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학자들의 혀와 귀로 전하는 생명의 복음

장재형목사

독일 문학의 서늘한 거장 프란츠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이 독자에게 남기는 가장 기괴하고 서늘한 비극의 장면은,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갑작스러운 흉측한 육체적 변화 그 자체보다도 닫힌 방문 너머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향해 그가 필사적으로 뱉어내는 핏빛 외침이 더 이상 상대에게 닿지 못하고 한낱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한 소음으로 전락해 버린 무서운 영적 단절에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의 이사야 50장 4절 강해 설교는, 일상 속에 숨겨진 이 비극적인 단절의 문제를 ‘학자들의 혀와 귀’라는 신학적이고 영적인 질문으로 깊이 있게 전환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목 놓아 부르셔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의 완악하고 닫힌 귀, 그리고 극심한 절망과 삶의 무게 앞에 무너진 곤고한 사람을 향해 단 한 마디 생명의 말도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 무기력한 혀는 과연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 안에서 온전히 회복될 수 있습니까.

은혜는 먼저 닫힌 귀를 깨운다

선지자 이사야가 바라본 이사야 50장의 하나님의 백성은 바벨론 포로라는 기나긴 절망의 어둠 속에 무기력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무서운 환란의 한복판에서 백성들에게 가장 먼저 선명하게 밝혀 보여주시는 것은 그들을 버렸다는 차가운 사실이 아니라,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는 변함없는 신실한 진실입니다.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향해 자신이 그들을 이혼 증서를 써서 내어버린 적도 없으며, 채주에게 돈을 받고 팔아넘긴 적도 결코 없다고 부드럽게 물으십니다. 그들이 겪는 참혹한 포로 생활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 아버지의 숭고한 사랑이 식었거나 구원의 손길이 짧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거룩한 말씀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불순종을 일삼은 백성 자신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본문 말씀이 폭로하는 인류의 가장 깊은 본질적 위기는 내 삶을 둘러싼 외형적인 환경의 무너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차갑게 닫혀 버린 영적인 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과 은혜로 목 놓아 부르셔도 끝내 응답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이 부드럽게 들려와도 마음 깊은 곳에서 겸허히 받아들이지 못할 때, 인간은 수많은 세속의 소리 가운데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무서운 영적 침묵 속에 갇히게 됩니다. 마땅히 들어야 할 하늘의 거룩한 음성을 듣지 못한 사람은, 마침내 말을 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도 비겁하게 침묵하거나 오히려 상처받아 신음하는 지친 이들에게 아무런 영적 힘도 되지 못하는 허무한 말만을 쏟아내게 됩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깊이 있게 붙드는 영적 과제는 입술의 현란한 언어적 기술이나 화술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할 영적인 순종과 들음의 자세입니다.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길고 혹독한 환란의 시간은, 우리가 평소에 과연 무엇을 참된 토대로 의지하며 살아왔는가를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예배의 형태나 모임의 방식이 크게 달라지고 일상의 익숙한 질서들이 흔들릴 때에도, 하나님께서 결코 그분의 피로 사신 교회를 무책임하게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이 선포하는 은혜의 흐름은 이 땅의 가정이 신앙을 보존하고 파수하는 마지막 거룩한 보루임을 엄중히 일깨우며,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가 서로 흩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서로를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거룩한 교회와 성도 공동체의 참된 회복은 멀리 있는 거대한 구호나 거창한 운동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내 바로 곁에 있는 가장 가까운 이의 숨겨진 신음 소리를 다시금 겸허히 듣는 작은 순종에서 출발합니다.

이사야 50장 4절의 위대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고난받는 그분의 종에게 “학자들의 혀”를 친히 선물로 주시고, 아침마다 그의 영적인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알아듣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거룩한 구속사의 예언은 궁극적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완전하게 성취되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안에 거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복된 약속으로 해석됩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 신음하는 곤고한 영혼을 온전히 살려내는 생명의 말은, 인간 스스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세속적인 재능이나 화려한 기교가 아니라, 아침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가장 먼저 청종하게 하시는 하늘의 깊은 은혜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됩니다.

“아침마다”라는 구절의 나지막한 표현 속에는 신앙생활의 가장 선명하고 거룩한 영적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성도의 혀가 세상을 향해 움직이기 전에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귀가 먼저 활짝 열려야 하고, 누군가를 가르치고 지도하기 전에 주님 앞에서 겸손히 배워야 하며, 절망에 빠진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기 전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먼저 통회함으로 일으켜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을 묵상하는 복된 시간은 그저 관념적인 신학 지식을 머릿속에 채우는 정적인 시간이 아니라, 세속의 물결 속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다시금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조율되는 거룩한 영적 스파크의 시간입니다. 성도의 진실한 믿음은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구체적인 방향으로 겸허히 받아들이는 순종을 통해 비로소 선명해지는 법입니다.

복음은 곤고한 사람의 이름을 먼저 듣는다

성경이 말하는 학자들의 혀는 결코 많은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의 화려한 언변이나 세속적인 웅변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거룩한 혀의 참된 목적을 오직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깊이 아는 사랑의 섬김에 두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언어는 말하는 사람의 우월한 지식이나 능력을 세상을 향해 증명하는 교만한 수단이 아니라, 절망 속에 지친 영혼이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보며 일어설 수 있도록 꼭 필요한 생명의 말씀을 겸손히 건네는 거룩한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건네는 참된 생명의 말은 언제나 내 입을 열기 전에 타인의 슬픔과 아픈 형편을 깊이 있게 듣는 겸손함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아무리 인간적으로 뛰어난 혀와 화려한 말재주를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혼을 살리지 못하는 무기력한 혀에 불과하다고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인간의 감상적인 말은 잠시 사람의 마음을 다독이거나 감정을 움직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깊은 죄악을 깨닫게 하고 진실한 회개로 돌이키며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품게 만드는 위대한 영적 능력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만 흘러나옵니다. 그렇기에 복음이 지닌 거룩한 권위는 내 목소리의 크기나 표현의 세련됨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진리의 말이 과연 어디에서부터 흘러나왔으며, 누구를 살리기 위해 자기 비움으로 사용되고 있는가에 완전히 달려 있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깊이 있게 들으려는 영적인 귀가 없이 인간의 말만 무성하게 많아지면, 거룩한 진리조차 쉽게 왜곡되고 상처를 주는 도구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상대방의 고통과 아픔을 충분히 공감하며 듣지 않은 채 경솔하게 던지는 성급한 충고는, 아무리 정답처럼 보이는 바른 말일지라도 상처 입은 영혼을 더욱 깊은 절망으로 밀어 넣는 또 다른 가해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겸허히 묻지 않은 인위적인 열심은 사람을 세우기보다 무겁게 짓누르는 종교적 멍에가 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의 귀는 단순히 타인의 말을 잘 받아 적는 인간적인 기술이 아니라, 성령의 나지막한 음성과 곤고한 이들의 아픈 신음 소리를 동시에 올바르게 분별해 내는 영적인 감각입니다. 그처럼 깊이 들은 사람만이 때에 온전히 맞는 위로와 책망, 그리고 진리와 사랑을 균형 있게 건넬 수 있게 됩니다.

이 설교는 성도의 혀가 깨끗하고 정결해지는 복된 길을 진실한 회개의 눈물과 성령의 불이라는 강력한 영적 이미지로 깊이 있게 설명합니다. 스스로의 죄를 깊이 자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눈물이 마음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내고, 성령의 불길이 내 안에 오래도록 쌓여 있던 죄의 습성과 교만을 남김없이 태워버릴 때, 비로소 인간의 언어도 거룩하게 새로워집니다. 회개함으로 깨어지지 않은 혀는 진리를 말하면서도 타인을 차갑게 정죄하기 쉽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은밀하게 자기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쉽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자신의 완악함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한 사람만이, 다른 이의 아픈 상처를 함부로 다루지 않고 주님의 심장으로 품을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말은, 세상에서 많이 배운 입에서 교만하게 나오기 전에 하나님 말씀 앞에서 온전히 깨어진 성도의 겸손한 마음에서 태어납니다. 그러한 복음의 언어는 죄의 엄중한 무게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절망한 죄인에게 다시금 돌아올 생명의 길을 따뜻하게 비추어 주며, 하나님의 진리를 흐리지 않으면서도 삶에 지친 사람을 무참히 짓밟지 않습니다. 이처럼 은혜와 진리가 결코 분리되지 않고 온전히 하나로 만나는 영적 공간에서, 성도의 혀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거룩한 복음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침묵에서 부활의 말이 태어난다

선지자 이사야가 영안을 열어 바라본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의 환상은, 마침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통해 완전하고 온전하게 드러났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입에서 선포된 모든 말씀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권위가 서려 있었지만, 그 하늘의 권위는 결코 자신의 고난을 회피하거나 스스로를 높여 세속적 영광을 취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오직 말씀으로 곤고한 자들을 온전히 일으켜 세우셨고,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구속적 뜻에 완벽하게 순종하사 차가운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학자들의 혀’를 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화술이나 말의 기교만을 닮고 싶다는 사사로운 소원이 아니라, 그분의 말과 완벽하게 하나를 이루었던 숭고한 사랑과 낮아짐,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십자가의 삶 자체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거룩한 고백이자 기도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라는 장재형 목사의 강력한 선언은, 인간이 겪는 고통 그 자체를 가학적으로 미화하거나 높이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의 영광을 고단한 현실을 무책임하게 외면하는 값싼 낙관론이나 세속적인 위안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는 복음의 엄중한 질서입니다. 참혹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의와 다함 없는 사랑이 완벽하게 드러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길이 비로소 활짝 열렸기에, 주님의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포해야 할 소망은 결코 막연한 세속적 위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온가지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끝내 하나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게 만드는 굳건한 믿음의 증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깊이 있게 가르치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약속된 성령을 예루살렘에서 간절히 기다리게 하신 거룩한 흐름 역시 이 영적 질서 안에 놓여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별 설교를 통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은 성도들을 이 세상에 외로운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예수께서 친히 전하신 생명의 말씀을 깊이 있게 가르치시며 생각나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마침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의 불길이 임하자, 지극히 평범하고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의 입술은 천국 복음을 대담하게 선포하는 학자들의 혀로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먼저 하늘의 음성을 깊이 들었고, 주님의 약속을 참고 기다렸으며, 마침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성도들이 비로소 세상을 향해 거룩하게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깊은 신학적 통찰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이 위대한 구속사의 역사를 결코 과거의 초대교회에만 존재했던 특별한 사건으로 가두어 두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동일하신 보혜사 성령님, 그리고 동일한 구원의 복음이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온전히 함께하고 있으며, 그 생명의 말씀은 이미 우리의 입과 마음 가까이에 매우 가깝게 다가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존재하는 진짜 문제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주지 않으셨다는 부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삶에 성령으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영적으로 둔감해져 있거나, 이미 거저 받은 가늠할 수 없는 은혜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사용하지 않는 나태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는 세속의 화려하고 새로운 말의 유행을 좇아갈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변함없이 선포되어 온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오늘을 살아가는 곤고한 영혼들에게 어떻게 생명의 참된 말이 될 수 있는가를 겸허히 다시 물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남겨야 할 것은 살리는 말

