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Caravaggio)의 걸작 **「성 마태의 소명」**을 보면,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세관 안으로 날카로운 빛 한 줄기가 비스듬히 파고듭니다. 그 빛은 방 안에 있는 모든 이를 무차별적으로 조명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사람, 마태의 얼굴을 정확히 겨냥합니다. 그 빛을 마주한 자는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근원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안디옥교회 강해는 바로 이 ‘빛의 사건’으로부터 신앙의 본질을 추적합니다. 복음이란 단순히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존재를 일으켜 세우고 공동체를 빚어내어, 마침내 세상을 향해 걸어가게 만드는 거대한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1. 고정된 장소에서 파송의 현장으로: 안디옥의 태동
기독교 역사에서 안디옥교회가 지니는 상징성은 매우 독특합니다. 이 교회는 화려한 성전이나 견고한 제도적 조직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철저한 자기 비움인 기도와 금식 속에서 세미한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성령의 주권적 파송: 안디옥교회는 자신들의 공동체가 비대해지는 것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음성에 순복하여 가장 유능한 지도자였던 바나바와 바울을 세상의 한복판으로 기꺼이 보냈습니다.
교회의 본질적 정의: 이를 통해 교회는 ‘복음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창고’가 아니라, ‘복음에 사로잡혀 세상으로 나가는 파송 기지’라는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교회는 모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흩어지기 위해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무게와 이방 선교의 지평
안디옥은 유대인과 헬라인, 그리고 수많은 이방인이 복음 안에서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를 이룬 역사적 현장입니다. 이곳에서 제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
세상의 증언: 이 명칭은 성도들이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 지어낸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을 지켜보던 세상 사람들이 “저들은 진실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다”라고 인정하며 붙여준 영광스러운 흔적이었습니다.
신앙의 이중주: 안디옥교회는 ‘내적 은혜’와 ‘외적 사명’의 균형을 완벽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끊임없는 기도와 감사가 샘솟았고, 공동체 밖으로는 전도와 교회 개척의 열매가 강물처럼 흘러갔습니다. 이러한 균형이 무너질 때 교회는 자기 보존에만 급급한 폐쇄적 집단이 되거나, 영적 뿌리 없이 활동만 무성한 단체가 되고 맙니다.
3. 골로새서의 신학적 기둥: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서다
안디옥교회의 열정적인 활동은 골로새서가 제시하는 단단한 교리적 기초 위에 서 있었습니다. 골로새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자 ‘모든 만물의 머리’라고 선언합니다. 장재형 목사의 신학적 통찰은 바로 이 기독론적(Christological) 기초를 강조합니다.
윤리적 모범을 넘어서: 예수님을 단지 도덕적인 스승이나 성인으로 축소한다면, 교회는 세상의 수많은 구호단체 중 하나로 전락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복음: 십자가의 피로 하늘과 땅의 화평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때, 복음은 단순한 교훈을 넘어 우주의 질서를 재편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됩니다.
지식과 삶의 일치: 신학적으로 바르게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바르게 사는 것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성경 묵상은 지적 유희가 아니라 회개와 순종을 통해 삶의 열매를 맺는 거룩한 노동입니다.
4. 기도와 감사의 다리: 보이지 않는 연합의 신비
초대교회가 지녔던 진정한 힘은 눈에 보이는 건물의 규모가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해 연결된 **’영적 유대’**에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멀리 떨어진 교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그들의 소식에 감사했던 것처럼, 기도와 감사는 흩어진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보이지 않는 다리였습니다.
공교회성의 회복: 교회는 지역적인 모임이면서 동시에 전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단이나 문화의 장벽을 넘어 복음 안에서 서로를 기억할 때, 선교는 소모적인 경쟁이 아닌 아름다운 동역으로 승화됩니다.
감사라는 엔진: 감사 없는 사역은 금세 피로와 번아웃을 부릅니다. 그러나 은혜를 기억하는 공동체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기보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높이며, 내부의 안정을 박차고 세상의 고통 속으로 기꺼이 뛰어듭니다.
5. 흩어지는 교회, 세상을 밝히는 등불
안디옥교회의 위대함은 ‘가장 귀한 것을 붙잡아 두지 않은 용기’에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라는 핵심 인재를 파송한 것은 선교적 교회가 지닌 역설적 승리를 보여줍니다.
역동적인 생명력: 복음은 정적인 지식이 아니라 움직이는 생명입니다. 성도는 은혜를 받은 지점에서 머무는 정체된 존재가 아니라, 그 은혜를 삶의 모든 현장(가정, 직장, 사회)으로 실어 나르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선교적 존재 양식: 세계 선교는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는 사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언어와 인종의 경계를 넘어 흘러가게 하는 영적 사건입니다. 사랑은 말보다 태도에서, 순종은 편안함보다 선택의 순간에 그 진실함이 드러납니다.
결론: 우리는 무엇에 붙들려 있는가
결국 안디옥교회의 정신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준엄한 질문을 남깁니다. 우리는 복음을 얼마나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를 자랑합니까, 아니면 복음이 우리 삶을 얼마나 강력하게 뒤흔들고 있는가를 고백합니까?
교회의 성취는 얼마나 많은 인원이 모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각자의 삶의 자리로 거룩하게 흩어졌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며, 그 은혜를 온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삶. 그것이 안디옥이 남긴 믿음의 궤적입니다.
당신은 지금 복음을 붙들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복음에 붙들려 세상을 향해 보내진 사람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당신의 응답이 바로 당신의 오늘을 결정할 것입니다.
서구의 고전 성화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향유 옥합을 든 여인의 모습은 대개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오직 주님의 발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적인 장면이 뿜어내는 영적 파동은 수 세기를 지나 오늘날 우리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토록 소중한 것을 단번에 깨뜨리게 했는가? 왜 그녀는 남김없이 쏟아부어야만 했는가?”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는 이 침묵의 헌신 속에 기독교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정수, 즉 **’복음’**이 맥동하고 있다고 역설합니다. 여인이 옥합을 깨뜨린 행위는 단순한 미담이 아니라, 장차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미리 보여주는 거룩한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1. 효율의 논리를 뒤엎는 사랑의 파격
마태복음 26장의 배경은 긴장감으로 가득합니다. 한 여인이 지극히 귀한 향유를 가지고 나아와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순간, 그 장소에 모여 있던 이들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특히 제자들은 이를 ‘낭비’라고 규정하며 불쾌감을 드러냈습니다.
세상의 잣대: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이들을 구제했다면 얼마나 유익했겠는가?”라는 제자들의 항변은 매우 합리적이고 정의로워 보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효율성’과 ‘사회적 가치’의 언어와도 닮아 있습니다.
주님의 시선: 그러나 예수님은 이성적인 계산기를 두드리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여인을 옹호하셨습니다. “그녀는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는 주님의 선언은, 복음의 가치가 인간의 산술적 계산을 넘어선 곳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대목에서 복음의 심연이 열린다고 강조합니다. 복음은 ‘계산’이 멈춘 곳에서 비로소 ‘계시’로 다가옵니다.
2. 십자가, 하나님이 자신을 깨뜨리신 사건
왜 이 여인의 행위가 복음 그 자체가 될까요? 복음의 핵심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낸 업적에 있지 않습니다. 반대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먼저 비천한 죄인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자기 비움(Kenosis):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쏟아내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창조주가 피조물의 손에 죽는 것은 가장 비효율적이고 어리석은 ‘자기 파괴’처럼 보입니다.
복구 불가능한 헌신: 옥합은 한 번 깨지면 다시 붙일 수 없고, 쏟아진 향유는 다시 병에 담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 또한 그러했습니다. 적당히 나누어준 것이 아니라,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전적인 투여를 하신 것입니다. 올리벳대학교의 신학적 묵상이 주목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입니다. 이 여인의 행위는 십자가라는 ‘거룩한 낭비’를 온몸으로 비추어낸 거울이었습니다.
3. 은전의 소리와 향유의 향기: 두 영혼의 갈림길
이 본문이 더욱 처연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여인의 헌신 바로 뒤에 유다의 배반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두 인물을 대조하며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여인의 옥합: 사랑을 발견한 자는 가장 귀한 것을 깨뜨려 드렸습니다. 그녀에게 주님은 온 세상보다 귀한 분이었습니다.
유다의 은전: 사랑을 ‘허비’로 여긴 자는 가장 귀한 분을 은 30에 팔아넘겼습니다. 그에게 주님은 자신의 야망을 채워줄 도구이거나, 가성비가 떨어지면 처분해야 할 상품에 불과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신앙의 성패가 결국 ‘사랑을 대하는 태도’에서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주님 곁에서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내 영혼을 적시는 ‘은혜’가 되었느냐는 점입니다. 복음을 머리로만 이해하면 계산기가 남고, 복음을 가슴으로 영접하면 옥합을 깨뜨리는 모험이 시작됩니다.
4. 현대의 ‘실용주의 신앙’을 향한 경종
우리 또한 매일 이 두 사람 사이의 경계선 위에서 위태롭게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조차 ‘투자 대비 효율’을 따지는 순간, 우리는 유다의 길에 가까워집니다.
기도의 응답이라는 ‘결과’에만 매몰될 때, 순종보다는 ‘손익계산서’를 먼저 작성할 때, 우리는 옥합의 가치가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눈물 어린 헌신을 보고 “적당히 좀 하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우리 마음에는 복음의 향기가 마른 것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역설을 가르칩니다. 사랑은 남는 자투리 시간을 내어주는 취미 생활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거룩한 허비’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도의 진정한 정체성은 바로 이 ‘어리석어 보일 만큼 깊은 사랑’ 안에서만 선명해집니다.
5. 사랑받은 자만이 옥합을 깰 수 있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는 우리에게 무거운 율법적 짐을 지우지 않습니다. 대신, 근원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대는 진정으로 사랑받았음을 확신하는가? 십자가가 여전히 그대의 심장을 뛰게 하는 복음인가?”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만이 자기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눌 수 있듯,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를 경험한 자만이 자신의 옥합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회개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너무나 익숙한 종교적 문장으로만 취급하며, 주님의 사랑을 효율의 언어로 난도질해 온 우리의 메마른 가슴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 지점에서 죽어있던 신학은 살아있는 묵상이 되고, 멀게만 느껴졌던 말씀은 가슴을 울리는 소망이 됩니다.
결론: 당신의 옥합은 어디에 있습니까?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가 복음인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방식—이유를 묻지 않고 자신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사랑—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이 ‘사랑의 낭비’를 이해하지 못해 멸망의 길로 갔지만, 여인은 이 사랑의 본질을 직감적으로 붙잡아 영생의 기록 속에 남았습니다.
우리는 매일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손해’로 볼 것인가, 아니면 내 존재를 바꿀 ‘생명의 향기’로 받을 것인가. 오늘 당신의 삶에서, 주님께 드리기 아까워 아직도 품속에 꼭 쥐고 있는 옥합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 그곳의 밤은 공기보다 영혼이 더 시린 공간이었습니다.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숯불의 온기조차 베드로의 심장까지 파고든 공포의 냉기를 녹이지는 못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는 “주님과 함께라면 투옥도,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며 장담하던 열혈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서슬 퍼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그가 쌓아 올린 신념의 성벽은 한낱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 참담한 장면을 마주할 때면 우리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沈黙)》**의 절정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 로드리게스 신부는 배교를 강요당하며 성화(후미에)를 밟아야 하는 극한의 고문 앞에 섭니다. 그때 흙먼지 묻은 성화 속 예수님은 침묵을 깨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너의 아픔을 내가 가장 잘 안다.”
