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 고린도전서 2장 강해: 세상의 지혜를 넘는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능력

장재형(장다윗)목사는 고린도전서 2장을 펼치며 편지가 단순한 교리의 나열이 아니라 필자의 인격과 심성이 배어 있는 살아 있는 고백임을 먼저 일깨운다. 그의 눈으로 본 바울은, 웅변과 철학의 도시 고린도 한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붙들고 서 있던 한 사람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라는 짧은 문장에도 1년 6개월을 함께 지낸 공동체의 냄새와 체온이 스며 있다. 시장에서 장막을 깁고,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말씀을 풀며, 기도와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사도의 일상이 그 안에 있다. 그 증인들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고 단정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고백을 당대의 미학과 철학을 능히 구사할 수 있었던 바울이 의도적으로 내려놓은 결단으로 읽는다. 세상이 환호하는 수사(修辭)로 복음을 포장하지 않겠다는 신학적, 영적 선택 말이다.

고린도는 말이 힘이던 도시였다. 광장에는 변론가들이 늘어서고, 억양과 논증의 정교함이 곧 권위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 흐름과 어긋나는 자리에서 복음을 전한다.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렘 9:23)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가슴에 새긴 채, 가말리엘 문하에서 익힌 지식과 수사학을 내려놓고, 빛 자체이신 복음을 있는 그대로 비추려 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복음의 ‘순도’라는 관점을 꺼내 든다. 빛은 자체로 아름답다. 그 빛을 더 빛나게 하겠다며 거는 필터와 장식이 오히려 굴절을 만든다.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사 1:22)라는 탄식처럼, 복음에 불순물이 섞이는 순간 생명력은 희미해진다. 교양과 스토리텔링, 문화적 도구는 유익할 수 있지만, 그릇이 너무 화려하면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경계다. 장재형목사는 강단과 성도의 언어가 이 근본적 긴장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그래서 바울의 중심은 놀라우리만큼 단순하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장재형목사는 이 한 줄을 복음의 두 기둥으로 해석한다. 한 기둥은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 다른 기둥은 역사적 사건인 십자가. 인격 없는 사건은 차가운 사실로 남고, 사건 없는 인격은 추상적 도덕으로 흩어진다. 바울은 둘을 함께 선포했다. 오랜 시간의 가르침도, 골목과 집회와 식탁에서 오간 대화도 결국 이 두 축 위에 놓였다. 장재형목사는 이 단순함을 얕음이 아니라 밀도의 다른 이름으로 본다. 본질만을 붙드는 절제, 말씀 자체에 길을 내어 주는 용기다. 빌리 그레이엄이 “설교에 가능한 한 많은 성경을 담는다”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말씀은 때로 우리 죄를 드러내고 회개의 통증을 가져오지만, 그 쓴 약만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린다. 목회와 선교의 비밀은 놀랍도록 단순한 이 중심으로,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

바울은 또한 자신의 내면을 숨기지 않는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장재형목사는 이를 패배감이나 사역 실패의 공포로 읽지 않는다. 전능하신 분의 임재 앞에서, 복음의 무게를 어깨에 올려놓을 때 인간이 느끼는 거룩한 떨림, 곧 경외에서 비롯한 떨림이라 말한다. 자기 무력의 인식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 떨림은 의존의 문을 연다. 기억력과 화술, 경험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고전 2:4)에 자신을 내맡기는 자세다. 여기서 “약함 속의 강함”이라는 역설이 드러난다. 스스로의 힘을 믿다가 무너진 베드로가 부활의 주님 앞에서 약함을 인정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자 반석 같은 증인이 되었듯, 바울의 떨림 또한 의존을 통해 견고함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그의 전도는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 아니라 성령이 낳은 확신으로 세워졌다. 믿음의 기초가 사람의 지혜 위에 놓이지 않도록, 오직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워지도록 방향을 정한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오늘의 교회 역시 이 방향을 재확인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스펙타클과 감정의 파도에 중독되기보다, 말씀과 성령의 일치에서 나오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확신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2장은 이어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지혜”(고전 2:7)를 증언한다. 시대의 통치자들도 몰랐던 비밀, 만세 전부터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해진 뜻. 장재형목사는 이 지혜의 절정을 십자가에서 본다. 만약 권세자들이 이 비밀의 구조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나님은 세상이 어리석다 여기는 방식으로 지혜를 드러내신다. 약함처럼 보이는 죽음이 능력의 문을 열고, 저주의 나무가 축복의 통로가 되며, 패배처럼 보이는 처형이 승리의 깃발로 높이 선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고전 2:9)이 예비되었다는 선언은 인간 이성의 경계를 분명히 긋는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 소멸될 운명이던 우리를 위해 독생자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지혜의 결정체다. 교회는 여기서 겸손을 배운다. 우리는 진리를 생산하는 공장이 아니라 은혜를 받아 적는 서기관이다. 만들어내기보다 듣고, 소유하기보다 순종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 이성과 감각으로는 닿을 수 없는 이 비밀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바울의 답은 명료하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니라”(고전 2:10). 사람의 깊은 것을 아는 이는 그 사람의 영이듯,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장재형목사는 성령을 단지 열정의 불꽃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의 언어로 번역해 주시는 내적 교사이자, 감추인 진리를 비추는 조명의 영이다. 그러므로 신령한 분별은 공부의 양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배움은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를 만드는 것은 성령의 조명이다. 말씀을 펴고, 설교를 준비하고,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먼저 무릎을 꿇고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일상의 사소한 선택들—가정에서의 대화, 직장에서의 정직, 공동체 섬김의 방식—이야말로 성령의 인도를 훈련하는 자리라고 강조한다. 작은 순간들의 순종이 쌓여 위기의 때에 올바른 결단을 가능케 한다.