하나님이 주시는 학자들의 혀는 결코 거룩한 예배당 건물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따뜻하게 돌보고, 절망과 압제에 갇혀 신음하는 이들의 아픈 고통을 무심히 외면하지 않으며, 영적인 위로와 간절한 기도, 그리고 삶에서의 실제적인 도움을 함께 손잡아 건넬 때, 비로소 우리의 말은 구체적인 삶의 몸을 입게 됩니다. 교회가 선포하는 영원한 복음이 인간의 영혼을 향하고 있다면, 그 영혼이 고단하게 견뎌내고 있는 아픈 삶의 세속 현실 또한 결코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법입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의 실천과 진리의 담대한 선포는 결코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하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가 함께 마땅히 걸어가야 할 거룩한 하나의 길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세상을 향해 훈계하고 지배하려 드는 권위적인 집단이 아니라, 오직 섬김의 종의 모습으로 세상의 발을 씻기는 겸손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을 품는다는 미명 아래 타협하며 진리의 거룩함을 잃어버려서도 결코 안 됩니다. 들어야 할 하늘의 귀가 없이 내 주장만 무성하게 많아지면 복음은 타인을 향한 차가운 정죄로 기울고, 마땅히 말해야 할 복음적 용기가 없이 들으려고만 한다면 이웃의 참혹한 고통 앞에서 무기력하게 침묵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배우는 듣는 귀와, 세상을 향해 담대히 진리를 증언하는 혀가 균형 있게 함께 존재할 때, 교회는 세상의 거센 환란 속에서도 영원한 소망의 이유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마침내 소망을 이룬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인간이 겪는 고난과 아픔을 결코 미화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는 굳건한 믿음으로 고통의 시간을 견디어 낼 때, 심지어 과거에 깊은 상처를 입은 피폐한 공동체조차도 다른 누군가의 아픔을 품어주는 거룩한 은혜의 그릇으로 새롭게 빚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내게 맡겨진 가정을 믿음으로 지켜내고, 성경 말씀 앞에 아침마다 귀를 활짝 열며, 내 곁에 있는 곤고한 이들의 눈물을 따뜻하게 닦아주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 나라의 동일한 거룩한 사명에 속해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의 작은 순종과 헌신들이 하나둘 모여, 교회를 세상을 향해 진정한 생명의 말을 건네는 복된 공동체로 지켜내는 것입니다.

복음이 선포하는 거룩한 언어는 세상을 향해 내 목소리를 높여 큰소리를 내는 세속적인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나지막한 음성을 깊이 듣고 깨달은 성도가 곤고함 속에 신음하는 이웃의 곁에서 겸손히 건네는 생명의 말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입술에는 이미 세상의 수많은 생각과 지식, 그리고 나를 변호하기 위한 수많은 말들이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많은 말들은 정말로 아침마다 하나님께 깊이 듣고 깨달은 거룩한 말씀입니까, 아니면 내 안의 불안과 교만한 자존심이 만들어낸 부질없는 세속의 소음입니까. 그리고 지금 바로 나의 곁에서, 내가 먼저 내 입을 다물고 조용히 그 아픔을 들어주어야 할 곤고한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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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버려진 돌에서 솟아나는 생명, 죽음의 판결을 뒤집은 부활의 도(道)

1부: 버려진 돌에서 솟아나는 생명, 초대교회를 일깨운 부활의 능력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미처 다듬지 못한 미완성 대리석상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차가운 돌덩이 깊은 곳에 갇혀 있던 형상이 마치 보이지 않는 영원한 빛을 향해 몸부림치며 밀고 나오는 듯한 엄숙한 침묵의 긴장감을 마주하게 됩니다.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아 투박해 보이는 그 미완의 형태가 뿜어내는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는, 사도행전 4장 속에서 역동적으로 요동치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과 무척 닮아 있습니다. 인간이 쓸모없다 여겨 사정없이 내버린 길가의 돌을,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건물의 가장 중심이 되는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우시는 바로 그 찰나, 온 세상을 짓누르던 죽음의 사형 선고는 단숨에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라는 영광스러운 반전으로 뒤집힙니다. 사도행전 4장에 나타난 이 찬란한 구속사의 현장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원초적인 도(道)가 어떻게 지상 교회를 탄생시켰는지, 그리고 위기 속에서 부어지는 성령의 담대한 능력이 연약한 공동체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없는 반석 위에 세웠는지를 가슴 벅차게 증언합니다.

사도행전 4장의 무대는 안온한 신학적 토론장이나 종교적인 명상의 자리가 아니라, 기존 기득권 체제와의 타협할 수 없는 격렬한 영적 정면충돌의 한복판에서 열립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 하나만으로 평생 단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지체장애인을 일으켜 세운 기적은, 예루살렘의 종교 기득권자들도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어 성문 앞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나 이 치유의 사건 뒤에서 장재형 목사의 강단이 강력하게 붙드는 복음의 실체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초자연적인 기적의 신비함 그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육체의 치유는 나사렛 예수의 권능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거부할 수 없는 시각적 표지였을 뿐이며, 참된 이정표가 가리키는 궁극적인 실체는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였습니다. 부활의 복음이야말로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초대교회를 거침없이 전진하게 만들었던 가장 깊고 깊은 생명의 시원(始原)이었습니다.

당시의 성전을 장악하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수비대, 그리고 내세의 부활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며 현실의 풍요를 누리던 사두개파 권력자들이 사도들을 긴급히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 표면적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단순히 세간의 이목을 끄는 또 하나의 사회운동이나 소수 종교 분파의 양적인 성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심장부와 기득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불씨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실패자 예수를 두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라고 선언하는 그 엄숙한 도(道)의 전파였습니다. 사도들이 선포한 부활의 메시지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없다고 확신하며 성전 권력을 지탱해 온 사두개인들의 철학적 기초를 완전히 무너뜨렸고, 로마 권력과 결탁해 구축한 종교적 정당성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힘으로 진리를 누르려 했던 그들의 조직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흘러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정직하게 들은 수많은 군중 가운데 회개하고 믿는 역사가 일어나 남자의 수만 족히 오천 명에 이르는 놀라운 영적 대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생명의 복음이 인간이 가하는 그 어떤 폭력과 억압보다 훨씬 더 깊고 질기며, 더 빠르게 영혼의 대지를 적시고 번져 나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신학적 선언은 명료하고 단호합니다. 지상의 참된 교회는 세상의 세련된 문화적 승인이나 영웅주의적 체면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오직 인간들의 교만과 이기심에 의해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버려졌으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죽음의 사슬을 끊고 다시 살려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영원한 기초 위에 서 있습니다.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는 사도들의 고백은, 신학 서적에나 박제되어 있는 지적 구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잔인한 죽음의 절벽 앞에 직면한 유한한 인간이 영원의 세계를 향해 붙잡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참된 소망이자 유일한 생명의 동아줄을 가리키는 실존적 증언입니다. 쓸모없다고 버려진 건축가의 돌이 가장 아름다운 성전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선언은, 인간의 얕은 지혜와 왜곡된 판단을 단숨에 초월하여 완전히 새로운 우주적 구원의 질서를 주권적으로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통치에 대한 눈물겨운 신앙고백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맥락 속에서 초대교회의 탄생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단순히 뜻이 맞는 이들이 모인 사회적 종교 단체의 형성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이 땅의 질서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하늘의 새로운 통치가 이 땅에 육화되기 시작한 영적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버리고 지워버려야 할 실패자로 취급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 거절당한 이름을 영원한 인류 구원의 중심 우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가 처음부터 심장에 새기고 물려주었던 유산은 고상한 도덕률의 나열이나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조직적인 권력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가장 깊은 뿌리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주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도 성령을 통해 지금 이곳에 여전히 살아 계셔서 친히 다스리신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권능의 이름 안에서 인류의 가장 원초적 비극인 죄와 죽음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선포, 즉 ‘부활의 복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2부: 사법적 위협 속에서 더 맑아지는 십자가의 진리

서슬 퍼런 종교 공회는 사도들을 삼엄한 법정 중앙에 세워두고 “너희가 대체 무슨 세력과 누구의 이름을 빌려 이 발칙한 일을 행하느냐”며 다분히 위협적인 어조로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고압적인 질문은 단순히 치유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려는 사법적 절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공적 광장에서 예수의 이름이 더 이상 속삭여지지도 못하도록 영원히 매장하고 침묵시키려는 거대한 세속적 압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슬에 묶인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의 타고난 웅변술이나 기적을 행한 영적 능력, 혹은 제자라는 종교적 자격을 조금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공회의 가슴을 향해, 너희들이 무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망을 부수고 다시 살려내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바로 이 기적의 실체라고 담대히 선포할 뿐이었습니다.

이 엄숙한 법정의 대치는, 성경을 펼쳐 들고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을 향해서도 날카로운 양날의 검과 같은 거울이 되어 다가옵니다. 종교가 본연의 영적 순수성을 잃고 비대해져 권력화될 때, 아이러니하게도 진리를 보수한다는 명목의 화려한 예식과 율법의 칼날이 오히려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참된 생명의 길을 가로막는 무서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잔혹한 십자가 형틀로 몰고 간 책임이 빌라도로 대표되는 이방의 세속 권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수호하려 했던 완악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깊이 얽혀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가슴을 찢으며 드려야 할 회개는, 저 불신 세상을 향해 쏟아내는 도덕적 훈계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교회라는 성벽 안에 은밀히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세상의 평판을 갈구하는 세속적 자기 보존의 욕망을 하나님 앞에 발가벗겨 드러내어 자복하는 실존적 엎드림이어야 합니다.

위협하는 자들을 향한 베드로와 요한의 답변은 눈이 부시도록 단호하지만, 결코 호전적이거나 거칠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구원의 실체를 도저히 입을 닫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그들의 짧은 진술 속에는, 정적들과의 신학적 논쟁에서 이겨보겠다는 값싼 지적 우월감이나 분노 섞인 고집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오직 구주의 죽음과 부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한 목격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맑고 정직한 떨림과 깊은 신뢰가 담겨 있을 뿐입니다. 참된 믿음은 나의 유익을 위해 억지로 짜내어 조작해 낸 심리적 확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 영원을 관통해 버린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우주적 사건 앞에 압도당하여,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하고 두 손을 드는 영혼의 깊은 순종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그토록 뜨겁게 역설하는 부활 신앙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것이 상실될 때 교회의 생명력은 쇠퇴합니다. 만약 교회가 세상의 조롱과 갈등이 두려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은밀히 축소하거나 희석한다면 눈앞의 핍박과 갈등은 잠시 모면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순간 교회는 자신의 생명이 흘러나오는 탯줄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우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의 성도들이 그토록 담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결코 그들을 둘러싼 외부적 환경이 우호적이거나 안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눈앞에 다가온 날카로운 심문과 모진 채찍질, 차가운 감옥의 투옥과 순교의 위협이 너무나 선명하게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들의 순수한 믿음은 불순물이 걸러진 정금처럼 더 맑고 투명하게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복음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아무런 마찰이 없는 안전하고 편안한 서재 안에서만 점잖게 토론되어야 할 가벼운 철학적 사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를 지배하던 절망의 정점인 죽음을 생명으로 삼켜버린 부활하신 왕의 소식이기 때문에, 어떠한 서슬 푸른 칼날의 위협 앞에서도 결코 침묵할 수 없는 절대적인 증언입니다. 이 설교는 초대교회의 거룩한 담대함을 한낱 무모한 영웅주의적 오만이나 호기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마주하고 부활을 실제로 호흡하는 자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본질적인 영적 순종의 열매로 보게 만듭니다.

