 언약적 사랑이 있기에, 성도는 언제든지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으며, 끝까지 구원을 지켜 갈 수 있다”고 해설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은 ‘칭의(Justification) → 성화(Sanctification) → 영화(Glorification)’로 이어지는 구원의 전 과정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완성된 상태로 죄와 씨름하는 모습을 7장 후반부에서 현실감 있게 보여 준 후, 8장에 이르러서는 성령 안에서의 자유와 환희의 삶, 그리고 결국에는 성도의 견인, 곧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완전히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조적 흐름이 “신학적 지식”을 넘어 신앙인이 삶으로 체험해야 할 “구원의 서정”이라고 설명한다. 지식으로만 알 때는 피상적일 수 있지만, 실제 삶에서 성령의 거룩한 인도를 경험하고, 매일의 회개와 말씀 묵상을 통해 옛 죄의 습관을 씻어 내며,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끝까지 나를 사랑으로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체험함으로써, 로마서 8장의 진수를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은 우리에게 종말론적 소망도 준다. 이 땅의 고난이나 불안, 그리고 죽음조차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대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담대한 믿음을 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8장이 말하는 최고의 클라이맥스이며, 나아가 복음 전체가 선포하는 ‘승리의 복음’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견인의 교리가 지닌 실제적 효력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교회 역사상 많은 성도들이 낙심의 순간, 혹은 시험과 고난의 때에 로마서 8장 31절부터 39절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의 무릎을 꿇으며, “어떤 것도 우리를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라는 선포로 절망을 돌파했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이 결국은 실제 삶에서의 극복과 승리로 이어졌다. 바울의 선언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승리자이기 때문이다(롬 8:37).

이처럼 두 번째 소주제인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을 통해, 로마서 8장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는 단지 신학적 교리의 완결이 아니라, 실제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를 붙드는 가장 강력한 힘이자 약속이다. 우리는 로마서 8장을 통해 죄의 문제에서 자유와 환희를 경험할 뿐 아니라, 아무리 힘든 상황이 닥쳐도 하나님이 시작하신 구원을 끝까지 온전하게 완성하시리라는 ‘반석 같은 확신’을 얻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로마서 8장은 구원의 드라마가 정점에 달하는 장면이며, 성령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동시에, 마지막에는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위에 굳게 서 있음을 확인해 주는 클라이맥스다. 장재형목사는 이 로마서 8장의 메시지를 붙들면, 성도들이 인생의 여러 전환점을 맞고 비약적인 영적 성장과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아무리 죄의 습관이 견고해 보여도,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보증하기에 소망이 있다.

바울이 로마서 8장 곳곳에서 성령의 역할, 죄로부터의 해방, 자녀 됨의 영광, 우주적 회복, 그리고 견인의 확신을 일관되게 증거하는 것은, 한마디로 “복음의 핵심을 집약적으로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 복음의 결론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의 사역, 봉사, 순종, 심지어 회개와 성화의 노력조차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지 않다면 헛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를 내어 주시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우리가 끝까지 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따라서 장재형목사가 일관되게 강조하듯, 로마서 8장은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그 사랑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역사하며, 우리를 변화시키고, 자유케 하고, 환희를 맛보게 하고, 결국은 영원한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되는지에 대한 전체 과정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언약으로써, 성도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신뢰할 수 있는 반석과 같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정리하자면, 로마서 8장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환희, 그리고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된 위대한 구원의 장이다. 첫 번째 축에서는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고 성령의 내주로 인해 경험하는 새로운 삶의 기쁨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두 번째 축에서는 그렇게 시작된 구원이 궁극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이유, 즉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우리를 붙들기 때문임을 힘차게 선포한다. 이 사랑은 어떤 조건이나 능력, 혹은 우리의 공로에 달려 있지 않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신 대속적 희생과 성령의 인치심이 보증이 된다.

결국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을 공부하는 것이야말로 성도들이 영적 전환과 깊은 회복을 경험하는 핵심 열쇠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다. 구원의 서정을 이해하고, 이미 주어진 자유와 기쁨을 소홀히 하지 않으며, 동시에 어떤 환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견인과 영원한 사랑의 확신을 붙들 때, 우리의 신앙은 한 단계 더 성숙해지고, 더 큰 평안과 능력 가운데 거하게 된다. 이는 바울이 꿈꾸었고 경험한,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동일하게 누릴 수 있는 복음의 실제적 능력이다.