성령의 조명이 부재할 때 일어나는 일도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성령의 비춤이 없는 이에게 십자가는 그저 무력한 죽음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거듭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며 그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본다. 세상의 지혜로 말씀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진리로 세상을 판단한다. 그리고 결국 바울은 담대히 선포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사랑과 거룩, 겸손과 순종, 진리와 자비가 조화된 마음으로 설명한다. 사랑만 강조하면 진리가 흐려지고, 진리만 내세우면 자비가 메말라 간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이 둘을 분리하지 않는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고, 악을 거절하되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 그 마음을 품을 때 교회의 언어는 따뜻하면서도 명확해지고, 성도의 일상은 복음의 향기로 변한다.

장재형목사는 전도를 프로그램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본다. 복음이 깊이 스며들면 우리는 자연스레 말하고 사랑한다. 논쟁에서 상대를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성령께서 마음의 문을 여시도록 기도하며 부드럽고도 분명하게 진리를 전하는 태도가 중심이 된다. 만남 전에도, 대화 중에도, 헤어진 뒤에도 우리는 이름을 불러 기도한다. 설득은 문을 두드릴 뿐, 성령만이 문을 여신다. 그래서 전도의 자세란 곧 의존의 자세다. 이러한 길 위에서 교회는 먼저 ‘성장’이 아니라 ‘성숙’을 경험한다. 성숙한 성도는 세상의 지혜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상처를 보면 그 위에 흘러야 할 은혜를 보고, 어둠을 보면 비춰야 할 빛을 본다.

오늘의 강단은 종종 스펙타클의 유혹과 마주한다. 화려한 무대와 즉각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장치들은 나쁘지 않지만, 본질을 가릴 위험을 품는다. 장재형목사는 문화를 배척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도구와 본질의 자리를 바르게 정렬하라고 권한다. 그릇은 내용보다 앞서지 말아야 한다. 설교자는 무엇보다 본문에 머물러야 한다. 매주 선포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성도는 말씀을 평가의 대상으로 소비하지 말고 순종의 자리로 가져가야 한다. 말씀이 삶을 관통할 때 신령한 분별은 지식의 데이터가 아니라 체온이 된다. 그때 가정에서 자녀를 대하는 방식, 직장에서 윤리적 결정을 내리는 기준,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실천하게 된다.

결국 물음은 하나로 수렴된다. 오늘 우리의 설교와 사역과 대화와 선택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가 있는가. 우리의 믿음은 사람의 지혜 위에 놓여 있는가,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서 있는가. 장재형목사는 회피하지 말고 거룩한 자기 점검으로 나아가자고 권한다. 본질을 붙들고, 성령을 의지하며, 순수한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연습을 오늘도 다시 시작하자. 약함을 두려워하지 말고 떨림을 숨기지 말며, 그 자리를 성령께 내어 드리자. 그러면 하나님은 그 약함 위에 능력을, 그 떨림 위에 평강을, 그 단순함 위에 깊은 지혜를 더하실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담대히 고백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그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진리를 선포하며, 한 영혼을 품는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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