자신의 발로 가장 사랑하는 스승의 얼굴을 짓밟아야 했던 로드리게스의 고통은, 2천 년 전 닭 울음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영혼이 파산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베드로의 통곡과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정했을 때, 베드로는 스승을 부인한 것을 넘어 자기 존재의 가장 깊은 뿌리를 스스로 잘라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 닭 울음소리: 인간 의지의 파산 선고와 은혜의 개입
성경은 초대 교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의 이 치욕스러운 실패를 조금도 가감 없이, 오히려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복음서 저자들은 이토록 뼈아픈 치부를 상세히 남겼을까요?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는 이 사건을 단순한 도덕적 타락이 아닌, **’인간 의지의 완전한 종말’**과 **’하나님 은혜의 전적인 시작’**을 보여주는 구원론적 사건으로 조명합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뜨거운 신념과 굳건한 의지로 신앙의 정조를 지킬 수 있다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요구했다(눅 22:31)”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베드로의 무너짐이 단순한 심리적 위축이 아닌 치열한 영적 전쟁의 결과였음을 상기시킵니다. 인간의 육체적 용기나 감정적 열정만으로는 죽음의 공포와 사탄의 집요한 참소를 결코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이 베드로의 배신을 통해 증명된 것입니다. 닭이 두 번 울었을 때, 베드로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끝까지 주님 곁을 지킬 수도 없는 철저히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 심연에서 마주친 시선: 정죄를 넘어선 ‘거룩한 항복’
복음의 진정한 위대함은 바로 그 ‘철저한 무력함의 자리’에서 싹을 틔웁니다. 누가복음은 베드로가 세 번째 부인을 마친 직후,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눅 22:61)”**고 기록합니다. 그 찰나의 눈맞춤은 배신자를 향한 싸늘한 질책이나 정죄의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소설 《침묵》이 묘사했듯, “나는 너를 위해 밟히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고통받는 자의 깊은 연민이자,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의 시선이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에서 베드로가 밖으로 나가 쏟아낸 ‘통곡’의 의미에 주목합니다. 베드로의 울음은 단순한 후회나 자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확신이라는 견고한 우상을 스스로 깨뜨리고, 오직 주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한 순간도 숨 쉴 수 없음을 인정하는 **’거룩한 항복’**이었습니다. 실패는 쓰라리지만, 그 실패가 우리를 주님의 시선 앞에 정직하게 머물게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깨어지고 부서진 마음(Contrite Heart)이야말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가장 거룩한 성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 깨어진 그릇에 담긴 보배: 상처 입은 치유자의 탄생
놀랍게도 이 처절한 실패의 밤을 통과한 베드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사도행전 속의 베드로는 더 이상 계집종의 추궁에 떨던 비겁한 어부가 아닙니다. 산헤드린 공회라는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도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사자후를 토하는 담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신학적 통찰에 따르면, 이 놀라운 담대함은 자신의 강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자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신의 밑바닥까지 추락해 보았으나, 그 심연보다 더 깊은 곳에서 자신을 받쳐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했기에 그는 더 이상 세상이 두렵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당부하신 말씀은, 실패해 본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진정한 위로와 회복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로서의 베드로는 그렇게 고통의 용광로 속에서 빚어졌습니다.
🌅 지금도 닭은 울고 있다: 우리를 깨우는 은혜의 알람
오늘날 우리 역시 수많은 ‘베드로의 뜰’ 앞에 서 있습니다. 사회적 성공, 체면, 혹은 생존이라는 절박한 핑계 뒤에 숨어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주님을 모른 척하며 살아갑니까?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겪는 실패와 넘어짐이 결코 ‘끝’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닭 울음소리는 심판의 파멸을 알리는 나팔이 아니라, 이제 그만 거짓된 자아의 잠에서 깨어나 참된 새벽을 맞이하라는 **’은혜의 알람’**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부인 사건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신앙은 당신의 의지 위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중보 기도 위에 서 있습니까?” 우리가 완전히 실패하여 넘어지는 그 순간조차, 주님은 우리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가장 캄캄한 밤, 닭이 울 때야말로 비로소 진짜 새벽이 오고 있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연약함마저 들어 쓰시는 그 복음의 신비 앞에서, 오늘 우리는 다시 옷깃을 여미고 주님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그 눈물 젖은 눈맞춤 속에, 다시 일어설 힘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은 신앙의 무대가 정결한 성소뿐만 아니라, 거친 광야의 모래바람과 복잡한 도심의 소음 한복판임을 일깨워줍니다.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설립자)는 이 본문을 통해 단순한 율법적 경고를 넘어, 그 엄중함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세밀한 은총을 길어냅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을 박제된 과거사로 취급하지 않고, 오늘날의 성도가 매일 마주해야 할 영적인 거울로 소환합니다. 기적 같은 구름기둥의 인도와 하늘의 만나를 경험했음에도 무너졌던 이들의 역사는, 은혜를 경험했다는 안일함에 빠진 신자들에게 “선 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유의하라”는 날카로운 각성을 촉구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권면이 공포를 조장하는 위협이 아니라, 은혜를 변질시키지 않고 끝까지 보존하게 하려는 사랑의 초대라고 해석합니다.
1. 광야: 자만을 태우고 신뢰를 빚는 공간
광야는 과거의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성도의 내면에 수시로 재현되는 영적 환경입니다.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욕망과 관계의 균열, 효율성을 숭상하는 세상의 압박이라는 현대판 광야와 마주합니다. 장재형 목사가 이 본문을 ‘광야 생활 지침서’로 풀어내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많은 이들이 영적 성취를 ‘완전한 면역’으로 오해하지만, 바울은 은혜의 경험이 곧 자만의 근거가 될 때 그것이 오히려 우상처럼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계합니다. 은혜가 “나는 안전하다”는 자기 확신으로 굳어지는 순간, 신뢰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절망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시고 피할 길을 내신다”는 약속은 시험을 제거해달라는 기도보다, 시험을 통과하는 중심의 변화를 구하게 합니다. 여기서 ‘피할 길’은 상황의 모면이 아니라, 동일한 고난을 전혀 다른 영성으로 돌파해내는 은총의 통로를 뜻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신앙을 상황의 통제가 아닌 ‘예배의 지속’으로 정의하며, 광야를 믿음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정금의 도가니로 묘사합니다.
2. 우상숭배와 성찬: 어떤 교제에 참여할 것인가
바울은 광야의 교훈을 당시 고린도의 우상 숭배 문제로 직결시킵니다. 장재형 목사는 우상의 위험성이 그 ‘일상성’에 있다고 진단합니다. 고린도의 우상은 사회적 관계와 경제 활동 속에 공기처럼 스며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우상 역시 조각상의 형태가 아니라 성공, 소비, 자극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합니다. 예배가 특정 시간이 아닌 마음의 왕좌를 결정하는 일이듯, 우상숭배는 하나님 없이도 삶이 충분하다고 믿게 만드는 모든 체계의 총합입니다.
이에 대한 강력한 대안으로 바울은 ‘성찬’을 제시합니다. 성찬은 십자가라는 과거의 사건을 현재형으로 끌어오는 식탁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성찬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고백하고, 그분의 희생이 내 삶의 결정을 내리는 실질적인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보여주듯, 그 식탁은 완벽한 자들의 잔치가 아니라 결함 있는 자들이 십자가 빛 아래서 새 생명으로 빚어지는 용광로입니다.
3. 공동체의 질서: 아가페의 계산과 자유의 품격
성찬의 연합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윤리로 확장됩니다. “떡이 하나요 우리가 한 몸”이라는 선언은 개인주의적 영성을 거부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성찬이 사적인 경건으로 축소될 때 교회의 생명력은 사라진다고 지적합니다. 코이노니아(교제)는 정서적 친목을 넘어, 상대방을 경쟁자가 아닌 배려의 대상으로 보는 십자가의 질서입니다. 이 연합은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케리그마(선포)가 되며, 약한 자를 돌보는 디아코니아(섬김)로 완성됩니다.
바울이 다룬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 논쟁은 현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라는 대원칙은 율법주의와 방종이라는 양극단을 모두 경계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양심의 배려’를 기독교 윤리의 정수로 꼽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권리를 관철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할 줄 아는 성숙한 존재입니다. 효율이 아닌 사랑을 계산하는 ‘아가페의 셈법’은 십자가의 방향성을 닮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모든 일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결국 고린도전서 10장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대주제로 귀결됩니다. 이는 관념적인 구호가 아니라, 스마트폰을 다루는 손끝에서부터 돈을 쓰고 이웃과 대화하는 사소한 순간까지 하나님을 높이는 기준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십자가의 빛 아래 사는 신자가 광야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 속에서 복음의 향기를 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세상의 문화 속에 거하지만 세상의 가치를 섬기지 않는 것, 자유를 누리되 타인의 유익을 먼저 헤아리는 것, 그리고 어떤 시련 중에도 하나님의 미쁘심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십자가가 비추는 성도의 소명입니다. 십자가의 빛 안에서 우리의 변명은 멈추고, 하나님의 참되심만이 우리를 다시 인간다운 삶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과 생애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한 인간의 존재를 어떻게 근원적으로 변혁시키며, 그 변화가 어떻게 타인과 공동체, 나아가 사회 전체를 향한 헌신으로 확장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찬란한 이정표이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바울이 고백한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는 선언은 기독교 신앙이 보유한 가장 깊은 역설 중 하나인 ‘자유와 종됨의 신학’을 관통한다. 장재형 (올리벳대학교 설립)목사는 이 본문을 통해 복음적 자유가 단순히 율법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넘어, 사랑의 극치 안에서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결박하는 자발적 헌신으로 나아가는 과정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절대적 가치로 추앙받는 현대 사회에서 크리스천이 견지해야 할 진정한 실존적 태도가 무엇인지를 준엄하게 묻는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에 따르면, 바울이 누렸던 자유는 ‘나를 위한 자유’에 머물지 않고 ‘타인을 위한 자유’로 승화되었으며,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케노시스’, 즉 자기 비움의 영성과 궤를 같이한다. 빌립보서 2장에서 묘사된 것처럼,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종의 형체를 입어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바울 사역의 근간이자 모든 성도가 지향해야 할 종착지이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종됨’이 외부의 강요나 율법적 당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압도적인 사랑에 포로가 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자발적 순종의 결과임을 역설한다.
이러한 복음의 본질적 자유는 구체적인 전도 전략과 삶의 태도로 투영된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과 같이 됨으로써 복음의 보편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문화적 유연성을 발휘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본질에의 충실성과 형식의 유연성’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며, 현대의 전도자들이 대상의 상황과 문화적 맥락을 깊이 존중하면서도 십자가의 진리는 타협하지 않는 지혜를 가져야 함을 가르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마땅한 권리인 사도적 보수를 포기하고 텐트를 만드는 자비량 사역을 선택한 것은, 복음 전파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바울의 태도가 물질 만능주의와 성과주의에 함몰되기 쉬운 오늘날의 신앙 공동체에 던지는 경종이 크다고 보았다. 특히 바울의 삶을 시각적으로 가장 잘 투영한 예술가 중 한 명인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의 명화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The Apostle Paul in Prison, 1627)’을 떠올려 보라. 어두운 감옥 안에서 빛을 받으며 깊은 사색에 잠겨 펜을 든 바울의 모습은, 비록 육신은 매여 있으나 영혼은 복음 안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온 세상을 향해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는 그의 역설적 위대함을 잘 보여준다. 렘브란트의 명암 대비(Chiaroscuro)는 바울이 겪은 고난의 어두움과 그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복음의 소망을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장재형 목사는 이와 같이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는 바울의 영성이야말로 복음이 가진 진정한 생명력의 증거라고 강조한다.
나아가 바울의 신학은 빌레몬서에 나타난 것처럼 사회적 구조와 인간관계의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낸다.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향해 “그를 형제로 대하라”고 빌레몬에게 간청하는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는 계급과 신분을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발견한다. 장재형 목사는 빌레몬서의 화해 메시지가 단순히 개인적 용서의 차원을 넘어, 복음이 어떻게 사회적 불평등과 갈등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천적 지표라고 설명한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진 빚을 대신 갚겠다고 자처하며 화해의 중재자가 되었는데, 이는 곧 죄인 된 우리를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삶으로 재현한 것이다. 이러한 화해와 용서의 신학은 오늘날 분열된 사회 속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의 사명을 일깨운다. 장재형 목사는 크리스천의 순종이 단순히 행동의 수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 사랑에 응답하는 내면의 완전한 굴복임을 강조하며,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형제로 연합된 것처럼 현대 교회도 차별 없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바울은 또한 신앙의 여정을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경주자에 비유하며, 향방 없는 달음질이 아닌 분명한 목표를 향한 집중력을 요구한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서 27절에 이르는 자기 절제와 훈련의 메시지는 종말론적 소망을 가진 성도의 필수적인 태도이다. 세상의 선수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위해 자신을 연단하지만, 크리스천은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절제를 실천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의 절제가 단순한 자기 억압이 아니라, 더 큰 영광과 소망을 발견한 자가 누리는 거룩한 집중력임을 가르친다.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자신이 전파한 복음에서 스스로가 소외되지 않기 위함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철저한 자기 성찰과 연단이 현대의 디지털 문명과 유혹 속에서 영적 주의력을 상실한 크리스천들에게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덕목이라고 강조한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현재의 삶을 조망할 때, 우리는 일시적인 성취나 고난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상급을 향해 묵묵히 나아갈 수 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열거된 바울의 수많은 고난들—매 맞음, 굶주림, 파선, 위협—은 그를 좌절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통로가 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약함이 곧 그리스도의 강함이 되는 신비로운 은혜를 체험할 때, 고난은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가 된다고 독려한다.