3부: 성령의 진동 속에서 일어나는 나눔과 코이노니아의 기적

살기등등한 공회의 손아귀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이 가장 먼저 발걸음을 옮긴 곳은 안전한 은신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며 구주의 대속을 노래하던 눈물의 기도 공동체로 즉각 돌아갔습니다. 종교 권력자들의 혹독한 경고와 살벌한 위협의 말들을 남김없이 전해 들은 성도들은, 두려움에 질려 뿔뿔이 흩어지는 대신 도리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하늘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뜨거운 동심기도는 언제나 “하늘과 땅과 바다, 그리고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모든 만물을 친히 조성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 고백하는 창조론적 감사와 경외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당장 영혼을 집어삼킬 듯 으르렁거리는 권력자들의 사법적 핍박이 바로 눈앞에 엄존해 있었지만, 성도들은 그 세상의 위협이 자신들의 영원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보다 결코 크지 않음을 분명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초기 교회의 성도들은 고대 시편 2편의 예언적 언어들을 빌려와, 온 세상 열방이 어리석게 분노하며 세상의 권력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메시아를 대적하여 꾀하는 모든 음모조차 결국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안에서 한낱 허사로 돌아갈 뿐임을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참담한 현실을 외면한 채 공상 속에 빠져드는 어리석은 낙관주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세상의 온갖 적대감과 증오가 사실은 이미 구약성경의 예언 속에서 완벽하게 해석되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영적으로 관통하고 있었기에, 닥쳐온 핍박의 바람보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훨씬 더 크고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영혼의 참된 소망은 내 삶을 위협하는 온갖 환난과 풍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고요한 온실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계획과 선한 뜻이 세상이 가하는 그 어떤 폭력과 위협보다 훨씬 더 깊고 온전하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한복판에서, 소망의 닻은 더욱 단단하게 영혼의 깊은 심연에 박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는 자신들을 둘러싼 현실의 고난과 아픔을 즉각적으로 없애 달라고만 떼를 쓰는 기복적인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저 세상의 오만한 위협을 하나님께서 엄히 굽어보아 달라고 호소하면서도, 주님의 보잘것없는 종들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늘의 생명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도록 영적인 지지와 용기를 달라고 오직 간구할 뿐이었습니다. 또한 아픈 이들에게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내밀어 치유해 주시고, 놀라운 표적과 기사가 오직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향해 막힘없이 흘러가게 해 달라는 그들의 눈물 어린 간구는, 구원의 길을 결코 멈추지 않겠다는 생명 선언이었습니다. 간절한 기도가 끝났을 때 성도들이 모여 있던 거룩한 처소가 성령의 권능으로 세차게 흔들렸고, 모인 무리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었다는 기록은, 교회가 세상 권력이 가하는 물리적 압박감보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거룩한 인재와 통치에 의해 온전히 움직여지는 초자연적인 하늘 공동체임을 온 천하에 보여주는 명백한 사건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으키는 신비로운 변화는 단순히 강단에서 선포되는 언어의 담대함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불길이 임한 사도행전 4장 후반부의 교회는, 자신이 소유한 소중한 재화와 물건들을 아낌없이 서로 통용하고, 가난으로 신음하는 지체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나누어 주며, 눈물의 기도와 기쁨의 찬송 속에서 추상적인 사랑을 실제적인 삶으로 육화해 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신학적인 교리 체계나 세련된 문장으로만 남겨질 때 차갑게 식어 가지만, 고통받는 이웃들의 실존적인 필요를 성심껏 돌아보는 구체적인 나눔의 삶이 될 때 비로소 세상 가운데 선명한 생명력으로 고동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거저 받은 구원의 은혜는 강단에서 외쳐지는 만큼 반드시 우리의 일상 속에서 타인을 향해 흘러가야 하며, 복음의 메시지는 입술로 선포되는 깊이만큼 우리의 연약한 몸과 삶을 통해 증명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초대 기독교의 성도들은 단순한 도덕적 종교 집단을 뛰어넘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이곳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증명해 내는 거룩한 천국 공동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옷 입는다는 것은 신비로운 개인의 감정이나 일시적인 황홀경 속에 홀로 갇히는 폐쇄적인 경험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위협을 돌파하는 말씀의 용기, 형제의 눈물을 닦아주는 자비로운 사랑의 질서, 그리고 나의 욕망을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고 기쁨으로 나누는 거룩한 습관의 형성을 통해 공동체 전체의 연대성으로 찬란하게 발현됩니다. 오늘날 지상의 교회가 참으로 살아 숨 쉬고 있는가를 분별하는 기준은 외형적인 화려함이나 성전의 규모를 과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구주 예수의 이름을 두려움 없이 부르며 뜨겁게 기도하고 있는가, 소외되고 상처 입은 이웃을 내 몸처럼 소중히 섬기며 세우고 있는가, 그리고 세상의 거대한 공포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훨씬 더 실제적인 현실로 여기며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4부: 회개의 겨울을 지나 참된 교회로 서는 영원한 소망

사도행전 4장의 엄숙한 고발은 먼지 쌓인 역사책 속의 고대 영웅담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화려함 뒤에 가려진 오늘날 지상 교회의 부끄러운 실상과 민낯을 가차 없이 드러내는 준엄한 말씀의 거울입니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유일성과,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부활의 실제성을 몹시 불편해하며 끊임없이 타협을 요구해 옵니다. 동시에 교회 내부에는 세속적인 권위주의와 명예욕, 그리고 탐욕스러운 재물의 유혹이 슬그머니 기어들어와 영적인 눈을 멀게 만듭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사도행전 4장의 영광 뒤에 숨겨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적인 다음 장면까지 우리의 시선을 엄히 확장시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를 위태롭게 흔드는 것은 외부의 사나운 핍박과 폭력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에 은밀히 자라나는 위선과 탐심, 그리고 하나님을 속이려는 세속적 정욕이 공동체의 순결한 생명을 안으로부터 좀먹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가 눈물을 흘리며 다시금 성찰해야 할 본질적인 질문은, 우리가 얼마나 화려한 제도적 시스템과 재정, 그리고 영향력 있는 조직망을 구축해 놓았는가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에게 죽음을 이긴 예수의 부활 신앙이 삶의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살아 있는 권능으로 역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구원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고 변두리에 세워두는 순간, 제아무리 화려하고 유익한 종교적 활동과 자선 사업을 벌일지라도 세상의 이익 집단이나 도덕 단체와 본질적으로 아무런 다를 바 없는 무기력한 조직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영원히 쇠하지 않는 부활의 복음이 신자들의 영혼 중심에 불타오르고 있다면, 비록 연약하고 배우지 못한 소수의 사람들이 모인 초라한 공동체라 할지라도 세상을 향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언하는 강력한 성령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가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진 오늘날의 신자들의 귓가에 조용한 나팔 소리처럼 큰 울림을 주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본질적인 영적 권위의 회복을 외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흔들릴 수 없는 교회의 뿌리이며, 보혜사 성령의 임재는 교회를 안에서부터 박동하게 만드는 거룩한 생명력이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교회가 마지막 날까지 증거해야 할 유일무이한 사명입니다. 이 세 가지의 핵심 기둥은 사도행전 4장에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물줄기를 든든히 지탱하는 거대한 삼중의 중심축입니다. 교회가 이 본질적인 하늘의 고백을 망각하고 타협하는 순간 세상의 기업들을 닮아 가며 급속히 쇠락하겠지만, 이 시원적 고백을 눈물로 통회하며 회복해 낼 때 가장 연약해 보이던 공동체조차 어두운 세상을 향해 사자처럼 담대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지닌 참된 깊이와 고결함은, 나를 방해하는 사나운 바람과 시련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평안한 때에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닥쳐오는 차가운 시련과 위협의 절정 속에서, 내가 진정으로 가슴에 품고 있는 이름이 무엇인지, 그리고 누구의 주권 위에 영혼의 발을 딛고 서 있는지를 통해 비로소 선명하게 검증되는 법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도 소리 없는 거대한 영적 공회가 끊임없이 열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오직 내 개인의 마음속 사적인 위안이나 조용한 취미 생활 정도로만 가두어 두라고 속삭이는 차가운 사회적 분위기, 생명의 복음을 위해 좁은 길을 걷기보다 내 삶의 육체적 안전과 안락함을 끊임없이 계산하는 비겁한 타성의 습관들,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 있는 시선보다 사람들의 평판과 체면을 먼저 앞세우며 위선적인 종교 생활을 이어가려는 마음의 음모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의 부활의 도(道)를 진실로 믿는 성도는, 인간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철저히 버린 모퉁이의 돌 같은 상황 속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온 우주의 머릿돌로 세워 가실 영광스러운 승리의 아침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대체 무엇이 두렵고 부끄러워 진리의 입술을 닫은 채 비겁하게 침묵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내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다시금 눈물로 붙잡아야 할 참된 구원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이제는 거짓된 가식을 모두 벗어던지고, 오직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가난하고 잃어버린 이웃들을 향해 담대히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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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가르는 빛, 안디옥의 정신: 장재형 목사의 강해를 통해 본 선교적 부르심

카라바조(Caravaggio)의 걸작 **「성 마태의 소명」**을 보면,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세관 안으로 날카로운 빛 한 줄기가 비스듬히 파고듭니다. 그 빛은 방 안에 있는 모든 이를 무차별적으로 조명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사람, 마태의 얼굴을 정확히 겨냥합니다. 그 빛을 마주한 자는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근원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안디옥교회 강해는 바로 이 ‘빛의 사건’으로부터 신앙의 본질을 추적합니다. 복음이란 단순히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존재를 일으켜 세우고 공동체를 빚어내어, 마침내 세상을 향해 걸어가게 만드는 거대한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1. 고정된 장소에서 파송의 현장으로: 안디옥의 태동

기독교 역사에서 안디옥교회가 지니는 상징성은 매우 독특합니다. 이 교회는 화려한 성전이나 견고한 제도적 조직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철저한 자기 비움인 기도와 금식 속에서 세미한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 성령의 주권적 파송: 안디옥교회는 자신들의 공동체가 비대해지는 것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음성에 순복하여 가장 유능한 지도자였던 바나바와 바울을 세상의 한복판으로 기꺼이 보냈습니다.
  • 교회의 본질적 정의: 이를 통해 교회는 ‘복음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창고’가 아니라, ‘복음에 사로잡혀 세상으로 나가는 파송 기지’라는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교회는 모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흩어지기 위해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무게와 이방 선교의 지평

안디옥은 유대인과 헬라인, 그리고 수많은 이방인이 복음 안에서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를 이룬 역사적 현장입니다. 이곳에서 제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

  • 세상의 증언: 이 명칭은 성도들이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 지어낸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을 지켜보던 세상 사람들이 “저들은 진실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다”라고 인정하며 붙여준 영광스러운 흔적이었습니다.
  • 신앙의 이중주: 안디옥교회는 ‘내적 은혜’와 ‘외적 사명’의 균형을 완벽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끊임없는 기도와 감사가 샘솟았고, 공동체 밖으로는 전도와 교회 개척의 열매가 강물처럼 흘러갔습니다. 이러한 균형이 무너질 때 교회는 자기 보존에만 급급한 폐쇄적 집단이 되거나, 영적 뿌리 없이 활동만 무성한 단체가 되고 맙니다.

3. 골로새서의 신학적 기둥: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서다

안디옥교회의 열정적인 활동은 골로새서가 제시하는 단단한 교리적 기초 위에 서 있었습니다. 골로새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자 ‘모든 만물의 머리’라고 선언합니다. 장재형 목사의 신학적 통찰은 바로 이 기독론적(Christological) 기초를 강조합니다.

  • 윤리적 모범을 넘어서: 예수님을 단지 도덕적인 스승이나 성인으로 축소한다면, 교회는 세상의 수많은 구호단체 중 하나로 전락할 것입니다.
  •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복음: 십자가의 피로 하늘과 땅의 화평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때, 복음은 단순한 교훈을 넘어 우주의 질서를 재편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됩니다.
  • 지식과 삶의 일치: 신학적으로 바르게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바르게 사는 것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성경 묵상은 지적 유희가 아니라 회개와 순종을 통해 삶의 열매를 맺는 거룩한 노동입니다.