이처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환희’와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이라는 두 소주제로 재구성해 보았을 때, 로마서 8장은 죄의 문제로부터의 해방, 하나님의 자녀 됨의 영광, 우주적 회복의 비전,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끊을 수 없는 사랑 안에 거하는 성도의 견인까지, 복음의 정수와 희망을 가장 웅장하게 드러내는 장이 된다. 칭의, 성화, 영화라는 구원의 전 과정 속에서 인간이 겪는 모든 실존적 갈등과 그것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데 어우러져, 성경 안에서도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이룬다.

결국 로마서 8장의 결론은 “우리에게는 어떤 정죄도 없다”와 “어떤 것도 우리를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로 요약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두 선언이야말로 기독교 복음이 제시하는 가장 확고한 기쁨과 소망의 표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을 듣는 성도들은 지금도 큰 위로와 확신을 얻어, 세상 속에서 빛으로 살아가며,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소망 중에 기다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을 연구하며 설교할 때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죄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포도주가 되어 가는 체험을 하는 것”임을 누차 말한다. 다시 말해, 물과 같은 상태에서 포도주로 변화된 존재가 결코 물로 돌아갈 수 없듯이, 우리도 이미 거듭난 후에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물론 삶에서의 실패나 유혹이 있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근거가 ‘성도의 견인’이며, 우리의 결말이 ‘영원한 사랑 안에서의 완성’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점점 더 죄의 습관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께 가까워질 수 있다.

여기서 죄의 습관을 씻고 정결하게 하는 과정은 결코 단발적 이벤트가 아니다. 이는 매일의 말씀 묵상, 기도, 회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훈련 등을 통해 이뤄진다. 그 과정에서 한순간에 완벽해지지는 않지만, 분명히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생명의 힘이 우리 안에서 작동한다. 로마서 8장이 말하는 ‘성령의 내주’란 결코 추상적인 사상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안의 욕망과 두려움을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만드는 힘이다.

더불어, 장재형목사가 즐겨 사용하는 예화인 노아의 포도원은 이 과정을 조금 더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만들어 즐기는 모습은, 종말론적 구원 이후에 누리는 충만한 기쁨을 상징한다. 그러나 노아가 그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었을 때, 함의 태도와 셈과 야벳의 태도가 갈렸다. 누군가는 아버지의 수치를 들추어내려 했고, 누군가는 그것을 덮어 주었다. 이처럼 구원 이후에도 인간의 다양한 태도가 드러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포도주”는 축복이었고,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무대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열매 맺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로마서 8장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도 우리를 포도주처럼 변화시키며, 그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여러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약속으로 귀결된다(롬 8:28).

마지막으로,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은 곧 “끝까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동행”을 의미한다. 바울이 8장 끝에서 고백한 “내가 확신하노니…”라는 선언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시작하신 것이며, 하나님이 충성스럽게 마무리하신다(빌 1:6 참조). 그 과정에서 성도는 중간에 흔들릴 수 있어도, 결코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그 사랑이 너무나 크고, 죄인이었던 우리를 아들 삼으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실로 완전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로마서 8장의 메시지를 통해, 장재형목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시대적 혼란과 개인적 고통 가운데서도 결코 좌절하지 말고,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환희”를 붙들며, 동시에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을 신뢰할 것을 강조한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질 때, 우리 신앙은 튼튼한 기둥을 세우게 되고,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영적 유산을 간직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 8장 전 구절에 걸쳐 호흡을 담아 전하려 했던 복음의 핵심이며, 장재형목사가 설교와 강의, 저술 등에서 끊임없이 외치는 신앙의 정수다.

결국 로마서 8장은 ‘복음의 하이라이트’로서 성령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동시에 그 삶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위에 세워져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죄의 짐을 벗고 자유롭게 걷는 성도들이, 혹여나 넘어질까 두려워할 때 바울의 음성이 들린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그리고 이 말씀을 연구한 장재형목사는 확신에 차서 대답한다. “아무것도 끊을 수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안에 있다.”

이것이 로마서 8장의 결론이자,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복음의 정수다. 두렵고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우리는 이 말씀을 다시 깊이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어떠한 상황도 우리를 흔들어 놓을 수 없다는 견인과 영원한 사랑 위에 굳게 서야 한다. 이 복음의 능력이 오늘도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으며,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진리의 빛으로 세상 속에서 빛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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