장재형 목사의 통찰을 종합해 볼 때, 사도 바울의 생애는 복음이 한 인간을 어떻게 ‘모든 사람의 종’이 될 만큼 거대한 사랑의 소유자로 빚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완성된 서사이다. 바울은 율법의 엄격함에서 복음의 유연함으로, 자기 의의 요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바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로마라는 거대 제국의 도시들을 거점으로 삼아 복음의 전초기지를 세웠고,자비량 선교를 통해 복음의 독립성과 순수성을 지켜냈다. 이러한 바울의 사역 철학은 오늘날 올리벳대학교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 현장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모델이 되고 있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적 자유와 헌신의 삶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날마다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로 채우는 자들에게 허락된 실제적인 삶의 방식임을 강조한다. 우리는 바울이 달려갔던 그 길, 즉 영원한 면류관을 향한 경주에 초대받았다. 그 길은 비록 좁고 험할지라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이 있으며, 그 끝에는 우리를 맞아주실 주님의 품과 썩지 않을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이 바울과 같이 세상의 종교적 관습이나 세속적 가치관에 매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여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타인을 섬기는 ‘복음의 빚진 자’로 살아가기를 권면한다. 복음 안에서의 자유와 헌신, 그것은 곧 십자가의 도이며 생명의 길이다. 이 위대한 신앙의 경주를 멈추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바울이 고백했던 그 기쁨의 실체를 우리의 삶 속에서 온전히 맛보게 될 것이다.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 목사의 로마서 강해를 따라 읽다 보면, 오래전 사도 바울이 기록한 문장이 더 이상 고대 문헌에 머물지 않고 오늘 우리의 호흡과 이어지는 듯한 생동감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로마서 1장 8–15절에 대한 그의 해설은 단순한 주석의 범위를 넘어, 한 사도가 어떤 심정으로 교회를 품었고 복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섬세하게 드러냅니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의 신앙 또한 그 거울에 비춰져 재정렬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논할 때, 장재형 목사의 이름은 해석자의 지위를 넘어 바울의 내면을 오늘 언어로 번역해 주는 통로처럼 자리합니다.
가장 먼저 마음을 끄는 것은 바울의 감사 고백입니다.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라.” 이 말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로마에 먼저 복음이 도달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라 자부하던 사람에게 로마는 그 누구보다 먼저 가고 싶었던 전략적 요충지였을 터입니다. 그럼에도 장재형 목사는 바울에게는 서운함이나 경쟁심이 전혀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누군가 자신보다 먼저 로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시기하는 대신, 바울은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이름이 남지 않은 누군가가 뿌린 씨앗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넓은 마음이야말로 복음의 체질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장면은 자연스레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수확의 주역은 따로 있지만, 들판에 남겨진 이삭을 묵묵히 줍는 이름 없는 여인들의 손길이 결국 풍성함을 완성합니다. 로마 교회의 성장도 이와 같았습니다. 누가 처음 복음을 전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믿음은 조용히, 그러나 굳세게 자리 잡았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무명의 헌신을 바라보는 바울의 마음을, 따뜻한 화가의 시선에 비유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이들의 손으로 자라난다고 설명합니다.
예수의 겨자씨 비유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출발에서부터 상상할 수 없는 확장을 이룹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역사 속에서도, 깊은 곳에서는 일정한 방향의 흐름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장재형 목사는 복음의 ‘확산력’을 강조합니다. 죄가 퍼지는 속도가 무섭게 느껴질 때가 많지만, 그보다 더 깊고 더 강하게 세계를 움직이는 힘은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표면적인 변화 너머에서 거대한 해류가 꾸준히 한 방향으로 흐르듯,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관점입니다.
이 설명은 미켈란젤로의 「사울의 회심」을 연상시킵니다. 캔버스 곳곳에 역동적인 혼란이 그려져 있지만, 전체를 지배하는 빛의 방향은 오직 하나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길이 막힌 듯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이미 복음의 흐름이 정해져 있다는 암시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흐름 안으로 우리가 초대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의 이유라고 말합니다.
또한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를 “기도로 쓰인 편지”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음에도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기도했다고 고백합니다. 초대교회의 교제는 물리적 만남을 넘어 영적 연대에 기반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처럼 “떠난 것은 얼굴뿐, 마음은 여전히 함께”라는 관계가 기도로 유지되었습니다.
이런 영적 연결망은 렘브란트의 「야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화면 속 인물들은 각기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만, 전체 조명과 구도는 하나의 공동체적 긴장을 이룹니다. 초대교회 역시 떨어져 있지만 기도로 하나를 이루었고, 장재형 목사는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합니다. 내가 세우지 않은 교회라도, 이미 성령이 역사하고 있는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 — 이것이 바울의 심장이며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태도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향하려 했음에도 여러 차례 길이 막힌 배경을 설명하면서, 장재형 목사는 “예루살렘 퍼스트”의 정신을 짚어 줍니다. 아무리 이방 교회가 성장해도 바울은 자신에게 영적 유산을 넘겨준 예루살렘 교회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방 교회들의 헌금을 “은혜의 헌금”이라 표현한 것은 이 영적 중심과의 연합을 유지하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는 마치 큰 원을 그리기 전에 정확한 중심점을 먼저 찍는 것과 같다고 장재형 목사는 설명합니다. 세계 선교의 원을 그리기 위해 바울은 먼저 예루살렘이라는 중심축을 확립한 것입니다.
이 연합의 비전은 라파엘로의 「성체 논쟁」에서 보이는 원형적 구도와 닮았습니다. 하늘과 땅, 시대와 지위를 초월해 다양한 인물들이 하나의 신비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그 장면처럼, 장재형 목사가 그리는 교회도 예루살렘과 이방 교회, 사도와 성도가 하나의 원 안에서 연결된 모습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로마에 가려는 또 하나의 목적을 “재교육과 견고함”에서 찾습니다.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미 세워진 교회들의 믿음을 다시 다지고 재정비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영적 지도력을 꾸짖으며 “한 사람을 얻고도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만든다”고 경고하신 장면과 연결됩니다. 진짜 목회는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끝까지 붙들고 세워 주는 일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부분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과 아름답게 호응합니다.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가 감싸 안고 회복시키는 장면처럼,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들을 다시 돌아가 살피며 상처를 치유하고 중심을 바로 세워 주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율법적 바리새인이 은혜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음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누고자 한다”는 바울의 말에 대해, 장재형 목사는 그 의미를 단순한 특별계시나 독점적 능력으로 좁히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나누어 주신 경험, 지혜, 위로, 간증, 가르침 등 삶의 모든 은총이 은사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와의 관계를 ‘일방적 가르침’이 아니라 “피차 안위함” 즉 상호 위로의 구도로 이해합니다.
이 상호성의 구조는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아이콘을 떠올리게 합니다. 서로를 향해 앉아 있는 세 위격, 그리고 열려 있는 빈자리—위계와 지배가 아닌 순환과 교제의 구조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이런 원형적 구조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랑이 흐르는 곳에서는 삼각형이 아니라 원이 그려진다는 것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에게 내가 빚진 자라”는 고백에서 복음의 심장이 뛰기 시작합니다. 바리새인 시절 바울은 자신의 공로를 하나님이 갚아야 한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는 자신이 이미 갚을 수 없는 은혜의 빚을 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사랑의 빚”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의무감이 아니라 내적 필연성을 낳는다고 설명합니다.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바로 복음의 체질입니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은 이 사랑의 빚을 시각적으로 보여 줍니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들은 평생 아버지의 사랑에 빚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빚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존재의 근거입니다. 바울이 모든 계층과 민족에게 자신이 빚진 자라고 고백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특정 문화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주어진 보편적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할 때, 장재형 목사는 이 복음을 단순한 교리 요약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존재에 이미 스며든 은혜의 세계 전체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허락된 수많은 체험—눈물, 기쁨, 실패, 회복, 간증, 그리고 각 교회가 가진 독특한 이야기들—을 로마 교회와 나누고, 동시에 그들로부터도 배우고자 합니다. 이것이 상호 나눔의 교회입니다.
결국 장재형 목사의 강해가 우리에게 남기는 핵심은 ‘복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름 없는 이들에 대한 감사, 보지 못한 교회를 향한 중보, 이미 세워진 공동체를 다시 돌보는 책임, 예루살렘과 이방 교회를 잇는 연합, 사랑의 빚을 자각한 자의 겸손한 열정, 그리고 원형적 교회 공동체를 향한 갈망—이것이 로마서가 그려내는 영적 지형이며 장재형 목사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울처럼, 그리고 장재형 목사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나는 헬라인에게나 야만인에게나,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든 이웃과 열방에게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고린도전서 2장을 펼치며 편지가 단순한 교리의 나열이 아니라 필자의 인격과 심성이 배어 있는 살아 있는 고백임을 먼저 일깨운다. 그의 눈으로 본 바울은, 웅변과 철학의 도시 고린도 한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붙들고 서 있던 한 사람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라는 짧은 문장에도 1년 6개월을 함께 지낸 공동체의 냄새와 체온이 스며 있다. 시장에서 장막을 깁고,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말씀을 풀며, 기도와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사도의 일상이 그 안에 있다. 그 증인들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고 단정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고백을 당대의 미학과 철학을 능히 구사할 수 있었던 바울이 의도적으로 내려놓은 결단으로 읽는다. 세상이 환호하는 수사(修辭)로 복음을 포장하지 않겠다는 신학적, 영적 선택 말이다.