4. 기도와 감사의 다리: 보이지 않는 연합의 신비

초대교회가 지녔던 진정한 힘은 눈에 보이는 건물의 규모가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해 연결된 **’영적 유대’**에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멀리 떨어진 교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그들의 소식에 감사했던 것처럼, 기도와 감사는 흩어진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보이지 않는 다리였습니다.

  • 공교회성의 회복: 교회는 지역적인 모임이면서 동시에 전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단이나 문화의 장벽을 넘어 복음 안에서 서로를 기억할 때, 선교는 소모적인 경쟁이 아닌 아름다운 동역으로 승화됩니다.
  • 감사라는 엔진: 감사 없는 사역은 금세 피로와 번아웃을 부릅니다. 그러나 은혜를 기억하는 공동체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기보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높이며, 내부의 안정을 박차고 세상의 고통 속으로 기꺼이 뛰어듭니다.

5. 흩어지는 교회, 세상을 밝히는 등불

안디옥교회의 위대함은 ‘가장 귀한 것을 붙잡아 두지 않은 용기’에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라는 핵심 인재를 파송한 것은 선교적 교회가 지닌 역설적 승리를 보여줍니다.

  • 역동적인 생명력: 복음은 정적인 지식이 아니라 움직이는 생명입니다. 성도는 은혜를 받은 지점에서 머무는 정체된 존재가 아니라, 그 은혜를 삶의 모든 현장(가정, 직장, 사회)으로 실어 나르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 선교적 존재 양식: 세계 선교는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는 사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언어와 인종의 경계를 넘어 흘러가게 하는 영적 사건입니다. 사랑은 말보다 태도에서, 순종은 편안함보다 선택의 순간에 그 진실함이 드러납니다.

결론: 우리는 무엇에 붙들려 있는가

결국 안디옥교회의 정신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준엄한 질문을 남깁니다. 우리는 복음을 얼마나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를 자랑합니까, 아니면 복음이 우리 삶을 얼마나 강력하게 뒤흔들고 있는가를 고백합니까?

복음의 본질적인 운동성:

$$복음(Gospel) \rightarrow 은혜(Grace) \rightarrow 깨달음(Understanding) \rightarrow 파송(Sending)$$

교회의 성취는 얼마나 많은 인원이 모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각자의 삶의 자리로 거룩하게 흩어졌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며, 그 은혜를 온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삶. 그것이 안디옥이 남긴 믿음의 궤적입니다.

당신은 지금 복음을 붙들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복음에 붙들려 세상을 향해 보내진 사람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당신의 응답이 바로 당신의 오늘을 결정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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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낭비, 복음의 정수를 담은 향기: 장재형 목사의 마태복음 26장 강해

서구의 고전 성화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향유 옥합을 든 여인의 모습은 대개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오직 주님의 발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적인 장면이 뿜어내는 영적 파동은 수 세기를 지나 오늘날 우리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토록 소중한 것을 단번에 깨뜨리게 했는가? 왜 그녀는 남김없이 쏟아부어야만 했는가?”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는 이 침묵의 헌신 속에 기독교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정수, 즉 **’복음’**이 맥동하고 있다고 역설합니다. 여인이 옥합을 깨뜨린 행위는 단순한 미담이 아니라, 장차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미리 보여주는 거룩한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1. 효율의 논리를 뒤엎는 사랑의 파격

마태복음 26장의 배경은 긴장감으로 가득합니다. 한 여인이 지극히 귀한 향유를 가지고 나아와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순간, 그 장소에 모여 있던 이들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특히 제자들은 이를 ‘낭비’라고 규정하며 불쾌감을 드러냈습니다.

  • 세상의 잣대: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이들을 구제했다면 얼마나 유익했겠는가?”라는 제자들의 항변은 매우 합리적이고 정의로워 보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효율성’과 ‘사회적 가치’의 언어와도 닮아 있습니다.
  • 주님의 시선: 그러나 예수님은 이성적인 계산기를 두드리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여인을 옹호하셨습니다. “그녀는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는 주님의 선언은, 복음의 가치가 인간의 산술적 계산을 넘어선 곳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대목에서 복음의 심연이 열린다고 강조합니다. 복음은 ‘계산’이 멈춘 곳에서 비로소 ‘계시’로 다가옵니다.

2. 십자가, 하나님이 자신을 깨뜨리신 사건

왜 이 여인의 행위가 복음 그 자체가 될까요? 복음의 핵심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낸 업적에 있지 않습니다. 반대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먼저 비천한 죄인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 자기 비움(Kenosis):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쏟아내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창조주가 피조물의 손에 죽는 것은 가장 비효율적이고 어리석은 ‘자기 파괴’처럼 보입니다.
  • 복구 불가능한 헌신: 옥합은 한 번 깨지면 다시 붙일 수 없고, 쏟아진 향유는 다시 병에 담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 또한 그러했습니다. 적당히 나누어준 것이 아니라,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전적인 투여를 하신 것입니다. 올리벳대학교의 신학적 묵상이 주목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입니다. 이 여인의 행위는 십자가라는 ‘거룩한 낭비’를 온몸으로 비추어낸 거울이었습니다.

3. 은전의 소리와 향유의 향기: 두 영혼의 갈림길

이 본문이 더욱 처연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여인의 헌신 바로 뒤에 유다의 배반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두 인물을 대조하며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1. 여인의 옥합: 사랑을 발견한 자는 가장 귀한 것을 깨뜨려 드렸습니다. 그녀에게 주님은 온 세상보다 귀한 분이었습니다.
  2. 유다의 은전: 사랑을 ‘허비’로 여긴 자는 가장 귀한 분을 은 30에 팔아넘겼습니다. 그에게 주님은 자신의 야망을 채워줄 도구이거나, 가성비가 떨어지면 처분해야 할 상품에 불과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신앙의 성패가 결국 ‘사랑을 대하는 태도’에서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주님 곁에서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내 영혼을 적시는 ‘은혜’가 되었느냐는 점입니다. 복음을 머리로만 이해하면 계산기가 남고, 복음을 가슴으로 영접하면 옥합을 깨뜨리는 모험이 시작됩니다.


4. 현대의 ‘실용주의 신앙’을 향한 경종

우리 또한 매일 이 두 사람 사이의 경계선 위에서 위태롭게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조차 ‘투자 대비 효율’을 따지는 순간, 우리는 유다의 길에 가까워집니다.

  • 기도의 응답이라는 ‘결과’에만 매몰될 때, 순종보다는 ‘손익계산서’를 먼저 작성할 때, 우리는 옥합의 가치가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게 됩니다.
  • 누군가의 눈물 어린 헌신을 보고 “적당히 좀 하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우리 마음에는 복음의 향기가 마른 것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역설을 가르칩니다. 사랑은 남는 자투리 시간을 내어주는 취미 생활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거룩한 허비’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도의 진정한 정체성은 바로 이 ‘어리석어 보일 만큼 깊은 사랑’ 안에서만 선명해집니다.


5. 사랑받은 자만이 옥합을 깰 수 있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는 우리에게 무거운 율법적 짐을 지우지 않습니다. 대신, 근원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대는 진정으로 사랑받았음을 확신하는가? 십자가가 여전히 그대의 심장을 뛰게 하는 복음인가?”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만이 자기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눌 수 있듯,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를 경험한 자만이 자신의 옥합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회개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너무나 익숙한 종교적 문장으로만 취급하며, 주님의 사랑을 효율의 언어로 난도질해 온 우리의 메마른 가슴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 지점에서 죽어있던 신학은 살아있는 묵상이 되고, 멀게만 느껴졌던 말씀은 가슴을 울리는 소망이 됩니다.


결론: 당신의 옥합은 어디에 있습니까?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가 복음인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방식—이유를 묻지 않고 자신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사랑—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이 ‘사랑의 낭비’를 이해하지 못해 멸망의 길로 갔지만, 여인은 이 사랑의 본질을 직감적으로 붙잡아 영생의 기록 속에 남았습니다.

우리는 매일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손해’로 볼 것인가, 아니면 내 존재를 바꿀 ‘생명의 향기’로 받을 것인가. 오늘 당신의 삶에서, 주님께 드리기 아까워 아직도 품속에 꼭 쥐고 있는 옥합은 무엇입니까?

그 옥합이 깨지는 순간, 당신의 삶에는 비로소 하늘의 향기가 진동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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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에게도 새벽은 오는가: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의 베드로 회복론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 그곳의 밤은 공기보다 영혼이 더 시린 공간이었습니다.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숯불의 온기조차 베드로의 심장까지 파고든 공포의 냉기를 녹이지는 못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는 “주님과 함께라면 투옥도,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며 장담하던 열혈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서슬 퍼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그가 쌓아 올린 신념의 성벽은 한낱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 참담한 장면을 마주할 때면 우리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沈黙)》**의 절정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 로드리게스 신부는 배교를 강요당하며 성화(후미에)를 밟아야 하는 극한의 고문 앞에 섭니다. 그때 흙먼지 묻은 성화 속 예수님은 침묵을 깨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너의 아픔을 내가 가장 잘 안다.”

자신의 발로 가장 사랑하는 스승의 얼굴을 짓밟아야 했던 로드리게스의 고통은, 2천 년 전 닭 울음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영혼이 파산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베드로의 통곡과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정했을 때, 베드로는 스승을 부인한 것을 넘어 자기 존재의 가장 깊은 뿌리를 스스로 잘라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 닭 울음소리: 인간 의지의 파산 선고와 은혜의 개입

성경은 초대 교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의 이 치욕스러운 실패를 조금도 가감 없이, 오히려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복음서 저자들은 이토록 뼈아픈 치부를 상세히 남겼을까요?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는 이 사건을 단순한 도덕적 타락이 아닌, **’인간 의지의 완전한 종말’**과 **’하나님 은혜의 전적인 시작’**을 보여주는 구원론적 사건으로 조명합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뜨거운 신념과 굳건한 의지로 신앙의 정조를 지킬 수 있다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요구했다(눅 22:31)”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베드로의 무너짐이 단순한 심리적 위축이 아닌 치열한 영적 전쟁의 결과였음을 상기시킵니다. 인간의 육체적 용기나 감정적 열정만으로는 죽음의 공포와 사탄의 집요한 참소를 결코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이 베드로의 배신을 통해 증명된 것입니다. 닭이 두 번 울었을 때, 베드로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끝까지 주님 곁을 지킬 수도 없는 철저히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 심연에서 마주친 시선: 정죄를 넘어선 ‘거룩한 항복’

복음의 진정한 위대함은 바로 그 ‘철저한 무력함의 자리’에서 싹을 틔웁니다. 누가복음은 베드로가 세 번째 부인을 마친 직후,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눅 22:61)”**고 기록합니다. 그 찰나의 눈맞춤은 배신자를 향한 싸늘한 질책이나 정죄의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소설 《침묵》이 묘사했듯, “나는 너를 위해 밟히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고통받는 자의 깊은 연민이자,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의 시선이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에서 베드로가 밖으로 나가 쏟아낸 ‘통곡’의 의미에 주목합니다. 베드로의 울음은 단순한 후회나 자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확신이라는 견고한 우상을 스스로 깨뜨리고, 오직 주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한 순간도 숨 쉴 수 없음을 인정하는 **’거룩한 항복’**이었습니다. 실패는 쓰라리지만, 그 실패가 우리를 주님의 시선 앞에 정직하게 머물게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깨어지고 부서진 마음(Contrite Heart)이야말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가장 거룩한 성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 깨어진 그릇에 담긴 보배: 상처 입은 치유자의 탄생

놀랍게도 이 처절한 실패의 밤을 통과한 베드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사도행전 속의 베드로는 더 이상 계집종의 추궁에 떨던 비겁한 어부가 아닙니다. 산헤드린 공회라는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도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사자후를 토하는 담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신학적 통찰에 따르면, 이 놀라운 담대함은 자신의 강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자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신의 밑바닥까지 추락해 보았으나, 그 심연보다 더 깊은 곳에서 자신을 받쳐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했기에 그는 더 이상 세상이 두렵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당부하신 말씀은, 실패해 본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진정한 위로와 회복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로서의 베드로는 그렇게 고통의 용광로 속에서 빚어졌습니다.