고린도는 말이 힘이던 도시였다. 광장에는 변론가들이 늘어서고, 억양과 논증의 정교함이 곧 권위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 흐름과 어긋나는 자리에서 복음을 전한다.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렘 9:23)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가슴에 새긴 채, 가말리엘 문하에서 익힌 지식과 수사학을 내려놓고, 빛 자체이신 복음을 있는 그대로 비추려 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복음의 ‘순도’라는 관점을 꺼내 든다. 빛은 자체로 아름답다. 그 빛을 더 빛나게 하겠다며 거는 필터와 장식이 오히려 굴절을 만든다.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사 1:22)라는 탄식처럼, 복음에 불순물이 섞이는 순간 생명력은 희미해진다. 교양과 스토리텔링, 문화적 도구는 유익할 수 있지만, 그릇이 너무 화려하면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경계다. 장재형목사는 강단과 성도의 언어가 이 근본적 긴장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그래서 바울의 중심은 놀라우리만큼 단순하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장재형목사는 이 한 줄을 복음의 두 기둥으로 해석한다. 한 기둥은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 다른 기둥은 역사적 사건인 십자가. 인격 없는 사건은 차가운 사실로 남고, 사건 없는 인격은 추상적 도덕으로 흩어진다. 바울은 둘을 함께 선포했다. 오랜 시간의 가르침도, 골목과 집회와 식탁에서 오간 대화도 결국 이 두 축 위에 놓였다. 장재형목사는 이 단순함을 얕음이 아니라 밀도의 다른 이름으로 본다. 본질만을 붙드는 절제, 말씀 자체에 길을 내어 주는 용기다. 빌리 그레이엄이 “설교에 가능한 한 많은 성경을 담는다”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말씀은 때로 우리 죄를 드러내고 회개의 통증을 가져오지만, 그 쓴 약만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린다. 목회와 선교의 비밀은 놀랍도록 단순한 이 중심으로,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
바울은 또한 자신의 내면을 숨기지 않는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장재형목사는 이를 패배감이나 사역 실패의 공포로 읽지 않는다. 전능하신 분의 임재 앞에서, 복음의 무게를 어깨에 올려놓을 때 인간이 느끼는 거룩한 떨림, 곧 경외에서 비롯한 떨림이라 말한다. 자기 무력의 인식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 떨림은 의존의 문을 연다. 기억력과 화술, 경험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고전 2:4)에 자신을 내맡기는 자세다. 여기서 “약함 속의 강함”이라는 역설이 드러난다. 스스로의 힘을 믿다가 무너진 베드로가 부활의 주님 앞에서 약함을 인정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자 반석 같은 증인이 되었듯, 바울의 떨림 또한 의존을 통해 견고함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그의 전도는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 아니라 성령이 낳은 확신으로 세워졌다. 믿음의 기초가 사람의 지혜 위에 놓이지 않도록, 오직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워지도록 방향을 정한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오늘의 교회 역시 이 방향을 재확인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스펙타클과 감정의 파도에 중독되기보다, 말씀과 성령의 일치에서 나오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확신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2장은 이어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지혜”(고전 2:7)를 증언한다. 시대의 통치자들도 몰랐던 비밀, 만세 전부터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해진 뜻. 장재형목사는 이 지혜의 절정을 십자가에서 본다. 만약 권세자들이 이 비밀의 구조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나님은 세상이 어리석다 여기는 방식으로 지혜를 드러내신다. 약함처럼 보이는 죽음이 능력의 문을 열고, 저주의 나무가 축복의 통로가 되며, 패배처럼 보이는 처형이 승리의 깃발로 높이 선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고전 2:9)이 예비되었다는 선언은 인간 이성의 경계를 분명히 긋는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 소멸될 운명이던 우리를 위해 독생자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지혜의 결정체다. 교회는 여기서 겸손을 배운다. 우리는 진리를 생산하는 공장이 아니라 은혜를 받아 적는 서기관이다. 만들어내기보다 듣고, 소유하기보다 순종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 이성과 감각으로는 닿을 수 없는 이 비밀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바울의 답은 명료하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니라”(고전 2:10). 사람의 깊은 것을 아는 이는 그 사람의 영이듯,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장재형목사는 성령을 단지 열정의 불꽃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의 언어로 번역해 주시는 내적 교사이자, 감추인 진리를 비추는 조명의 영이다. 그러므로 신령한 분별은 공부의 양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배움은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를 만드는 것은 성령의 조명이다. 말씀을 펴고, 설교를 준비하고,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먼저 무릎을 꿇고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일상의 사소한 선택들—가정에서의 대화, 직장에서의 정직, 공동체 섬김의 방식—이야말로 성령의 인도를 훈련하는 자리라고 강조한다. 작은 순간들의 순종이 쌓여 위기의 때에 올바른 결단을 가능케 한다.
성령의 조명이 부재할 때 일어나는 일도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성령의 비춤이 없는 이에게 십자가는 그저 무력한 죽음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거듭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며 그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본다. 세상의 지혜로 말씀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진리로 세상을 판단한다. 그리고 결국 바울은 담대히 선포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사랑과 거룩, 겸손과 순종, 진리와 자비가 조화된 마음으로 설명한다. 사랑만 강조하면 진리가 흐려지고, 진리만 내세우면 자비가 메말라 간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이 둘을 분리하지 않는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고, 악을 거절하되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 그 마음을 품을 때 교회의 언어는 따뜻하면서도 명확해지고, 성도의 일상은 복음의 향기로 변한다.
장재형목사는 전도를 프로그램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본다. 복음이 깊이 스며들면 우리는 자연스레 말하고 사랑한다. 논쟁에서 상대를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성령께서 마음의 문을 여시도록 기도하며 부드럽고도 분명하게 진리를 전하는 태도가 중심이 된다. 만남 전에도, 대화 중에도, 헤어진 뒤에도 우리는 이름을 불러 기도한다. 설득은 문을 두드릴 뿐, 성령만이 문을 여신다. 그래서 전도의 자세란 곧 의존의 자세다. 이러한 길 위에서 교회는 먼저 ‘성장’이 아니라 ‘성숙’을 경험한다. 성숙한 성도는 세상의 지혜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상처를 보면 그 위에 흘러야 할 은혜를 보고, 어둠을 보면 비춰야 할 빛을 본다.
오늘의 강단은 종종 스펙타클의 유혹과 마주한다. 화려한 무대와 즉각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장치들은 나쁘지 않지만, 본질을 가릴 위험을 품는다. 장재형목사는 문화를 배척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도구와 본질의 자리를 바르게 정렬하라고 권한다. 그릇은 내용보다 앞서지 말아야 한다. 설교자는 무엇보다 본문에 머물러야 한다. 매주 선포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성도는 말씀을 평가의 대상으로 소비하지 말고 순종의 자리로 가져가야 한다. 말씀이 삶을 관통할 때 신령한 분별은 지식의 데이터가 아니라 체온이 된다. 그때 가정에서 자녀를 대하는 방식, 직장에서 윤리적 결정을 내리는 기준,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실천하게 된다.
결국 물음은 하나로 수렴된다. 오늘 우리의 설교와 사역과 대화와 선택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가 있는가. 우리의 믿음은 사람의 지혜 위에 놓여 있는가,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서 있는가. 장재형목사는 회피하지 말고 거룩한 자기 점검으로 나아가자고 권한다. 본질을 붙들고, 성령을 의지하며, 순수한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연습을 오늘도 다시 시작하자. 약함을 두려워하지 말고 떨림을 숨기지 말며, 그 자리를 성령께 내어 드리자. 그러면 하나님은 그 약함 위에 능력을, 그 떨림 위에 평강을, 그 단순함 위에 깊은 지혜를 더하실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담대히 고백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그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진리를 선포하며, 한 영혼을 품는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될 것이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로마서 8장을 강해하면서, 인간이 가진 불안과 한계를 넘어서는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매우 강조한다. 이 장의 28절부터 3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선언한다. 인간은 인생을 살아가며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에 늘 직면한다. 어느 날 내가 좋은 것이라 여겼던 것이 훗날 악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고, 내게 손해처럼 보였던 것이 놀라운 유익으로 바뀔 수도 있다. 이런 한계와 불안정성이 인간의 삶을 뒤덮기 마련인데,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섭리 안에서 해석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해설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이 핵심임을 유의하라고 권면한다. 곧, 우리 안에는 부족함도 있고 여러 연약함도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정체성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요소를 모자이크처럼 맞추시어 선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모자이크는 작은 조각들이 맞물려야 비로소 전체 그림이 드러나듯, 하나님의 백성들의 다양한 모습과 역경, 그리고 그 한계들이 결국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어우러져 선한 결말로 이끈다는 뜻이다. 그것은 단지 개개인의 부르심에만 국한되지 않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렇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로 펼쳐진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아주 개인적으로 체험했다. 그는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를 맹렬히 박해하던 사람이었으나, 도중에 꺾여 오히려 가장 열정적인 전도자로 변했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던 기이한 반전이 일어났고, 초기 교회가 세계 곳곳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바울이 보기엔, 어떤 대적자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릴 수 없었고, 바로 그 사실을 이 로마서 8장에서 힘주어 강조한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이 구절은, 그 안에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함축하고 있다. 예정(predestination)이란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고, 섭리(providence)란 하나님께서 미리 보고 미리 인도하시는 경륜을 말한다. ‘미리(pro) 본다(videre)’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이 섭리 개념은, 우리 인간의 각 순간과 역사가 이미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가리켜 “하나님의 주권성(sovereignty)”이라고도 부르며, 이것이 기독교 역사 안에서 수없이 많은 논쟁과 토론의 중심이 되어왔음을 상기시킨다.
실제로 이 교리는 칼빈의 예정론, 특히 이중예정(double predestination)의 주된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 선택받은 자와 유기된 자로 구분된다는 점 때문에 거센 반발과 논쟁이 있어왔으나, 칼빈이 목적으로 삼았던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와 사랑 안에서 믿는 자가 누리는 놀라운 은혜의 확신”이라는 것이다.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칼빈이 활동하던 당대 이후로 점차 사람들이 이성중심, 합리주의에 치우치면서 신(神)은 우주를 창조했을 뿐 그 뒤로는 개입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이신론(理神論, Deism)이 확산되었다. 이 사조는 하나님과 실제 살아 있는 관계성을 부인하였고, 인간 이성으로 자율적으로 세계를 해석하려 했다. 이에 대항하여 칼빈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력히 설파한 것은, 하나님이 단지 우주 저편에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와 세계 안에 능동적으로 관여하시며, 작은 새 한 마리의 생사까지도 주관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바울도 로마서 8장에서 똑같은 전제를 가지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결국 그분의 절대 통치 안에서 선을 이룬다고 말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교회’가 부름받은 자들의 공동체라고 설명한다. 교회란 문자 그대로 ‘called out’, 곧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되어 부르심을 입은 모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조직이나 외적인 행정 시스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모여, 그분의 신적 통치와 섭리를 믿고 순종하며, 서로를 보듬고 함께 길을 걸어가는 영적 공동체다. 그런 점에서 28절을 다시 살펴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이라는 말은, 곧바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놀라운 결론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 때로는 파편 같은 인생의 조각들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의해 하나의 걸작으로 맞추어진다는 것이다.
29절과 30절로 넘어가면 바울은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의 예지(豫知)와 예정(豫定)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고 하고, 그들을 결국은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고 정리한다. 이것이 교회의 성도들이 받은 구원의 단계이자 여정이다. 요약하면, 예지-예정-부르심(소명)-의롭다 하심(칭의)-영화(glorification)라는 흐름이며, 칭의와 성화와 영화의 과정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점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예지예정론이, 단순히 어떤 운명론적 결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의 절대성”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곧, 사람이 믿음을 가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임했기에 가능한 것이며, 은혜가 ‘선행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서정(序程)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는 것이다.
바울 자신이 가장 강력하게 체험한 바, 그가 스데반을 돌로 치는 데 앞장섰던 흉악한 박해자였으나,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열렬한 사도가 된 과정을 떠올려보면, “왜 이런 나를 택하셨는가?”에 대한 물음은 바울 안에 매우 크게 자리했을 것이다. 스스로 뼈아픈 죄의식을 겪었으나, 결론적으로 그 모든 악함과 부족함을 미리 아시고, 또 그렇게 알면서도 용납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그는 로마서 8장에서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 바울은 그 말의 실제적 증거였다.
하나님이 예지와 예정을 통해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을 구원하시되, 구원에만 그치지 않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 29절의 핵심이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며, 그분을 첫째(맏아들)로 두고, 그분의 뒤를 잇는 많은 형제자매가 되도록 부르심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더 큰 구원의 목적’이다. 단순히 죄 사함과 심판 면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영적 성장과 완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구원의 완전한 의미다.
30절에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은, 구원의 단계에 대한 바울의 확신을 또 한 번 웅장하게 드러낸다. 미리 아시고 정하신 바에 따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며, 마침내 영화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과연 흔들릴 수 있는가? 바울의 대답은 단호하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부분이 기독교 신앙이 가지고 있는 내적 평안과 확신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이 자칫 잘못된 교만이나 타인을 정죄하는 수단으로 비칠 때도 있지만,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교만의 근거가 아니라 “자격 없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더욱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지,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느냐?”라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31절에 이르면 바울은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라고 말한다. 여기에 “이 일”이란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그 전 과정을 뜻한다. 인간의 이성이나 그 어떤 세력이 이 과정을 무효화하거나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없다는 결론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 이어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는 찬양 같은 선언이 나오는데, 이것은 구원에 대한 확고부동한 안전을 나타낸다. 구원받은 우리가 그 은혜 안에 있기에, 결코 다른 어떤 힘도 이 구원을 무너뜨릴 수 없음을 시편의 고백까지 들어서 설명한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는 다윗의 시(시편 27편)나,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시편 62편)라는 시편 기자의 노래가 그 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말씀을 해설하면서, 인간이 죄짓고 넘어지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다만 인간의 불신앙이나 의심, 죄로 인해 휘청일 때도, 우리를 건지시는 쪽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그리고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사실이 변치 않는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죄인은 끊임없이 “정말 내가 구원받았을까?” “내가 이렇게 또 넘어졌으니 버림받은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하지만, 바울은 “누가 우리를 고발하리요?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라고 반문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의롭다 하신 자를 감히 누가 죄인이라 정죄하겠느냐고 묻는다.
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라는 표현은,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그 독자 이삭을 바쳤던 장면을 상기시키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지만, 하나님의 경우에는 신적 전능자이면서 동시에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함으로써 죄인들을 구원하셨다. 바로 이 희생으로 인해 우리의 구원이 가능해졌다. 그러니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말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끝이 없음을 증언한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특히 이 32절을 중심으로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구원을 흔들 수 없음을 재차 강조한다. 인간의 가장 큰 위기는 사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으며,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그러므로 신앙인이란 주님의 사랑으로 옷 입은 자들이며, 설사 외적인 박해가 오거나 내면의 죄책이 엄습한다 해도, 최종적으로 나를 고발할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신데, 그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셨기에 아무런 고발도 유효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33절과 34절에서 “누가 능히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라는 말로 반복되고, 곧이어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완성된다.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고백 역시 로마서 8장 34절과 정확히 일치한다.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인데, 그분이 도리어 우리를 위해 계속 간구하시고 변호하신다. 그러니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는가. 장재형목사는 이는 구원받은 자의 든든한 기초이며, 인간이 의심이나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되어야 할 이유라고 해설한다.
이처럼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선언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이라는 기둥 위에 서 있고, 우리를 부르시는 소명과 의롭다 하시는 칭의,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화로운 자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어지며, 끝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라는 강력한 도전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보존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지금도 우리를 변호하고 계신다. 바로 이런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구원의 불안정성에서 벗어나, ‘확신’이라는 단단한 반석 위에 올라서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결론적으로, 이 로마서 8장에 대한 해설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사랑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순히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실제 삶의 위로와 능력으로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이 살던 시대의 이신론자들이나, 오늘날의 세속주의나 과학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한낱 멀리 계신 어떤 조물주나 지적 원리 정도로 치부해버리면, 신앙은 그 즉시 무력해진다. 그러나 바울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한 믿음을 가질 때, 또“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는 담대한 선포를 할 때, 우리가 얻는 것은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확신이다. 그리고 그 확신이 있기에, 바울은 이어지는 마지막 절들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외칠 수 있었다.
2.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는 삶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 후반부를 해설하면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묻는 바울의 말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신앙고백 중 하나라고 말한다. 35절에서 바울은 성도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어려움을 나열한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등 일곱 가지이며, 이것들은 모두 신앙인의 길에 실질적으로 닥칠 수 있는 극한 상황들이다. 실제로 바울 시대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와 압력을 받았고, 생존 자체가 위협당했다. 기근과 헐벗음, 처형의 공포가 늘 주변을 떠돌았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와 성도들이 이 모든 두려움 앞에서 좌절하고 무너져야 하는가?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절).”
“넉넉히 이긴다”는 것은 간신히 버티다가 마지막에 겨우 살아남는 수준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워낙 견고하기에, 고난의 폭풍이 몰아쳐도 “궁극적 승리”가 확정되어 있다는 표현이다. 이는 궁극적 승리인 구원, 그리고 최종적인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대한 바울의 확신에서 기인한다. 예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다”라고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선언하셨는데, 우리도 그 길을 뒤따라가며, 비록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 37절을 가리켜, “한없이 작고 연약한 존재인 인간이, 전능자의 품 안에 있기에 당당히 고백할 수 있는 문장”이라고 설명한다. 지극히 낮은 자가 가장 높으신 왕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형국이니, 넘어지지 않을 수 있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바울은 38-39절에 이르러 유명한 구절로 절정을 이룬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일곱 가지 고난에 이어, 여기서는 아홉 가지 이상의 가능한 모든 대적 요소를 언급한다. 사망, 생명, 천사, 권세, 현재와 미래, 능력, 높음과 깊음 등 공간과 시간, 영적 세계와 물질 세계, 심지어 우주적 질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며, 이것들이 아무리 거대하고 강력해 보여도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높음(ὕψωμα)이나 깊음(βάθος)이라는 표현은 당시 사람들이 별자리를 보고 미래를 점쳤던 점성술적 세계관까지 포함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 당시 많은 이들이 별들의 배치나 움직임에 의해 인생이 정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점성술적 운명론까지도 부정한다. 아무리 별의 운행과 천체의 질서가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겨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과학적 자료나 환경적 요인, 개인의 경험 등에 의해 좌우되어 결국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체념하기 쉽지만, 바울의 확신은 전혀 다르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보여주신 사랑, 그리고 부활과 승천, 성령의 내주와 중보 사역으로 지금도 계속 보증되는 그 사랑만큼은 그 어떤 피조물도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장래 일이나 현재 일이나”라는 표현은 시간성에 대한 두려움까지도 극복한다. 과거의 죄나 실패가 또다시 발목을 잡을 것 같고, 미래의 불확실성에 떨기도 하지만, 바울은 현재와 장래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붙들려 있다는 것을 선포한다. 그래서 신앙인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히려 ‘이미 이긴 전쟁’을 치르는 자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마치 승리가 확정된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처럼, 현재 당하는 어려움과 문제는 잠시의 아픔이 될 수 있지만 결말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성도의 견인(堅忍)”이라는 신학 용어와 결부시킨다. 한 번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안에서 끝까지 인도되고 지키심을 받기에, 궁극적 실패나 파멸로 돌아서지 않는다는 것이 성도의 견인이다. 물론 인간적인 허물과 죄로 인해 도중에 넘어질 수는 있으나, 최후의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로마서 8장이 이러한 확신을 주는 이유는,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가 완벽해서가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택하셨고, 부르셨고, 의롭다 하셨고, 영화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를 중보하신다. 동시에 성령님 역시 우리 내부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일을 해나가신다. 이것이야말로 바울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말할 수 있는 전적인 근거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읽을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에 특별히 주목하라고 조언한다. 구원의 출발부터 여정과 완성까지, 전부 “사랑하시는 이”에게 달려 있다는 의미다. 어떤 환난이나 고통, 심지어 죽음이 다가와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는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기에,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 그런 점에서 성도의 삶은 늘 평탄하거나 고통이 전무한 길이 아니다. 오히려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 과정조차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하는 시간이 된다.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보여주셨던 삶이 그랬고,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걸어갔던 길이 그러했다. 박해와 기근, 불안과 위험 속에서도, 교회는 계속 자라났고 복음은 편만하게 퍼져나갔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교훈은 유효하다. 예수를 믿는 것이 편안한 길이 아니라, 세상의 조류와 불의와 타협하지 않음으로 인해 때로는 소외와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기근”이나 “적신”까지 체험할 정도로 궁핍한 삶을 살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가족이나 공동체로부터 “박해”를 당하기도 한다. 심지어 목숨의 위협을 받는 지역이나 상황도 지구상에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고난의 항목은 현대인에게도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이걸 극복할 만한 내 능력이 충분하지 않다”며 좌절하기 쉽지만, 바울은 오히려 당당하게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확언한다.
특히 36절에 나오는 시편 44편 22절의 인용,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라는 구절은, 순교적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했던 초기 교회의 위급함을 잘 표현한다. 믿음의 길은 때로 죽음의 위협까지 동반한다. 하지만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37절에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선언하며, 죽음 너머의 부활 소망,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절대적 승리를 바라보았다. 장재형목사는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이 37절 말씀을 묵상하고, “지금의 환난이 내게 주어진 전부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되새기라고 권면한다.
38절과 39절에서 바울이 연달아 열거하는 내용은, 당시 로마 제국의 박해나 영적 도전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음을 극적인 언어로 전달한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모두, 결국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피조물’에 불과하다.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극단적 두려움인 사망도, 가장 강력해 보이는 세상 권세자들도, 신비롭고 거대한 우주적 존재들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이 독생자의 죽음과 부활로 보증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바울의 답은 단연 “아니라”이다.
장재형목사는 최종적으로 이 말씀을 정리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신 때부터 이미 그 영광의 자리에 이르기까지‘지속적인 경륜’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우리가 어떤 연약함과 상황에 놓이든지, 구원은 거기서 미완으로 머무르지 않고 최종적으로 영화롭게 될 때까지 이끌려 간다. 한편으로는 “이 사실을 믿느냐?”가 늘 신앙의 시험대로 우리 앞에 놓인다. 바울이 여러 차례 언급했듯, 우리는 “죄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 사이에서 날마다 싸운다(로마서 7~8장). 때론 실패도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가 돌아갈 곳은 십자가의 은혜요, 성령의 능력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이다. 바로 거기서, “누가 우리를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담대한 고백이 다시금 울려 퍼진다.
로마서 8장의 후반부는, 우리가 성도로서 나아갈 때 맞닥뜨릴 수 있는 모든 위협과 도전, 그리고 인간 내부의 의심을 향해, “하나님이 이미 이기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시니, 너희가 능히 대적하지 못한다”고 선포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루하루의 삶을 지나면서도, 심지어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이라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가운데 평안할 수 있다. 그것이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이며, 바울 사도의 불꽃 같은 열정이 담긴 로마서 8장의 결론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결론을 대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단지 ‘좋은 날만 골라 사는’ 얄팍한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박해가 없어도, 여전히 인생의 무거운 짐은 존재하고, 죄와 싸우는 끊임없는 영적 전쟁이 우리 내부에 벌어진다. 그러나 광야와 같은 삶 속에서도 “주께서 예비하신 선하고 아름다운 결말”을 확신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성도의 참된 자존감이며 영적 힘이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그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두려움과 싸울 수 있는 가장 큰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 확실하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는 마지막 39절의 성찰이자 고백이다.
로마서 8장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이 편지를 받아든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 말씀을 삶 속에서 계속 경험하게 된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때로 갈등이 생기고, 외부적인 환경이나 세상의 사상, 권력으로 인해 고초를 겪을 수도 있다. 신체적 질병이나 경제적 위기 같은 현실적인 시련도 닥쳐온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바라볼 것은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끊으리요, 누가 대적하리요?”라는 바울의 일곱 겹, 아홉 겹으로 덧씌워진 강력한 반문들이다.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내주,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약속이 있는데, 과연 그 무엇이 이 사랑을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장재형목사는“장차 보게 될 영광과 지금 겪는 고난은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 바울의 고백(로마서 8장 18절)을 다시금 상기시키며, 우리가 이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한, 삶의 방향과 결말은 바뀌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결론은 하나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 환난이나 곤고, 박해나 기근, 적신이나 위험, 혹은 칼이 몰려와도 그것들이 우리의 믿음을 최종적으로 파괴할 수는 없다. 비록 현장감 있는 고통과 시련을 겪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하시며,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서 간구하신다는 진리가 약화되거나 삭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랑 때문에, 때로 고난은 더 깊은 은혜 체험의 장이 되고, 약함은 강함이 되며,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변한다. 이처럼 로마서 8장 28-39절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의 확신과 ‘예지예정’의 은혜, 성도의 견인, 그리고 결국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언약의 견고함을 설파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로마서 8장의 강해를 마무리하며, 다시 한 번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이라는 키워드를 상기시킨다. 우리의 삶은 때로 성취와 실패, 기쁨과 슬픔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초월적 관점에서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완성된다. 이 완성의 그림은 아직 우리가 다 보지 못하나, 결국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고 많은 형제 중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속해 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루는 능력은 전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에게서 나오기에, 어떤 세력도 이를 무너뜨릴 수 없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험난하고 때로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신앙인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의지하며,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감사와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다. 로마서 8장 28-39절은 바로 그 비밀을 우리에게 찬란하게 보여주는 복된 말씀이다.