🌅 지금도 닭은 울고 있다: 우리를 깨우는 은혜의 알람

오늘날 우리 역시 수많은 ‘베드로의 뜰’ 앞에 서 있습니다. 사회적 성공, 체면, 혹은 생존이라는 절박한 핑계 뒤에 숨어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주님을 모른 척하며 살아갑니까?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겪는 실패와 넘어짐이 결코 ‘끝’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닭 울음소리는 심판의 파멸을 알리는 나팔이 아니라, 이제 그만 거짓된 자아의 잠에서 깨어나 참된 새벽을 맞이하라는 **’은혜의 알람’**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부인 사건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신앙은 당신의 의지 위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중보 기도 위에 서 있습니까?” 우리가 완전히 실패하여 넘어지는 그 순간조차, 주님은 우리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가장 캄캄한 밤, 닭이 울 때야말로 비로소 진짜 새벽이 오고 있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연약함마저 들어 쓰시는 그 복음의 신비 앞에서, 오늘 우리는 다시 옷깃을 여미고 주님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그 눈물 젖은 눈맞춤 속에, 다시 일어설 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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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투영한 고린도전서 10장: 장재형 목사의 시선

고린도전서 10장은 신앙의 무대가 정결한 성소뿐만 아니라, 거친 광야의 모래바람과 복잡한 도심의 소음 한복판임을 일깨워줍니다.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설립자)는 이 본문을 통해 단순한 율법적 경고를 넘어, 그 엄중함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세밀한 은총을 길어냅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을 박제된 과거사로 취급하지 않고, 오늘날의 성도가 매일 마주해야 할 영적인 거울로 소환합니다. 기적 같은 구름기둥의 인도와 하늘의 만나를 경험했음에도 무너졌던 이들의 역사는, 은혜를 경험했다는 안일함에 빠진 신자들에게 “선 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유의하라”는 날카로운 각성을 촉구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권면이 공포를 조장하는 위협이 아니라, 은혜를 변질시키지 않고 끝까지 보존하게 하려는 사랑의 초대라고 해석합니다.

1. 광야: 자만을 태우고 신뢰를 빚는 공간

광야는 과거의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성도의 내면에 수시로 재현되는 영적 환경입니다.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욕망과 관계의 균열, 효율성을 숭상하는 세상의 압박이라는 현대판 광야와 마주합니다. 장재형 목사가 이 본문을 ‘광야 생활 지침서’로 풀어내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많은 이들이 영적 성취를 ‘완전한 면역’으로 오해하지만, 바울은 은혜의 경험이 곧 자만의 근거가 될 때 그것이 오히려 우상처럼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계합니다. 은혜가 “나는 안전하다”는 자기 확신으로 굳어지는 순간, 신뢰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절망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시고 피할 길을 내신다”는 약속은 시험을 제거해달라는 기도보다, 시험을 통과하는 중심의 변화를 구하게 합니다. 여기서 ‘피할 길’은 상황의 모면이 아니라, 동일한 고난을 전혀 다른 영성으로 돌파해내는 은총의 통로를 뜻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신앙을 상황의 통제가 아닌 ‘예배의 지속’으로 정의하며, 광야를 믿음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정금의 도가니로 묘사합니다.

2. 우상숭배와 성찬: 어떤 교제에 참여할 것인가

바울은 광야의 교훈을 당시 고린도의 우상 숭배 문제로 직결시킵니다. 장재형 목사는 우상의 위험성이 그 ‘일상성’에 있다고 진단합니다. 고린도의 우상은 사회적 관계와 경제 활동 속에 공기처럼 스며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우상 역시 조각상의 형태가 아니라 성공, 소비, 자극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합니다. 예배가 특정 시간이 아닌 마음의 왕좌를 결정하는 일이듯, 우상숭배는 하나님 없이도 삶이 충분하다고 믿게 만드는 모든 체계의 총합입니다.

이에 대한 강력한 대안으로 바울은 ‘성찬’을 제시합니다. 성찬은 십자가라는 과거의 사건을 현재형으로 끌어오는 식탁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성찬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고백하고, 그분의 희생이 내 삶의 결정을 내리는 실질적인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보여주듯, 그 식탁은 완벽한 자들의 잔치가 아니라 결함 있는 자들이 십자가 빛 아래서 새 생명으로 빚어지는 용광로입니다.

3. 공동체의 질서: 아가페의 계산과 자유의 품격

성찬의 연합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윤리로 확장됩니다. “떡이 하나요 우리가 한 몸”이라는 선언은 개인주의적 영성을 거부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성찬이 사적인 경건으로 축소될 때 교회의 생명력은 사라진다고 지적합니다. 코이노니아(교제)는 정서적 친목을 넘어, 상대방을 경쟁자가 아닌 배려의 대상으로 보는 십자가의 질서입니다. 이 연합은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케리그마(선포)가 되며, 약한 자를 돌보는 디아코니아(섬김)로 완성됩니다.

바울이 다룬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 논쟁은 현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라는 대원칙은 율법주의와 방종이라는 양극단을 모두 경계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양심의 배려’를 기독교 윤리의 정수로 꼽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권리를 관철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할 줄 아는 성숙한 존재입니다. 효율이 아닌 사랑을 계산하는 ‘아가페의 셈법’은 십자가의 방향성을 닮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모든 일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결국 고린도전서 10장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대주제로 귀결됩니다. 이는 관념적인 구호가 아니라, 스마트폰을 다루는 손끝에서부터 돈을 쓰고 이웃과 대화하는 사소한 순간까지 하나님을 높이는 기준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십자가의 빛 아래 사는 신자가 광야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 속에서 복음의 향기를 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세상의 문화 속에 거하지만 세상의 가치를 섬기지 않는 것, 자유를 누리되 타인의 유익을 먼저 헤아리는 것, 그리고 어떤 시련 중에도 하나님의 미쁘심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십자가가 비추는 성도의 소명입니다. 십자가의 빛 안에서 우리의 변명은 멈추고, 하나님의 참되심만이 우리를 다시 인간다운 삶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솔라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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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종이 된 자의 숭고한 헌신과 영원한 면류관, 장재형목사


사도 바울의 사역과 생애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한 인간의 존재를 어떻게 근원적으로 변혁시키며, 그 변화가 어떻게 타인과 공동체, 나아가 사회 전체를 향한 헌신으로 확장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찬란한 이정표이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바울이 고백한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는 선언은 기독교 신앙이 보유한 가장 깊은 역설 중 하나인 ‘자유와 종됨의 신학’을 관통한다. 장재형 (올리벳대학교 설립)목사는 이 본문을 통해 복음적 자유가 단순히 율법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넘어, 사랑의 극치 안에서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결박하는 자발적 헌신으로 나아가는 과정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절대적 가치로 추앙받는 현대 사회에서 크리스천이 견지해야 할 진정한 실존적 태도가 무엇인지를 준엄하게 묻는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에 따르면, 바울이 누렸던 자유는 ‘나를 위한 자유’에 머물지 않고 ‘타인을 위한 자유’로 승화되었으며,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케노시스’, 즉 자기 비움의 영성과 궤를 같이한다. 빌립보서 2장에서 묘사된 것처럼,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종의 형체를 입어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바울 사역의 근간이자 모든 성도가 지향해야 할 종착지이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종됨’이 외부의 강요나 율법적 당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압도적인 사랑에 포로가 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자발적 순종의 결과임을 역설한다.

이러한 복음의 본질적 자유는 구체적인 전도 전략과 삶의 태도로 투영된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과 같이 됨으로써 복음의 보편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문화적 유연성을 발휘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본질에의 충실성과 형식의 유연성’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며, 현대의 전도자들이 대상의 상황과 문화적 맥락을 깊이 존중하면서도 십자가의 진리는 타협하지 않는 지혜를 가져야 함을 가르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마땅한 권리인 사도적 보수를 포기하고 텐트를 만드는 자비량 사역을 선택한 것은, 복음 전파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바울의 태도가 물질 만능주의와 성과주의에 함몰되기 쉬운 오늘날의 신앙 공동체에 던지는 경종이 크다고 보았다. 특히 바울의 삶을 시각적으로 가장 잘 투영한 예술가 중 한 명인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의 명화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The Apostle Paul in Prison, 1627)’을 떠올려 보라. 어두운 감옥 안에서 빛을 받으며 깊은 사색에 잠겨 펜을 든 바울의 모습은, 비록 육신은 매여 있으나 영혼은 복음 안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온 세상을 향해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는 그의 역설적 위대함을 잘 보여준다. 렘브란트의 명암 대비(Chiaroscuro)는 바울이 겪은 고난의 어두움과 그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복음의 소망을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장재형 목사는 이와 같이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는 바울의 영성이야말로 복음이 가진 진정한 생명력의 증거라고 강조한다.

나아가 바울의 신학은 빌레몬서에 나타난 것처럼 사회적 구조와 인간관계의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낸다.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향해 “그를 형제로 대하라”고 빌레몬에게 간청하는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는 계급과 신분을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발견한다. 장재형 목사는 빌레몬서의 화해 메시지가 단순히 개인적 용서의 차원을 넘어, 복음이 어떻게 사회적 불평등과 갈등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천적 지표라고 설명한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진 빚을 대신 갚겠다고 자처하며 화해의 중재자가 되었는데, 이는 곧 죄인 된 우리를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삶으로 재현한 것이다. 이러한 화해와 용서의 신학은 오늘날 분열된 사회 속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의 사명을 일깨운다. 장재형 목사는 크리스천의 순종이 단순히 행동의 수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 사랑에 응답하는 내면의 완전한 굴복임을 강조하며,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형제로 연합된 것처럼 현대 교회도 차별 없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JZYhwjWz3rU

바울은 또한 신앙의 여정을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경주자에 비유하며, 향방 없는 달음질이 아닌 분명한 목표를 향한 집중력을 요구한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서 27절에 이르는 자기 절제와 훈련의 메시지는 종말론적 소망을 가진 성도의 필수적인 태도이다. 세상의 선수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위해 자신을 연단하지만, 크리스천은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절제를 실천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의 절제가 단순한 자기 억압이 아니라, 더 큰 영광과 소망을 발견한 자가 누리는 거룩한 집중력임을 가르친다.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자신이 전파한 복음에서 스스로가 소외되지 않기 위함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철저한 자기 성찰과 연단이 현대의 디지털 문명과 유혹 속에서 영적 주의력을 상실한 크리스천들에게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덕목이라고 강조한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현재의 삶을 조망할 때, 우리는 일시적인 성취나 고난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상급을 향해 묵묵히 나아갈 수 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열거된 바울의 수많은 고난들—매 맞음, 굶주림, 파선, 위협—은 그를 좌절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통로가 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약함이 곧 그리스도의 강함이 되는 신비로운 은혜를 체험할 때, 고난은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가 된다고 독려한다.