이 글에서는 마가복음 14장 32-42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중점적으로 다루되, 장재형(장다윗)목사가 강조해 온‘그리스도와의 동행’이라는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성경 본문에서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과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그 고독한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신앙의 핵심 가치를 되새기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시지와 함께 장재형목사가 전하고자 하는 주요 가르침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전개는 여러 소주제나 구분 없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며,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장면이 우리 각자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성찰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마가복음 14장에 기록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 감람산 기슭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고, 거기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한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일반적으로 ‘감람산’은 올리브나무 숲이 가득하며, 그 가운데 ‘겟세마네’는‘채유소’, 즉 올리브 열매를 짜서 기름을 얻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장소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올리브 기름이 가져다주는 두 가지 상징, 즉 평화와 영원성, 그리고 메시아에게 기름 부음을 주던 전통을 함께 묵상해 볼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히브리어로 ‘메시야’, 헬라어로 ‘크리스토스’라는 표현이 모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즉 기름 부음받은 왕으로서 겟세마네 동산에 계셨음에도, 여기서 제자들에게는 그분을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우는 장면이 아니라 오히려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며 십자가 수난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왕으로 즉위하셔야 할 분이 극도로 비참한 기도를 드리시는 장면이기에, 성경 전체에서 매우 강렬하고도 역설적인 대조를 형성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마태·마가·누가복음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대단히 중요한 본문이지만,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특징이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에 대해, 요한이 이미 13장부터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는 길을 완전히 수락하셨음을 조명했기에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자신이 ‘이제 영광을 받았다’고 선언하셨고, 제자들에게 종말론적 당부와 고별 설교를 남기셨습니다. 즉, 십자가 수난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당신은 스스로 그 길을 ‘영광’이라 선포하심으로 결단하셨다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주님은 갈보리 언덕 이전부터 이미 그리스도의 길을 선택하셨다. 요한은 예수님의 내면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수용하는 왕적 위엄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에 겟세마네 기도를 생략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가 기록한 겟세마네 기도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인간적 고민’과 ‘극렬한 통곡’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4장33-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5장7절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참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께 ‘아바 아버지’라 간구하며 끝까지 순종하신 고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께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 그분 안에는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처절한 길인지, 또 그 길을 가는 데 있어 인간적 떨림과 고통이 없을 수 없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스스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고백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복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장재형목사가 자주 강조해 왔듯, 예수님이 사실상 십자가를 지는 길을 ‘피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이나 마가복음 14장에 드러난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 죽음 앞에서 느끼는 극심한 두려움과 고통을 토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이어집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단하고는 있지만, 종종 우리의 의지와 감정은 연약하기 때문에 다른 길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들이 많다. 예수님 또한 그 순간을 겪으셨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을 붙들고 끝까지 걸어가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본을 보여주셨다”고 풀이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모든 이가 반드시 직면해야 할 도전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는 진리입니다.
한편,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를 올리시는 동안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식사 자리에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를 쳤는데, 예수님은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로 들어와서 기도하시는 동안에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들어 버립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주님께는 지금이 가장 절박한 시간이고, 일생일대의 영적 투쟁이 벌어지는 중인데, 제자들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밤에 산책을 나온 사람들처럼 무심하게 잠에 든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종종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엄중한 순간에 우리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버릴 때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제자들은 허둥지둥 도망쳐 버리는데, 마가복음 14장 51-52절에는 베 홑이불을 두르고 따라오던 한 청년이 붙잡히자 홑이불을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전통적으로 이 ‘한 청년’을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자신의 집에서 최후의 만찬이 있었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감람산으로 나아가자, 밤중에 일단 잠들어 있던 마가가 뒤늦게 모든 상황을 감지하고 황급히 예수님을 따라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도 두려움 앞에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친다”라고 설명합니다. 마가는 이토록 부끄러운 장면을 자기 복음서에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기록함으로써, 인간적인 연약함이 얼마나 쉽게 드러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연약함조차도 결국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정직한 신앙고백’의 모범이라 칭하며, “마가는 자신이 부끄러운 존재임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런 자신도 변화시키신 주님의 은혜를 자랑하기 위해 이 장면을 그대로 쓴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약점을 숨기기보다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길을 열어 놓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셔야 마땅한 예수님께서 오히려 고통과 슬픔 속에 땀을 핏방울같이 흘리시는 비극적인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완전히 받아들여지기까지, 즉 예수가 진실로 ‘기름 부음받은 이’로 공인되고 고백되기까지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불가피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분의 길을 함께 걸어갈 영적·신앙적 성숙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홀로 고독의 길을 가야 했고, 그 절정이 바로 겟세마네의 땀방울과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였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에 대해,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떡과 포도주를 받고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나, 곧 이어서 펼쳐질 고난의 현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유월절에 희생된 양의 피가 기드론 시내로 흘러내려 붉게 물들어 있는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도, 주님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를 선명히 알지 못했다. 주님은 홀로 그 붉은 물살을 건너 겟세마네로 들어가셨고, 이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고독하고 처절한 순간,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이는 아람어 ‘아바’(아빠)와 헬라어‘파테르’(아버지)가 결합된 표현으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맺고 계신 친밀하고도 절대적인 신뢰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에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 부르셨으나, 이 고통의 골짜기에서 그분은 더욱 간절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아빠 아버지여”라 부르며 부르짖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을 때 가장 큰 유혹은‘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하는 의심이 생길 때다. 예수님조차 그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아바 아버지’를 찾으심으로, 인간적인 두려움의 순간에 우리도 전적으로 아버지를 신뢰해야 한다는 본을 보이셨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우리는 죽음의 세력이 가장 강력하게 덮쳐 올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을 놓지 말아야 하며,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의 기도 안에 ‘수단’으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순종’을 낳는 기도로서의 본질이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셨으나, 결국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결론지으셨습니다. 이 장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우리는 종종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바꿔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나를 바꾸도록’ 내어맡기는 태도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도의 정수는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뜻과 감정을 초월해 아버지께 끝까지 복종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된 기도의 목표”라고 강조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길을 따를 힘을 주는 근원적 모범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약함을 지닌 제자들은 이 기도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잠들었고, 야고보와 요한도 주님의 절박함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시며,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권면하셨으나, 그들은 여전히 무감각한 상태였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들을 ‘교회 내의 인간적인 모습’으로 비유하면서, “세상에서는 큰소리치고 대범해 보이는 신자도, 실상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잠들어 버리거나 도망가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고,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욱 겟세마네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하며, 베드로처럼 망령된 자신감을 내세우기보다, 예수님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후 예수님은 세 번째 기도 후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라고 하시며, 십자가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군병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몰려오자 제자들은 흩어집니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는 “아무리 강한 결심과 의지를 보여도, 결국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넘어지기 쉽다.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실제로는 가장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을 부인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가 넘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돌이키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곧 우리가 넘어지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지라도 주님께서 돌이킴의 은혜를 주신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됩니다.
결국,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죽음의 잔’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 수용하셨고,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신 현장이 바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방관자나 구경꾼의 위치로 남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며, 주님 안에 주어진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고 역설합니다. 즉, 겟세마네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순종의 길을 우리 또한 믿음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고독하고 비극적으로 보일지라도, 부활의 영광이 그 끝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한편, 요한복음이 겟세마네 기도를 생략한 것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영광으로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의 인간적 고뇌 부분을 생략하는 편집 의도를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다시 한 번 짚어 줍니다. 요한복음은 17장의 고별 기도를 통해 세상과 제자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왕적’ 위엄을 더욱 부각합니다. 반면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고통을 당하셨고,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기도를 드리셨는가에 포커스를 둡니다. 이 둘은 결코 모순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더 풍부하게 보여주는 보완적 시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도 종종 겟세마네 같은 어려움을 맞이한다. 세상에서 기드론 시내처럼 붉은 피의 흔적을 보며 때로 두렵고 떨리기도 하고, 아무도 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해 외롭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길을 이미 가셨고, 우리에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본을 남겨주셨다. 우리가 그 기도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때, 주님과 동행하는 길은 분명히 고독을 넘어 부활의 환희로 이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겟세마네와 갈보리 언덕은 고통이 극심하게 드러나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는 자리라는 진리가 우리에게 제시됩니다.
더 나아가, 겟세마네 사건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모두를 돌아보게 하는 ‘영적 거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어쩌면 마가처럼 겨우 홑이불만 두른 채 뛰어갔다가 결국 도망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적인 결심과 맹세가 얼마나 한계가 뚜렷한지를 지적하면서, “베드로처럼 어떠한 어려움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큰소리쳐도, 하나님 앞에 깨어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작은 자극 하나에도 무너지고 만다. 그러므로 신앙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과 기도를 통해서만 단단해진다”고 합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열심보다 내면의 겸손과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4장 후반부에 보면, 예수님이 실제로 체포되시고 대제사장들 앞에서 신문받으시는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베드로는 정확히 예수님의 예언대로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맙니다. 닭이 울자마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죠.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인간적인 비참함과 눈물을 지적하면서, “우리는 실패하고 넘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베드로를 찾아가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다. 이는 겟세마네 기도에서 십자가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죄인인 우리를 얼마나 끝까지 붙드시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만든다”고 설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며, 때로는 고독하고 외롭고 눈물겨운 길임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길을 주님이 먼저 가셨기에, 그리고 그 길에서 제자들의 모든 실패까지도 주님이 포용하셨기에, 우리가 실패한다 할지라도 다시금 회복될 수 있는 길이라는 희망이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바로 이 ‘부활의 희망으로 이끌어가는 고난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겟세마네와 같은 어둠과 슬픔, 홀로 씨름해야 할 시험을 맞닥뜨릴 수 있으나, 기도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며 나아갈 때 우리 또한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을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첫째, 예수님도 인간적인 두려움과 고통을 겪으셨고, 우리 역시 그러한 시험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둘째, 그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를 부르짖으셨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라는 복종은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이를 위해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넷째, 제자들처럼 잠에 빠지거나 도망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도 솔직히 인정해야 하며, 그 연약함 속에 임하는 주님의 은혜로 인해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결국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점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적인 최악의 절망이지만,부활이라는 최후의 소망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며, 그 길에서 우리의 믿음은 성숙해집니다.
이처럼 겟세마네와 갈보리는 단순히 2000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영적 현실을 비추어 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에 주목하며, “우리는 너무 쉽게 제자들을 비난하지만, 사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라고 물어봐야 한다. 그 질문을 통해 자기 자신도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날 잠재력을 가진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 훨씬 더 큰 겸손과 회개의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신앙은 ‘내가 강해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끝까지 붙들어 주시고, 우리가 연약함을 인정하며 은혜를 구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나아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각종 위기와 유혹을 만날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처럼 그저 의지로 버티다가 결국 도망치거나 무너져 버리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처럼 아버지 앞에 모든 것을 토로하며 “아버지의 원대로 되길 원합니다”라는 고백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 후자의 길이, 장재형목사가 끊임없이 설파해 온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실질적 모습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먼저 그 길을 가셨고, 부활하심으로써 그 길이 결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따를 때, 비록 인간적인 약함과 눈물이 따른다 해도, 마지막에는 부활의 능력이 펼쳐지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보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틀어 우리는 ‘기도’의 역할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가장 힘겨운 순간에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의 자리에 가셨고, 그들이 함께 깨어 기도하기를 원하셨을까요? 장재형목사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 마음의 항복을 이끌어낸다. 기도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교만의 표현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코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제자들도 깨어 기도하기를 원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동안 어떤 의미 있는 역할도 하지 못하고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후에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에게‘기도의 자리’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복음 전파 사명을 맡기십니다. 결국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초대교회 부흥을 일으키는 주역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정적이고 결단력 있어 보인다 해도, 기도를 잃어버리면 베드로와 같이 작은 유혹 앞에서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의 주님처럼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어떤 시험도 결국 극복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점에서 “교회가 이 땅에서 설 자리를 잃고, 개인의 신앙이 깊은 내면적 능력을 잃어버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진정한 의미의 겟세마네 기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기도는 간절함과 절실함,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순종을 담고 있는데, 이를 놓치면 우리도 잠자고, 멀리 도망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순절 기간이나 특별 새벽기도회 등 특정 절기에만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자리에서 늘 겟세마네를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피할 수 없는 결단을 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하는 영적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거룩한 반복’이라 부릅니다. 즉, 역사 속에서 단 한 번 있었던 겟세마네의 이야기가 오늘도 우리 안에서 반복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가처럼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끝내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복음서의 저자로 세워지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세 번씩 주님을 부인했다 해도, 다시금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부여받고 장차 교회 기둥으로 쓰임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fuLEttN1gs
이렇듯, 마가복음에 기록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은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가장 강렬한 예시이자, 제자들의 연약함과 예수님의 인자하심이 극명히 대비되는 자리입니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그리스도와의 동행’은 결국 이 겟세마네 영성에서 비롯됩니다. 아무리 무서운 죽음이 다가온다 해도, 아바 아버지를 향한 절대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내 원대로 하지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외롭고 고독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그 길을 먼저 가셨고, 그 길이 영원한 승리로 이어졌음을 우리는 부활 사건을 통해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믿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과제입니다.
이러한 겟세마네 사건을 정리하며, 장재형목사는 우리 각자가 ‘내가 피하고 싶은 십자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라고 조언합니다. “혹은 내가 잠들어 버리고 있는 고난은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매달려야 할 일은 무엇인가? 또 나는 지금 베드로처럼 ‘주를 위해 목숨도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실상은 쉬지 못할 잠에 빠져 있거나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들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진실하게 답해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와 한층 더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더 이상 인간적인 힘이나 의지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늘 “신앙은 나의 결단 위에 서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과 예수님이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 순종 위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순종에 발붙여, 우리 역시 삶의 크고 작은 겟세마네를 만나게 될 때마다 “아바 아버지”를 부르짖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신뢰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바로‘그리스도와의 동행’이라는 영적 현실을 우리 일상에서 구체화시키는 열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신앙 행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밤중에 흘리는 눈물과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그 기도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이미 선언하신 구원과 생명의 능력을 우리 삶에 실제로 펼쳐 보이십니다.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에 담긴 예수님의 기도와 제자들의 연약함, 그리고 결국 십자가의 길을 향해 굳게 일어나신 예수님의 순종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상기하게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주님은 홀로 그 길을 가셨다. 제자들은 자고 있었고, 누군가는 도망쳤으며, 다른 누군가는 배신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길은 본래부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 치의 후퇴 없이 그 길을 가셨고, 그 길의 종착지는 부활이라는 승리였다”고 말합니다. 이 메시지는 예나 지금이나 제자도로 초청받은 모든 이에게 변함없이 유효하며, 우리 각자를 향해 ‘함께 가자’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초청입니다.
정리하자면, 장재형목사가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강조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은 다음과 같은 함의를 지닙니다. 첫째, 우리의 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되, 그 약함을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의지와 다를 때에도, 나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이 더 선하고 옳음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어떤 강한 결심과 맹세도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 비록 내가 실패한다 해도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에도 제자를 버리지 않으셨듯, 우리 역시 다시 일으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부활의 영광을 내포하는 역설적 상징이기에, 지금 눈앞에 보이는 고난에만 매몰되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달려갈 때 그 영광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결국 겟세마네 기도를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내 인생에서 지금 겪고 있는 혼돈과 시련이 어떤 의미인가? 그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하게 만듭니다. 주님은 그 끝에 분명한 답을 주십니다. 내가 부담스러워하고 피하고 싶은 십자가가 있다면, 그 십자가 너머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영광과 부활의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절정이며, 장재형목사가 거듭거듭 전해 온 복음의 실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겟세마네에서 통곡하던 예수님을 향해 비로소 깨어 일어나 함께 걸어가는 결단입니다. 이제 더는 자고 있지 말고, 또 도망가지 말고, 주님과 함께 가는 진정한 동행자로 서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요약하면,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님이 가지신 인간적 약함과 신적 순종의 역설을 여실히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기도’로 나아가야 함을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겟세마네 영성의 중요성을 수없이 설파해 왔으며, 그 핵심은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과 동행하려면 우리도 겟세마네의 통곡을 치러야 하고, 십자가를 감당해야 하며, 끝내 그 길이 영광으로 가는 길임을 믿어야 한다”라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깨어 기도하며 겟세마네를 다시금 내 삶의 현장에 구현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동행이야말로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된 길이 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록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이 드러나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시고도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실패와 눈물도 마침내는 주님의 부활 능력 안에서 회복되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바울 사도의 로마서 8장은 성경 전체에서 복음의 정수를 가장 아름답고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는 장으로, 복음 이해의 핵심적인 열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로마서 8장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환희의 삶”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본문으로,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이야말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난 성도들이 얼마나 큰 기쁨과 소망을 누릴 수 있는지 잘 보여 준다고 말한다.
먼저 현대의 성경은 장과 절이 구분되어 있지만, 본래의 성경은 구분이 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로마서7장과 8장을 끊어서 보지 않고 연속된 메시지로 바라볼 때, 우리가 겪는 내적 갈등과 거듭난 이들의 영적인 자유를 더욱 선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로마서 7장 23절에서 24절은 구원받은 자도 심각한 내면의 분열과 곤고함을 겪는 현실을 보여 준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 본문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이미 구원받아 죄 사함을 받은 자들도 여전히 육신에 속한 문제로 인해 갈등을 경험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구원(칭의)은 받은 상태이지만, 동시에 성화라는 진행 과정 안에 있기에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나타나는 심각한 내면의 모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7장에서 이러한 고통을 토로하면서도, 로마서 8장에서 드디어 성령 안에서 누리는 해방과 기쁨을 선포한다.
로마서 8장의 가장 큰 주제 중 하나는 ‘성령 안에서의 삶’이다. 바울이 8장 전체를 통해 보여 주는 메시지를 정리해 보면,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자유가 어떤 환희와 능력을 낳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포도주에 비유되는 성령에 취한 삶”이라 일컫는다. 이는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삶이 전면적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상징한다. 이미 바뀐 존재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구원받은 성도 역시 원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영광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원죄가 사함받았어도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습관적인 죄’ 혹은 ‘자범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포도주가 이미 되었으나, 그 안에 물이 섞여서 싱거워진 상태’에 빗대어 설명한다. 성령에 의해 거듭나 거룩하게 된 자라 할지라도, 과거의 죄적 습관이 우리의 내면에 계속해서 작동하기 때문에 성화의 과정에서 이를 씻고 정결케 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흔히 혼동하는 것이 예레미야 2장 22절과 이사야 1장 18절 사이의 긴장이다. 예레미야는 “너희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너희 죄악이 여호와 앞에 그대로 있다”고 말했고, 이사야는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라고 선포했다. 장재형목사는 “이 두 예언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으로 결코 죄를 온전히 빨 수 없지만,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기에 하나님의 은혜로는 완전히 씻길 수 있다”라는 구원론적 진리를 지적한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원죄’와 ‘자범죄’를 구분해야 한다.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보편적이며 연대적인 죄의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끊어졌음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원죄 사함’이며, 칭의(Justification)로 설명되는 ‘지위의 변화’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위 변화가 우리의 과거와 전혀 다른 운명을 선사한다고 역설한다. 더 이상 아담 안에서 지배받던 ‘사망의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철폐되었고, 실제로 예수를 믿고 거듭난 자들의 삶에서 ‘칠 대 저주’와 같은 운명적 징벌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죄와의 싸움에서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습관적인 죄’ 즉 자범죄가 여전히 남아서 우리의 걸음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정규전은 끝났으나, 소탕전이 남아 있다”라고 비유한다.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이미 큰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일상에서의 작은 전투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은 전투들은 소탕전이기에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하지만 소탕전을 소홀히 하면 그 잔당들이 다시금 우리를 괴롭게 하고, 성결의 길을 방해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가운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요 13장)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미 전신이 깨끗한 자라도, 걸어 다니는 과정에서 발에 묻은 먼지를 씻어야 하듯이, 구원받은 자들도 일상 속에서 짓는 자범죄를 계속 씻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과정을 “성령 안에서 행하는 자기 성찰과 회개”의 과정으로 본다. 이러한 성화의 훈련은 우리가 이미 얻은 칭의의 확신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견고하게 하는 은혜의 수단이다.
결국 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두 측면을 동시에 품어야 한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큰 전쟁을 이기셨다”라는 승리의 관점이다. 다른 하나는 “남은 전투인 소탕전을 우리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라는 긴장감이다. 장재형목사는 신학자들의 연구와 더불어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인간이 죄를 대할 때 이 이중적 시각을 놓치면 극단으로 치우치기 쉽다고 경고한다. 즉, “이미 죄가 완전히 없어졌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라고 착각하거나, 반대로 “우리 안에 여전히 죄가 남아 있으니 구원의 확신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라고 낙심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균형 잡힌 이해 속에서, 로마서 8장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첫 번째 핵심 메시지는 “성령 안에서의 완전한 자유와 환희는 실제로 경험 가능한 실재”라는 점이다. 바울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으며,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고 선언한다(롬 8:1-2). 여기서 우리는 법적 신분이 바뀐 것에 따른 실질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 14절에서 17절을 통해, 이 자유는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된 자가 ‘성령 안에서’ 아바 아버지를 부르며 친밀하게 교제하는 데서 오는 구체적인 기쁨과 영광으로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자녀 된 자들은 하나님의 상속자이자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되기에, 이 땅에서 어떤 고난이 있어도 그 고난이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단순히 머리로만 이해하는 진리가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친히 증언해 주시는 내면의 확신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18절에서 30절에 이르는 말씀, 즉 ‘우주적인 회복’과 ‘산 자의 부활’에 관한 가르침은 바로 이러한 자유가 개인적·영적 차원을 넘어서 창조세계 전체로 확장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해산의 수고를 하는 이유는,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 때문에 함께 회복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롬 8:19-22). 여기서 바울은 인류를 포함한 우주적 재창조의 비전을 제시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리 맛보는 성도들이 누리는 성령 안에서의 자유가, 개인의 내적 평안에 그치지 않고 역사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된다”라고 설명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창세기 9장의 노아 이야기에 연결 지어, 노아가 홍수 심판 후 새로운 땅, 곧 신천신지(new heaven and new earth)에 내려서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누린 자유와 기쁨을 비유로 사용한다. 노아가 취해 벌거벗은 모습은, 에덴동산에서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모습과 통한다고 말한다. 이는 ‘죄 이전의 순수함’, 혹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거룩한 기쁨’을 상징한다.
여기서 포도주는 성령의 상징이자, 죄 사함과 새 생명의 기쁨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이 이를 예표하며,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 사도와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뒤 “새 술에 취했다”라는 비난을 받았던 장면 또한 같은 맥락이다. 즉 성령 강림으로 인해 예언되었던 새 술이 실제로 부어졌고, 이것이야말로 구약의 예언(요엘 2장 등)이 성취된 결과라고 장재형목사는 강조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이 보여 주는 자유는, ‘물 같은 존재’가 ‘포도주’로 변화되어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거듭남의 실체다. 이것이 우리가 이미 이룬 것이면서도 동시에 계속 누려야 할, 그리고 나아가 자범죄의 흔적을 씻어 내는 성화의 과정에서 더욱 완성해 가야 할 삶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미 우리는 새 집에 이사했지만, 과거의 구습으로 인해 이전 집으로 돌아가려는 습관적 죄에 휘둘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깨어 있는 삶을 살면, 점차 그 습관에서 벗어나 점점 더 성결한 모습으로 나아가게 된다”라고 말한다.
이때 ‘죄의 두루마기’를 빨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묵시록(계 22:14)의 이미지가 중요한데, 이것은 칭의 이후에 우리가 게을리하지 말고 수행해야 하는 매일의 회개와 순종의 삶을 뜻한다. 흰 두루마기를 입고 하나님 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다는 비전(계 19:7-8)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최종적인 영광이자 영화(Glorification)의 단계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성도는 이 미래의 영광을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정리한다.
이처럼 로마서 7장과 8장을 연속성 속에서 살펴보면, 구원받은 자가 현실에서 겪는 내적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제공된 거대한 해방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된다. 또한 장재형목사는 이 모든 과정을 총괄해“우주적인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개인의 신앙 여정이 어떻게 통합되는지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죄와 사망의 법을 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그리고 성령의 내주와 인도하심, 그로 말미암는 자유와 환희는 바로 로마서 8장이 가장 심오하게 증언하는 구원의 보화이자 보증이다.
이것이 첫 번째 소주제인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환희”의 전반적 내용이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했듯, 성도들도 칭의를 받아 새 생명으로 탈바꿈했으며, 그 상태를 유지하고 더욱 선명하게 살아내는 힘이 바로 성령이라고 장재형목사는 지속적으로 역설한다. 구원의 핵심은 단지 죄 사함이나 천국 입장의 권리만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성령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 충만한 기쁨, 활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은 결국 구원을 보증하는 열매가 되고, 우리를 더 높은 차원의 영광으로 이끈다.
2.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
앞서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환희”가 로마서 8장의 전반부(1절에서 30절까지)에 걸쳐 펼쳐진다면, 이어지는 31절부터39절은 이 모든 구원과 성령의 역사를 종합하고 결론 내리며, 절정으로 치닫는 장면을 보여 준다. 이 마지막 단락은 흔히“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혹은 “영원한 사랑”에 대한 가르침으로 알려져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두고 로마서 16장 중에서도 가장 웅장하고 확실한 ‘승리의 찬가’라고 칭한다.