장재형 목사의 통찰을 종합해 볼 때, 사도 바울의 생애는 복음이 한 인간을 어떻게 ‘모든 사람의 종’이 될 만큼 거대한 사랑의 소유자로 빚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완성된 서사이다. 바울은 율법의 엄격함에서 복음의 유연함으로, 자기 의의 요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바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로마라는 거대 제국의 도시들을 거점으로 삼아 복음의 전초기지를 세웠고,자비량 선교를 통해 복음의 독립성과 순수성을 지켜냈다. 이러한 바울의 사역 철학은 오늘날 올리벳대학교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 현장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모델이 되고 있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적 자유와 헌신의 삶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날마다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로 채우는 자들에게 허락된 실제적인 삶의 방식임을 강조한다. 우리는 바울이 달려갔던 그 길, 즉 영원한 면류관을 향한 경주에 초대받았다. 그 길은 비록 좁고 험할지라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이 있으며, 그 끝에는 우리를 맞아주실 주님의 품과 썩지 않을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이 바울과 같이 세상의 종교적 관습이나 세속적 가치관에 매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여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타인을 섬기는 ‘복음의 빚진 자’로 살아가기를 권면한다. 복음 안에서의 자유와 헌신, 그것은 곧 십자가의 도이며 생명의 길이다. 이 위대한 신앙의 경주를 멈추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바울이 고백했던 그 기쁨의 실체를 우리의 삶 속에서 온전히 맛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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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 ‘은혜의 빚’과 로마서의 숨결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 목사의 로마서 강해를 따라 읽다 보면, 오래전 사도 바울이 기록한 문장이 더 이상 고대 문헌에 머물지 않고 오늘 우리의 호흡과 이어지는 듯한 생동감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로마서 1장 8–15절에 대한 그의 해설은 단순한 주석의 범위를 넘어, 한 사도가 어떤 심정으로 교회를 품었고 복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섬세하게 드러냅니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의 신앙 또한 그 거울에 비춰져 재정렬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논할 때, 장재형 목사의 이름은 해석자의 지위를 넘어 바울의 내면을 오늘 언어로 번역해 주는 통로처럼 자리합니다.

가장 먼저 마음을 끄는 것은 바울의 감사 고백입니다.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라.” 이 말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로마에 먼저 복음이 도달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라 자부하던 사람에게 로마는 그 누구보다 먼저 가고 싶었던 전략적 요충지였을 터입니다. 그럼에도 장재형 목사는 바울에게는 서운함이나 경쟁심이 전혀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누군가 자신보다 먼저 로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시기하는 대신, 바울은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이름이 남지 않은 누군가가 뿌린 씨앗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넓은 마음이야말로 복음의 체질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장면은 자연스레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수확의 주역은 따로 있지만, 들판에 남겨진 이삭을 묵묵히 줍는 이름 없는 여인들의 손길이 결국 풍성함을 완성합니다. 로마 교회의 성장도 이와 같았습니다. 누가 처음 복음을 전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믿음은 조용히, 그러나 굳세게 자리 잡았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무명의 헌신을 바라보는 바울의 마음을, 따뜻한 화가의 시선에 비유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이들의 손으로 자라난다고 설명합니다.

예수의 겨자씨 비유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출발에서부터 상상할 수 없는 확장을 이룹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역사 속에서도, 깊은 곳에서는 일정한 방향의 흐름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장재형 목사는 복음의 ‘확산력’을 강조합니다. 죄가 퍼지는 속도가 무섭게 느껴질 때가 많지만, 그보다 더 깊고 더 강하게 세계를 움직이는 힘은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표면적인 변화 너머에서 거대한 해류가 꾸준히 한 방향으로 흐르듯,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관점입니다.

이 설명은 미켈란젤로의 「사울의 회심」을 연상시킵니다. 캔버스 곳곳에 역동적인 혼란이 그려져 있지만, 전체를 지배하는 빛의 방향은 오직 하나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길이 막힌 듯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이미 복음의 흐름이 정해져 있다는 암시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흐름 안으로 우리가 초대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의 이유라고 말합니다.

또한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를 “기도로 쓰인 편지”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음에도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기도했다고 고백합니다. 초대교회의 교제는 물리적 만남을 넘어 영적 연대에 기반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처럼 “떠난 것은 얼굴뿐, 마음은 여전히 함께”라는 관계가 기도로 유지되었습니다.

이런 영적 연결망은 렘브란트의 「야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화면 속 인물들은 각기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만, 전체 조명과 구도는 하나의 공동체적 긴장을 이룹니다. 초대교회 역시 떨어져 있지만 기도로 하나를 이루었고, 장재형 목사는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합니다. 내가 세우지 않은 교회라도, 이미 성령이 역사하고 있는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 — 이것이 바울의 심장이며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태도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향하려 했음에도 여러 차례 길이 막힌 배경을 설명하면서, 장재형 목사는 “예루살렘 퍼스트”의 정신을 짚어 줍니다. 아무리 이방 교회가 성장해도 바울은 자신에게 영적 유산을 넘겨준 예루살렘 교회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방 교회들의 헌금을 “은혜의 헌금”이라 표현한 것은 이 영적 중심과의 연합을 유지하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는 마치 큰 원을 그리기 전에 정확한 중심점을 먼저 찍는 것과 같다고 장재형 목사는 설명합니다. 세계 선교의 원을 그리기 위해 바울은 먼저 예루살렘이라는 중심축을 확립한 것입니다.

이 연합의 비전은 라파엘로의 「성체 논쟁」에서 보이는 원형적 구도와 닮았습니다. 하늘과 땅, 시대와 지위를 초월해 다양한 인물들이 하나의 신비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그 장면처럼, 장재형 목사가 그리는 교회도 예루살렘과 이방 교회, 사도와 성도가 하나의 원 안에서 연결된 모습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로마에 가려는 또 하나의 목적을 “재교육과 견고함”에서 찾습니다.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미 세워진 교회들의 믿음을 다시 다지고 재정비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영적 지도력을 꾸짖으며 “한 사람을 얻고도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만든다”고 경고하신 장면과 연결됩니다. 진짜 목회는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끝까지 붙들고 세워 주는 일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부분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과 아름답게 호응합니다.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가 감싸 안고 회복시키는 장면처럼,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들을 다시 돌아가 살피며 상처를 치유하고 중심을 바로 세워 주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율법적 바리새인이 은혜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음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누고자 한다”는 바울의 말에 대해, 장재형 목사는 그 의미를 단순한 특별계시나 독점적 능력으로 좁히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나누어 주신 경험, 지혜, 위로, 간증, 가르침 등 삶의 모든 은총이 은사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와의 관계를 ‘일방적 가르침’이 아니라 “피차 안위함” 즉 상호 위로의 구도로 이해합니다.

이 상호성의 구조는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아이콘을 떠올리게 합니다. 서로를 향해 앉아 있는 세 위격, 그리고 열려 있는 빈자리—위계와 지배가 아닌 순환과 교제의 구조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이런 원형적 구조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랑이 흐르는 곳에서는 삼각형이 아니라 원이 그려진다는 것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에게 내가 빚진 자라”는 고백에서 복음의 심장이 뛰기 시작합니다. 바리새인 시절 바울은 자신의 공로를 하나님이 갚아야 한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는 자신이 이미 갚을 수 없는 은혜의 빚을 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사랑의 빚”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의무감이 아니라 내적 필연성을 낳는다고 설명합니다.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바로 복음의 체질입니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은 이 사랑의 빚을 시각적으로 보여 줍니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들은 평생 아버지의 사랑에 빚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빚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존재의 근거입니다. 바울이 모든 계층과 민족에게 자신이 빚진 자라고 고백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특정 문화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주어진 보편적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할 때, 장재형 목사는 이 복음을 단순한 교리 요약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존재에 이미 스며든 은혜의 세계 전체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허락된 수많은 체험—눈물, 기쁨, 실패, 회복, 간증, 그리고 각 교회가 가진 독특한 이야기들—을 로마 교회와 나누고, 동시에 그들로부터도 배우고자 합니다. 이것이 상호 나눔의 교회입니다.

결국 장재형 목사의 강해가 우리에게 남기는 핵심은 ‘복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름 없는 이들에 대한 감사, 보지 못한 교회를 향한 중보, 이미 세워진 공동체를 다시 돌보는 책임, 예루살렘과 이방 교회를 잇는 연합, 사랑의 빚을 자각한 자의 겸손한 열정, 그리고 원형적 교회 공동체를 향한 갈망—이것이 로마서가 그려내는 영적 지형이며 장재형 목사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울처럼, 그리고 장재형 목사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나는 헬라인에게나 야만인에게나,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든 이웃과 열방에게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솔라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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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 고린도전서 2장 강해: 세상의 지혜를 넘는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능력

장재형(장다윗)목사는 고린도전서 2장을 펼치며 편지가 단순한 교리의 나열이 아니라 필자의 인격과 심성이 배어 있는 살아 있는 고백임을 먼저 일깨운다. 그의 눈으로 본 바울은, 웅변과 철학의 도시 고린도 한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붙들고 서 있던 한 사람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라는 짧은 문장에도 1년 6개월을 함께 지낸 공동체의 냄새와 체온이 스며 있다. 시장에서 장막을 깁고,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말씀을 풀며, 기도와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사도의 일상이 그 안에 있다. 그 증인들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고 단정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고백을 당대의 미학과 철학을 능히 구사할 수 있었던 바울이 의도적으로 내려놓은 결단으로 읽는다. 세상이 환호하는 수사(修辭)로 복음을 포장하지 않겠다는 신학적, 영적 선택 말이다.

고린도는 말이 힘이던 도시였다. 광장에는 변론가들이 늘어서고, 억양과 논증의 정교함이 곧 권위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 흐름과 어긋나는 자리에서 복음을 전한다.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렘 9:23)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가슴에 새긴 채, 가말리엘 문하에서 익힌 지식과 수사학을 내려놓고, 빛 자체이신 복음을 있는 그대로 비추려 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복음의 ‘순도’라는 관점을 꺼내 든다. 빛은 자체로 아름답다. 그 빛을 더 빛나게 하겠다며 거는 필터와 장식이 오히려 굴절을 만든다.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사 1:22)라는 탄식처럼, 복음에 불순물이 섞이는 순간 생명력은 희미해진다. 교양과 스토리텔링, 문화적 도구는 유익할 수 있지만, 그릇이 너무 화려하면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경계다. 장재형목사는 강단과 성도의 언어가 이 근본적 긴장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그래서 바울의 중심은 놀라우리만큼 단순하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장재형목사는 이 한 줄을 복음의 두 기둥으로 해석한다. 한 기둥은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 다른 기둥은 역사적 사건인 십자가. 인격 없는 사건은 차가운 사실로 남고, 사건 없는 인격은 추상적 도덕으로 흩어진다. 바울은 둘을 함께 선포했다. 오랜 시간의 가르침도, 골목과 집회와 식탁에서 오간 대화도 결국 이 두 축 위에 놓였다. 장재형목사는 이 단순함을 얕음이 아니라 밀도의 다른 이름으로 본다. 본질만을 붙드는 절제, 말씀 자체에 길을 내어 주는 용기다. 빌리 그레이엄이 “설교에 가능한 한 많은 성경을 담는다”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말씀은 때로 우리 죄를 드러내고 회개의 통증을 가져오지만, 그 쓴 약만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린다. 목회와 선교의 비밀은 놀랍도록 단순한 이 중심으로,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

바울은 또한 자신의 내면을 숨기지 않는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장재형목사는 이를 패배감이나 사역 실패의 공포로 읽지 않는다. 전능하신 분의 임재 앞에서, 복음의 무게를 어깨에 올려놓을 때 인간이 느끼는 거룩한 떨림, 곧 경외에서 비롯한 떨림이라 말한다. 자기 무력의 인식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 떨림은 의존의 문을 연다. 기억력과 화술, 경험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고전 2:4)에 자신을 내맡기는 자세다. 여기서 “약함 속의 강함”이라는 역설이 드러난다. 스스로의 힘을 믿다가 무너진 베드로가 부활의 주님 앞에서 약함을 인정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자 반석 같은 증인이 되었듯, 바울의 떨림 또한 의존을 통해 견고함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그의 전도는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 아니라 성령이 낳은 확신으로 세워졌다. 믿음의 기초가 사람의 지혜 위에 놓이지 않도록, 오직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워지도록 방향을 정한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오늘의 교회 역시 이 방향을 재확인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스펙타클과 감정의 파도에 중독되기보다, 말씀과 성령의 일치에서 나오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확신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2장은 이어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지혜”(고전 2:7)를 증언한다. 시대의 통치자들도 몰랐던 비밀, 만세 전부터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해진 뜻. 장재형목사는 이 지혜의 절정을 십자가에서 본다. 만약 권세자들이 이 비밀의 구조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나님은 세상이 어리석다 여기는 방식으로 지혜를 드러내신다. 약함처럼 보이는 죽음이 능력의 문을 열고, 저주의 나무가 축복의 통로가 되며, 패배처럼 보이는 처형이 승리의 깃발로 높이 선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고전 2:9)이 예비되었다는 선언은 인간 이성의 경계를 분명히 긋는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 소멸될 운명이던 우리를 위해 독생자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지혜의 결정체다. 교회는 여기서 겸손을 배운다. 우리는 진리를 생산하는 공장이 아니라 은혜를 받아 적는 서기관이다. 만들어내기보다 듣고, 소유하기보다 순종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 이성과 감각으로는 닿을 수 없는 이 비밀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바울의 답은 명료하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니라”(고전 2:10). 사람의 깊은 것을 아는 이는 그 사람의 영이듯,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장재형목사는 성령을 단지 열정의 불꽃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의 언어로 번역해 주시는 내적 교사이자, 감추인 진리를 비추는 조명의 영이다. 그러므로 신령한 분별은 공부의 양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배움은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를 만드는 것은 성령의 조명이다. 말씀을 펴고, 설교를 준비하고,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먼저 무릎을 꿇고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일상의 사소한 선택들—가정에서의 대화, 직장에서의 정직, 공동체 섬김의 방식—이야말로 성령의 인도를 훈련하는 자리라고 강조한다. 작은 순간들의 순종이 쌓여 위기의 때에 올바른 결단을 가능케 한다.

성령의 조명이 부재할 때 일어나는 일도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성령의 비춤이 없는 이에게 십자가는 그저 무력한 죽음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거듭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며 그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본다. 세상의 지혜로 말씀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진리로 세상을 판단한다. 그리고 결국 바울은 담대히 선포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사랑과 거룩, 겸손과 순종, 진리와 자비가 조화된 마음으로 설명한다. 사랑만 강조하면 진리가 흐려지고, 진리만 내세우면 자비가 메말라 간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이 둘을 분리하지 않는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고, 악을 거절하되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 그 마음을 품을 때 교회의 언어는 따뜻하면서도 명확해지고, 성도의 일상은 복음의 향기로 변한다.

장재형목사는 전도를 프로그램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본다. 복음이 깊이 스며들면 우리는 자연스레 말하고 사랑한다. 논쟁에서 상대를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성령께서 마음의 문을 여시도록 기도하며 부드럽고도 분명하게 진리를 전하는 태도가 중심이 된다. 만남 전에도, 대화 중에도, 헤어진 뒤에도 우리는 이름을 불러 기도한다. 설득은 문을 두드릴 뿐, 성령만이 문을 여신다. 그래서 전도의 자세란 곧 의존의 자세다. 이러한 길 위에서 교회는 먼저 ‘성장’이 아니라 ‘성숙’을 경험한다. 성숙한 성도는 세상의 지혜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상처를 보면 그 위에 흘러야 할 은혜를 보고, 어둠을 보면 비춰야 할 빛을 본다.

오늘의 강단은 종종 스펙타클의 유혹과 마주한다. 화려한 무대와 즉각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장치들은 나쁘지 않지만, 본질을 가릴 위험을 품는다. 장재형목사는 문화를 배척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도구와 본질의 자리를 바르게 정렬하라고 권한다. 그릇은 내용보다 앞서지 말아야 한다. 설교자는 무엇보다 본문에 머물러야 한다. 매주 선포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성도는 말씀을 평가의 대상으로 소비하지 말고 순종의 자리로 가져가야 한다. 말씀이 삶을 관통할 때 신령한 분별은 지식의 데이터가 아니라 체온이 된다. 그때 가정에서 자녀를 대하는 방식, 직장에서 윤리적 결정을 내리는 기준,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실천하게 된다.

결국 물음은 하나로 수렴된다. 오늘 우리의 설교와 사역과 대화와 선택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가 있는가. 우리의 믿음은 사람의 지혜 위에 놓여 있는가,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서 있는가. 장재형목사는 회피하지 말고 거룩한 자기 점검으로 나아가자고 권한다. 본질을 붙들고, 성령을 의지하며, 순수한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연습을 오늘도 다시 시작하자. 약함을 두려워하지 말고 떨림을 숨기지 말며, 그 자리를 성령께 내어 드리자. 그러면 하나님은 그 약함 위에 능력을, 그 떨림 위에 평강을, 그 단순함 위에 깊은 지혜를 더하실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담대히 고백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그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진리를 선포하며, 한 영혼을 품는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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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 넉넉히 이기느니라

1.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그리고 구원에 대한 확신

장재형(장다윗)목사는 로마서 8장을 강해하면서, 인간이 가진 불안과 한계를 넘어서는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매우 강조한다. 이 장의 28절부터 3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선언한다. 인간은 인생을 살아가며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에 늘 직면한다. 어느 날 내가 좋은 것이라 여겼던 것이 훗날 악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고, 내게 손해처럼 보였던 것이 놀라운 유익으로 바뀔 수도 있다. 이런 한계와 불안정성이 인간의 삶을 뒤덮기 마련인데,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섭리 안에서 해석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해설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이 핵심임을 유의하라고 권면한다. 곧, 우리 안에는 부족함도 있고 여러 연약함도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정체성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요소를 모자이크처럼 맞추시어 선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모자이크는 작은 조각들이 맞물려야 비로소 전체 그림이 드러나듯, 하나님의 백성들의 다양한 모습과 역경, 그리고 그 한계들이 결국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어우러져 선한 결말로 이끈다는 뜻이다. 그것은 단지 개개인의 부르심에만 국한되지 않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렇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로 펼쳐진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아주 개인적으로 체험했다. 그는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를 맹렬히 박해하던 사람이었으나, 도중에 꺾여 오히려 가장 열정적인 전도자로 변했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던 기이한 반전이 일어났고, 초기 교회가 세계 곳곳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바울이 보기엔, 어떤 대적자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릴 수 없었고, 바로 그 사실을 이 로마서 8장에서 힘주어 강조한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이 구절은, 그 안에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함축하고 있다. 예정(predestination)이란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고, 섭리(providence)란 하나님께서 미리 보고 미리 인도하시는 경륜을 말한다. ‘미리(pro) 본다(videre)’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이 섭리 개념은, 우리 인간의 각 순간과 역사가 이미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가리켜 “하나님의 주권성(sovereignty)”이라고도 부르며, 이것이 기독교 역사 안에서 수없이 많은 논쟁과 토론의 중심이 되어왔음을 상기시킨다.

실제로 이 교리는 칼빈의 예정론, 특히 이중예정(double predestination)의 주된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 선택받은 자와 유기된 자로 구분된다는 점 때문에 거센 반발과 논쟁이 있어왔으나, 칼빈이 목적으로 삼았던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와 사랑 안에서 믿는 자가 누리는 놀라운 은혜의 확신”이라는 것이다.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칼빈이 활동하던 당대 이후로 점차 사람들이 이성중심, 합리주의에 치우치면서 신(神)은 우주를 창조했을 뿐 그 뒤로는 개입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이신론(理神論, Deism)이 확산되었다. 이 사조는 하나님과 실제 살아 있는 관계성을 부인하였고, 인간 이성으로 자율적으로 세계를 해석하려 했다. 이에 대항하여 칼빈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력히 설파한 것은, 하나님이 단지 우주 저편에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와 세계 안에 능동적으로 관여하시며, 작은 새 한 마리의 생사까지도 주관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바울도 로마서 8장에서 똑같은 전제를 가지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결국 그분의 절대 통치 안에서 선을 이룬다고 말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교회’가 부름받은 자들의 공동체라고 설명한다. 교회란 문자 그대로 ‘called out’, 곧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되어 부르심을 입은 모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조직이나 외적인 행정 시스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모여, 그분의 신적 통치와 섭리를 믿고 순종하며, 서로를 보듬고 함께 길을 걸어가는 영적 공동체다. 그런 점에서 28절을 다시 살펴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이라는 말은, 곧바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놀라운 결론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 때로는 파편 같은 인생의 조각들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의해 하나의 걸작으로 맞추어진다는 것이다.

29절과 30절로 넘어가면 바울은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의 예지(豫知)와 예정(豫定)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고 하고, 그들을 결국은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고 정리한다. 이것이 교회의 성도들이 받은 구원의 단계이자 여정이다. 요약하면, 예지-예정-부르심(소명)-의롭다 하심(칭의)-영화(glorification)라는 흐름이며, 칭의와 성화와 영화의 과정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점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예지예정론이, 단순히 어떤 운명론적 결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의 절대성”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곧, 사람이 믿음을 가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임했기에 가능한 것이며, 은혜가 ‘선행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서정(序程)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는 것이다.

바울 자신이 가장 강력하게 체험한 바, 그가 스데반을 돌로 치는 데 앞장섰던 흉악한 박해자였으나,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열렬한 사도가 된 과정을 떠올려보면, “왜 이런 나를 택하셨는가?”에 대한 물음은 바울 안에 매우 크게 자리했을 것이다. 스스로 뼈아픈 죄의식을 겪었으나, 결론적으로 그 모든 악함과 부족함을 미리 아시고, 또 그렇게 알면서도 용납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그는 로마서 8장에서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 바울은 그 말의 실제적 증거였다.

하나님이 예지와 예정을 통해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을 구원하시되, 구원에만 그치지 않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 29절의 핵심이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며, 그분을 첫째(맏아들)로 두고, 그분의 뒤를 잇는 많은 형제자매가 되도록 부르심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더 큰 구원의 목적’이다. 단순히 죄 사함과 심판 면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영적 성장과 완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구원의 완전한 의미다.

30절에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은, 구원의 단계에 대한 바울의 확신을 또 한 번 웅장하게 드러낸다. 미리 아시고 정하신 바에 따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며, 마침내 영화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과연 흔들릴 수 있는가? 바울의 대답은 단호하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부분이 기독교 신앙이 가지고 있는 내적 평안과 확신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이 자칫 잘못된 교만이나 타인을 정죄하는 수단으로 비칠 때도 있지만,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교만의 근거가 아니라 “자격 없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더욱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지,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느냐?”라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31절에 이르면 바울은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라고 말한다. 여기에 “이 일”이란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그 전 과정을 뜻한다. 인간의 이성이나 그 어떤 세력이 이 과정을 무효화하거나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없다는 결론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 이어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는 찬양 같은 선언이 나오는데, 이것은 구원에 대한 확고부동한 안전을 나타낸다. 구원받은 우리가 그 은혜 안에 있기에, 결코 다른 어떤 힘도 이 구원을 무너뜨릴 수 없음을 시편의 고백까지 들어서 설명한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는 다윗의 시(시편 27편)나,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시편 62편)라는 시편 기자의 노래가 그 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말씀을 해설하면서, 인간이 죄짓고 넘어지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다만 인간의 불신앙이나 의심, 죄로 인해 휘청일 때도, 우리를 건지시는 쪽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그리고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사실이 변치 않는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죄인은 끊임없이 “정말 내가 구원받았을까?” “내가 이렇게 또 넘어졌으니 버림받은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하지만, 바울은 “누가 우리를 고발하리요?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라고 반문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의롭다 하신 자를 감히 누가 죄인이라 정죄하겠느냐고 묻는다.