먼저 성도의 견인이란, 구원받은 사람이 끝까지 믿음을 지켜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는다는 교리를 말한다. 칼뱅주의 전통에서“성도의 견인”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라는 교리와도 연결되나, 단순히 기계적인 교리적 해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바울은 로마서 8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끝까지 붙드시는 사랑의 능력과 확실성을 증언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해설하면서, “성령 안에서 거듭난 성도들은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 어떤 세력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 없는 굳건한 언약 관계에 들어섰다”라고 강조한다. 이는 구원의 확신과 더불어 우리에게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자범죄로 인한 넘어짐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고, 결코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신다는 약속이다.
그렇다면 이 견인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으니,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라고 반문한다. 즉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절대적인 사랑, 곧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극진한 사랑이, 우리의 구원을 보존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라는 것이다. 우리가 연약할 때, 혹은 신앙적으로 흔들릴 때, 심지어 죄의 습관에 매여 잠시 길을 잃을 때도,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하나님 편의 100% 헌신에 근거한 구원의 보증”이라 부른다.
또한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라는 구절이 말해 주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칭의받은 성도에게는 죄의 정죄 권한이 더 이상 없음을 확실히 보여 준다. 세상이나 사탄이 고소한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우리를 의롭게 선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의 판결은 취소될 수 없다.
장재형목사가 주목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끊을 수 없음’이 곧 방종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그 사랑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사랑을 깨달은 자들은 ‘포도주로 옷을 빨아야 한다’라는 묵시록적 이미지를 기억하고, 더욱 경건과 순종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아는 자는, 그 사랑을 배반하는 길을 택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넘어질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다시 회개하고 돌아와 견인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편에서 결코 끊어지지 않는 언약적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사랑’이라는 표현으로도 설명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랑이 칭의, 성화, 영화까지 이어지는 전 구원의 과정 내내, 성도를 인도하고 지키는 절대적 힘이라고 강조한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셨다”라는 복음의 기초적 선언이며, 이 사실 위에서 로마서 8장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다”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두 축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 로마서 8장 후반부는 마치 구원의 대서사시가 결론 부분에 다다라 울리는 웅장한 합창과 같다. 바울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이 얼마나 견고하며 영원한 것인지를 놀랍도록 힘차게 선포한다. 이 메시지가 주는 위로와 확신은, 우리의 일상적 신앙생활 속에서 커다란 힘이 된다.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성도들은, 계속되는 자범죄와의 싸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성화의 과정을 걸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라는 절대적 약속이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가르침을 삶에 실제로 적용해야 함을 여러 차례 설교와 강의에서 역설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보장된 구원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초월하는 자유와 담대함’을 준다. 세상적 가치나 환경이 우리를 흔들 수 있으나, 결국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 강력하기에, 우리는 어떠한 환난이나 박해도 이겨 낼 수 있다. 실제로 믿음의 선진들, 교회사 속의 무수한 순교자들, 그리고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성도들은, 이 로마서 8장의 약속을 붙들고서 담대히 믿음을 지킨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을 “노아의 포도주 비유”와 함께 연결 지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릴 영원한 기쁨이 이미 이 땅의 성도들에게 예표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노아가 홍수 후 새로운 땅에 발을 디딘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해 마치 심판 이후의 새 세계를 미리 맛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옷을 벗고도 부끄러움이 없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기쁨은 참으로 완전하며, 장차 도래할 천국 잔치의 작은 모형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삶을 지속하도록 붙들어 주는 것이 “영원한 사랑”이다.
또한 이 견인 교리는 우리의 인간적 약함이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구원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교리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선택했고, 죄를 멀리할 의무가 있지만, 여전히 연약해서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이 ‘영원한 사랑’의 본질이다. 하나님 편에서 절대 끊지 않겠다고 하신 언약적 사랑이 있기에, 성도는 언제든지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으며, 끝까지 구원을 지켜 갈 수 있다”고 해설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은 ‘칭의(Justification) → 성화(Sanctification) → 영화(Glorification)’로 이어지는 구원의 전 과정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완성된 상태로 죄와 씨름하는 모습을 7장 후반부에서 현실감 있게 보여 준 후, 8장에 이르러서는 성령 안에서의 자유와 환희의 삶, 그리고 결국에는 성도의 견인, 곧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완전히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조적 흐름이 “신학적 지식”을 넘어 신앙인이 삶으로 체험해야 할 “구원의 서정”이라고 설명한다. 지식으로만 알 때는 피상적일 수 있지만, 실제 삶에서 성령의 거룩한 인도를 경험하고, 매일의 회개와 말씀 묵상을 통해 옛 죄의 습관을 씻어 내며,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끝까지 나를 사랑으로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체험함으로써, 로마서 8장의 진수를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은 우리에게 종말론적 소망도 준다. 이 땅의 고난이나 불안, 그리고 죽음조차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대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담대한 믿음을 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8장이 말하는 최고의 클라이맥스이며, 나아가 복음 전체가 선포하는 ‘승리의 복음’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견인의 교리가 지닌 실제적 효력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교회 역사상 많은 성도들이 낙심의 순간, 혹은 시험과 고난의 때에 로마서 8장 31절부터 39절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의 무릎을 꿇으며, “어떤 것도 우리를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라는 선포로 절망을 돌파했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이 결국은 실제 삶에서의 극복과 승리로 이어졌다. 바울의 선언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승리자이기 때문이다(롬 8:37).
이처럼 두 번째 소주제인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을 통해, 로마서 8장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는 단지 신학적 교리의 완결이 아니라, 실제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를 붙드는 가장 강력한 힘이자 약속이다. 우리는 로마서 8장을 통해 죄의 문제에서 자유와 환희를 경험할 뿐 아니라, 아무리 힘든 상황이 닥쳐도 하나님이 시작하신 구원을 끝까지 온전하게 완성하시리라는 ‘반석 같은 확신’을 얻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로마서 8장은 구원의 드라마가 정점에 달하는 장면이며, 성령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동시에, 마지막에는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위에 굳게 서 있음을 확인해 주는 클라이맥스다. 장재형목사는 이 로마서 8장의 메시지를 붙들면, 성도들이 인생의 여러 전환점을 맞고 비약적인 영적 성장과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아무리 죄의 습관이 견고해 보여도,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보증하기에 소망이 있다.
바울이 로마서 8장 곳곳에서 성령의 역할, 죄로부터의 해방, 자녀 됨의 영광, 우주적 회복, 그리고 견인의 확신을 일관되게 증거하는 것은, 한마디로 “복음의 핵심을 집약적으로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 복음의 결론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의 사역, 봉사, 순종, 심지어 회개와 성화의 노력조차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지 않다면 헛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를 내어 주시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우리가 끝까지 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따라서 장재형목사가 일관되게 강조하듯, 로마서 8장은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그 사랑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역사하며, 우리를 변화시키고, 자유케 하고, 환희를 맛보게 하고, 결국은 영원한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되는지에 대한 전체 과정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언약으로써, 성도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신뢰할 수 있는 반석과 같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정리하자면, 로마서 8장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환희, 그리고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된 위대한 구원의 장이다. 첫 번째 축에서는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고 성령의 내주로 인해 경험하는 새로운 삶의 기쁨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두 번째 축에서는 그렇게 시작된 구원이 궁극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이유, 즉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우리를 붙들기 때문임을 힘차게 선포한다. 이 사랑은 어떤 조건이나 능력, 혹은 우리의 공로에 달려 있지 않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신 대속적 희생과 성령의 인치심이 보증이 된다.
결국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을 공부하는 것이야말로 성도들이 영적 전환과 깊은 회복을 경험하는 핵심 열쇠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다. 구원의 서정을 이해하고, 이미 주어진 자유와 기쁨을 소홀히 하지 않으며, 동시에 어떤 환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견인과 영원한 사랑의 확신을 붙들 때, 우리의 신앙은 한 단계 더 성숙해지고, 더 큰 평안과 능력 가운데 거하게 된다. 이는 바울이 꿈꾸었고 경험한,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동일하게 누릴 수 있는 복음의 실제적 능력이다.
이처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환희’와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이라는 두 소주제로 재구성해 보았을 때, 로마서 8장은 죄의 문제로부터의 해방, 하나님의 자녀 됨의 영광, 우주적 회복의 비전,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끊을 수 없는 사랑 안에 거하는 성도의 견인까지, 복음의 정수와 희망을 가장 웅장하게 드러내는 장이 된다. 칭의, 성화, 영화라는 구원의 전 과정 속에서 인간이 겪는 모든 실존적 갈등과 그것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데 어우러져, 성경 안에서도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이룬다.
결국 로마서 8장의 결론은 “우리에게는 어떤 정죄도 없다”와 “어떤 것도 우리를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로 요약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두 선언이야말로 기독교 복음이 제시하는 가장 확고한 기쁨과 소망의 표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을 듣는 성도들은 지금도 큰 위로와 확신을 얻어, 세상 속에서 빛으로 살아가며,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소망 중에 기다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을 연구하며 설교할 때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죄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포도주가 되어 가는 체험을 하는 것”임을 누차 말한다. 다시 말해, 물과 같은 상태에서 포도주로 변화된 존재가 결코 물로 돌아갈 수 없듯이, 우리도 이미 거듭난 후에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물론 삶에서의 실패나 유혹이 있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근거가 ‘성도의 견인’이며, 우리의 결말이 ‘영원한 사랑 안에서의 완성’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점점 더 죄의 습관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께 가까워질 수 있다.
여기서 죄의 습관을 씻고 정결하게 하는 과정은 결코 단발적 이벤트가 아니다. 이는 매일의 말씀 묵상, 기도, 회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훈련 등을 통해 이뤄진다. 그 과정에서 한순간에 완벽해지지는 않지만, 분명히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생명의 힘이 우리 안에서 작동한다. 로마서 8장이 말하는 ‘성령의 내주’란 결코 추상적인 사상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안의 욕망과 두려움을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만드는 힘이다.
더불어, 장재형목사가 즐겨 사용하는 예화인 노아의 포도원은 이 과정을 조금 더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만들어 즐기는 모습은, 종말론적 구원 이후에 누리는 충만한 기쁨을 상징한다. 그러나 노아가 그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었을 때, 함의 태도와 셈과 야벳의 태도가 갈렸다. 누군가는 아버지의 수치를 들추어내려 했고, 누군가는 그것을 덮어 주었다. 이처럼 구원 이후에도 인간의 다양한 태도가 드러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포도주”는 축복이었고,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무대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열매 맺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로마서 8장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도 우리를 포도주처럼 변화시키며, 그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여러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약속으로 귀결된다(롬 8:28).
마지막으로,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은 곧 “끝까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동행”을 의미한다. 바울이 8장 끝에서 고백한 “내가 확신하노니…”라는 선언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시작하신 것이며, 하나님이 충성스럽게 마무리하신다(빌 1:6 참조). 그 과정에서 성도는 중간에 흔들릴 수 있어도, 결코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그 사랑이 너무나 크고, 죄인이었던 우리를 아들 삼으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실로 완전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로마서 8장의 메시지를 통해, 장재형목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시대적 혼란과 개인적 고통 가운데서도 결코 좌절하지 말고,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환희”를 붙들며, 동시에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을 신뢰할 것을 강조한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질 때, 우리 신앙은 튼튼한 기둥을 세우게 되고,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영적 유산을 간직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 8장 전 구절에 걸쳐 호흡을 담아 전하려 했던 복음의 핵심이며, 장재형목사가 설교와 강의, 저술 등에서 끊임없이 외치는 신앙의 정수다.
결국 로마서 8장은 ‘복음의 하이라이트’로서 성령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동시에 그 삶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위에 세워져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죄의 짐을 벗고 자유롭게 걷는 성도들이, 혹여나 넘어질까 두려워할 때 바울의 음성이 들린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그리고 이 말씀을 연구한 장재형목사는 확신에 차서 대답한다. “아무것도 끊을 수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안에 있다.”
이것이 로마서 8장의 결론이자,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복음의 정수다. 두렵고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우리는 이 말씀을 다시 깊이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어떠한 상황도 우리를 흔들어 놓을 수 없다는 견인과 영원한 사랑 위에 굳게 서야 한다. 이 복음의 능력이 오늘도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으며,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진리의 빛으로 세상 속에서 빛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