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라는 표현은,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그 독자 이삭을 바쳤던 장면을 상기시키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지만, 하나님의 경우에는 신적 전능자이면서 동시에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함으로써 죄인들을 구원하셨다. 바로 이 희생으로 인해 우리의 구원이 가능해졌다. 그러니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말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끝이 없음을 증언한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특히 이 32절을 중심으로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구원을 흔들 수 없음을 재차 강조한다. 인간의 가장 큰 위기는 사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으며,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그러므로 신앙인이란 주님의 사랑으로 옷 입은 자들이며, 설사 외적인 박해가 오거나 내면의 죄책이 엄습한다 해도, 최종적으로 나를 고발할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신데, 그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셨기에 아무런 고발도 유효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33절과 34절에서 “누가 능히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라는 말로 반복되고, 곧이어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완성된다.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고백 역시 로마서 8장 34절과 정확히 일치한다.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인데, 그분이 도리어 우리를 위해 계속 간구하시고 변호하신다. 그러니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는가. 장재형목사는 이는 구원받은 자의 든든한 기초이며, 인간이 의심이나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되어야 할 이유라고 해설한다.

이처럼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선언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이라는 기둥 위에 서 있고, 우리를 부르시는 소명과 의롭다 하시는 칭의,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화로운 자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어지며, 끝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라는 강력한 도전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보존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지금도 우리를 변호하고 계신다. 바로 이런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구원의 불안정성에서 벗어나, ‘확신’이라는 단단한 반석 위에 올라서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결론적으로, 이 로마서 8장에 대한 해설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사랑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순히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실제 삶의 위로와 능력으로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이 살던 시대의 이신론자들이나, 오늘날의 세속주의나 과학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한낱 멀리 계신 어떤 조물주나 지적 원리 정도로 치부해버리면, 신앙은 그 즉시 무력해진다. 그러나 바울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한 믿음을 가질 때, 또“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는 담대한 선포를 할 때, 우리가 얻는 것은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확신이다. 그리고 그 확신이 있기에, 바울은 이어지는 마지막 절들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외칠 수 있었다.

2.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는 삶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 후반부를 해설하면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묻는 바울의 말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신앙고백 중 하나라고 말한다. 35절에서 바울은 성도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어려움을 나열한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등 일곱 가지이며, 이것들은 모두 신앙인의 길에 실질적으로 닥칠 수 있는 극한 상황들이다. 실제로 바울 시대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와 압력을 받았고, 생존 자체가 위협당했다. 기근과 헐벗음, 처형의 공포가 늘 주변을 떠돌았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와 성도들이 이 모든 두려움 앞에서 좌절하고 무너져야 하는가?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절).”

“넉넉히 이긴다”는 것은 간신히 버티다가 마지막에 겨우 살아남는 수준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워낙 견고하기에, 고난의 폭풍이 몰아쳐도 “궁극적 승리”가 확정되어 있다는 표현이다. 이는 궁극적 승리인 구원, 그리고 최종적인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대한 바울의 확신에서 기인한다. 예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다”라고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선언하셨는데, 우리도 그 길을 뒤따라가며, 비록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 37절을 가리켜, “한없이 작고 연약한 존재인 인간이, 전능자의 품 안에 있기에 당당히 고백할 수 있는 문장”이라고 설명한다. 지극히 낮은 자가 가장 높으신 왕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형국이니, 넘어지지 않을 수 있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바울은 38-39절에 이르러 유명한 구절로 절정을 이룬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일곱 가지 고난에 이어, 여기서는 아홉 가지 이상의 가능한 모든 대적 요소를 언급한다. 사망, 생명, 천사, 권세, 현재와 미래, 능력, 높음과 깊음 등 공간과 시간, 영적 세계와 물질 세계, 심지어 우주적 질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며, 이것들이 아무리 거대하고 강력해 보여도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높음(ὕψωμα)이나 깊음(βάθος)이라는 표현은 당시 사람들이 별자리를 보고 미래를 점쳤던 점성술적 세계관까지 포함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 당시 많은 이들이 별들의 배치나 움직임에 의해 인생이 정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점성술적 운명론까지도 부정한다. 아무리 별의 운행과 천체의 질서가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겨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과학적 자료나 환경적 요인, 개인의 경험 등에 의해 좌우되어 결국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체념하기 쉽지만, 바울의 확신은 전혀 다르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보여주신 사랑, 그리고 부활과 승천, 성령의 내주와 중보 사역으로 지금도 계속 보증되는 그 사랑만큼은 그 어떤 피조물도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장래 일이나 현재 일이나”라는 표현은 시간성에 대한 두려움까지도 극복한다. 과거의 죄나 실패가 또다시 발목을 잡을 것 같고, 미래의 불확실성에 떨기도 하지만, 바울은 현재와 장래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붙들려 있다는 것을 선포한다. 그래서 신앙인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히려 ‘이미 이긴 전쟁’을 치르는 자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마치 승리가 확정된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처럼, 현재 당하는 어려움과 문제는 잠시의 아픔이 될 수 있지만 결말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성도의 견인(堅忍)”이라는 신학 용어와 결부시킨다. 한 번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안에서 끝까지 인도되고 지키심을 받기에, 궁극적 실패나 파멸로 돌아서지 않는다는 것이 성도의 견인이다. 물론 인간적인 허물과 죄로 인해 도중에 넘어질 수는 있으나, 최후의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로마서 8장이 이러한 확신을 주는 이유는,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가 완벽해서가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택하셨고, 부르셨고, 의롭다 하셨고, 영화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를 중보하신다. 동시에 성령님 역시 우리 내부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일을 해나가신다. 이것이야말로 바울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말할 수 있는 전적인 근거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읽을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에 특별히 주목하라고 조언한다. 구원의 출발부터 여정과 완성까지, 전부 “사랑하시는 이”에게 달려 있다는 의미다. 어떤 환난이나 고통, 심지어 죽음이 다가와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는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기에,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 그런 점에서 성도의 삶은 늘 평탄하거나 고통이 전무한 길이 아니다. 오히려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 과정조차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하는 시간이 된다.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보여주셨던 삶이 그랬고,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걸어갔던 길이 그러했다. 박해와 기근, 불안과 위험 속에서도, 교회는 계속 자라났고 복음은 편만하게 퍼져나갔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교훈은 유효하다. 예수를 믿는 것이 편안한 길이 아니라, 세상의 조류와 불의와 타협하지 않음으로 인해 때로는 소외와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기근”이나 “적신”까지 체험할 정도로 궁핍한 삶을 살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가족이나 공동체로부터 “박해”를 당하기도 한다. 심지어 목숨의 위협을 받는 지역이나 상황도 지구상에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고난의 항목은 현대인에게도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이걸 극복할 만한 내 능력이 충분하지 않다”며 좌절하기 쉽지만, 바울은 오히려 당당하게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확언한다.

특히 36절에 나오는 시편 44편 22절의 인용,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라는 구절은, 순교적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했던 초기 교회의 위급함을 잘 표현한다. 믿음의 길은 때로 죽음의 위협까지 동반한다. 하지만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37절에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선언하며, 죽음 너머의 부활 소망,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절대적 승리를 바라보았다. 장재형목사는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이 37절 말씀을 묵상하고, “지금의 환난이 내게 주어진 전부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되새기라고 권면한다.

38절과 39절에서 바울이 연달아 열거하는 내용은, 당시 로마 제국의 박해나 영적 도전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음을 극적인 언어로 전달한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모두, 결국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피조물’에 불과하다.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극단적 두려움인 사망도, 가장 강력해 보이는 세상 권세자들도, 신비롭고 거대한 우주적 존재들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이 독생자의 죽음과 부활로 보증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바울의 답은 단연 “아니라”이다.

장재형목사는 최종적으로 이 말씀을 정리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신 때부터 이미 그 영광의 자리에 이르기까지‘지속적인 경륜’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우리가 어떤 연약함과 상황에 놓이든지, 구원은 거기서 미완으로 머무르지 않고 최종적으로 영화롭게 될 때까지 이끌려 간다. 한편으로는 “이 사실을 믿느냐?”가 늘 신앙의 시험대로 우리 앞에 놓인다. 바울이 여러 차례 언급했듯, 우리는 “죄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 사이에서 날마다 싸운다(로마서 7~8장). 때론 실패도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가 돌아갈 곳은 십자가의 은혜요, 성령의 능력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이다. 바로 거기서, “누가 우리를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담대한 고백이 다시금 울려 퍼진다.

로마서 8장의 후반부는, 우리가 성도로서 나아갈 때 맞닥뜨릴 수 있는 모든 위협과 도전, 그리고 인간 내부의 의심을 향해, “하나님이 이미 이기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시니, 너희가 능히 대적하지 못한다”고 선포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루하루의 삶을 지나면서도, 심지어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이라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가운데 평안할 수 있다. 그것이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이며, 바울 사도의 불꽃 같은 열정이 담긴 로마서 8장의 결론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결론을 대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단지 ‘좋은 날만 골라 사는’ 얄팍한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박해가 없어도, 여전히 인생의 무거운 짐은 존재하고, 죄와 싸우는 끊임없는 영적 전쟁이 우리 내부에 벌어진다. 그러나 광야와 같은 삶 속에서도 “주께서 예비하신 선하고 아름다운 결말”을 확신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성도의 참된 자존감이며 영적 힘이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그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두려움과 싸울 수 있는 가장 큰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 확실하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는 마지막 39절의 성찰이자 고백이다.

로마서 8장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이 편지를 받아든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 말씀을 삶 속에서 계속 경험하게 된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때로 갈등이 생기고, 외부적인 환경이나 세상의 사상, 권력으로 인해 고초를 겪을 수도 있다. 신체적 질병이나 경제적 위기 같은 현실적인 시련도 닥쳐온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바라볼 것은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끊으리요, 누가 대적하리요?”라는 바울의 일곱 겹, 아홉 겹으로 덧씌워진 강력한 반문들이다.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내주,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약속이 있는데, 과연 그 무엇이 이 사랑을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장재형목사는“장차 보게 될 영광과 지금 겪는 고난은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 바울의 고백(로마서 8장 18절)을 다시금 상기시키며, 우리가 이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한, 삶의 방향과 결말은 바뀌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결론은 하나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 환난이나 곤고, 박해나 기근, 적신이나 위험, 혹은 칼이 몰려와도 그것들이 우리의 믿음을 최종적으로 파괴할 수는 없다. 비록 현장감 있는 고통과 시련을 겪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하시며,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서 간구하신다는 진리가 약화되거나 삭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랑 때문에, 때로 고난은 더 깊은 은혜 체험의 장이 되고, 약함은 강함이 되며,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변한다. 이처럼 로마서 8장 28-39절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의 확신과 ‘예지예정’의 은혜, 성도의 견인, 그리고 결국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언약의 견고함을 설파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로마서 8장의 강해를 마무리하며, 다시 한 번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이라는 키워드를 상기시킨다. 우리의 삶은 때로 성취와 실패, 기쁨과 슬픔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초월적 관점에서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완성된다. 이 완성의 그림은 아직 우리가 다 보지 못하나, 결국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고 많은 형제 중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속해 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루는 능력은 전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에게서 나오기에, 어떤 세력도 이를 무너뜨릴 수 없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험난하고 때로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신앙인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의지하며,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감사와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다. 로마서 8장 28-39절은 바로 그 비밀을 우리에게 찬란하게 보여주는 복된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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