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 장재형(장다윗)목사

1. 사랑의 하나님과 거룩의 전제

장재형(장다윗)목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라는 본질적 메시지를 강조한다. 이는 요한일서 4장 8절에 기록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구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인간이 그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매우 깊고도 넓은 주제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진리는 단순히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성도들이 신앙 안에서 반드시 체득해야 할 ‘본질’에 해당한다. 이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성경이 제시하는 핵심적 전제가 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우리와 거룩의 관계’를 아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사랑의 하나님을 언급하며, 동시에 그 사랑에 필연적으로 전제된 것이 바로 ‘거룩’임을 강조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구절에 마음이 끌리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메시지는 간과하기 쉽다. 사랑을 말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사랑이 거룩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단지 ‘사랑하기 좋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분은 전능자요, 동시에 전적으로 다른 분이시다. 구약 성경에서 모세가 미디안 광야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 3장 5절)고 명령하신 장면이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옛것’을 벗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구별되게 서야 한다. 떨기나무 에피소드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형상화된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셨던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일반적으로 구약의 인물들이 만난 것은 ‘하나님의 사자들’이었지, 하나님의 실체적 현현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세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그 하나님의 형상 같은 모습을 가장 뚜렷하게 체험했다. 그리고 거기서 첫 번째 명제를 배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거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룩은 ‘전적으로 다르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의 생각과 길과 다르다(이사야 55장8절).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분이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시는 초월자이자 창조주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셨을 뿐 아니라 보존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분을 향해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은 그분이 인간에게 “내가 너희를 지었으니 내게 순종하라” 하고 억압적인 요구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분명한 관계 속에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예배적 행위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함이 없으면 로마서 1장에 나타난 죄인들의 전철을 밟게 된다”라고 설명한다. 로마서 1장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며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인간의 타락상을 보여준다. 그 결과는 영벌, 즉 지옥이다. 바울은 이것을 “핑계할 수 없다”(롬 1장 20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계에 대한 증거를 분명히 남겨놓으셨기 때문이다. 자연 만물과 인간의 양심은 물론,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분명한 당위를 깨달을 수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등을 돌리면 심판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어떻게 양립하는가?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동시에 거룩하시다는 것은 전혀 모순이 없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almighty God)인 동시에 기다리시는 분, 곧 어떤 면에서는 ‘powerless God’처럼 보이기도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역사 속에 들어오실 때는 인간에게 강권적으로 무엇인가를 강요하기보다, 인격적인 초청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도록 허용하신다. 바로 그 점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면서 ‘무력해 보이시는 하나님’이라는 양극적 표현이 성립된다. 전능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동시에 인간을 기다리시고 인내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인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거룩과 사랑은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사랑을 바로 이해하려면 먼저 거룩의 전제를 이해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즉, 거룩함 없는 사랑은 방종과 퇴폐로 이어지기 쉽고, 사랑 없는 거룩함은 율법적인 금욕주의나 형식주의로 흐르기 쉽다.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거룩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신약시대에 이르러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골로새서 1장 15절)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인간이 그토록 알고 싶어 하던 하나님의 ‘사랑’이 결정적으로 계시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자 “동일본질”을 지니신 분이시다. 삼위일체 교리 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시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9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신약성도들의 특권인 셈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태복음 6장 9절~10절)”라는 주기도문의 서두는, 바로 이 거룩하신 하나님이 동시에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선포한다. 이는 하나님의 높은 위엄(Transcendence)과 친밀성(Immanence)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하나님은 초월해 계시지만, 또한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아버지로 다가오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요,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기에 우리가 감히“아빠 아버지”(로마서 8장 15절)라고 부르는 특권을 누린다. 그렇기에 장재형목사는 “사랑의 하나님은 곧 거룩의 하나님”이라는 그 전제에 기초하여, 성도들이 점점 더 하나님 앞에 구별된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한다. 세상 속에서 거룩한 생각, 거룩한 행동, 거룩한 말과 태도를 지님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거룩의 자리’가 견고해질 때,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온전히 맺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요컨대,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고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그 거룩을 깨닫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2.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는 사랑의 관계

장재형목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부르면서, 사랑의 궁극적 모습이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 13장 12절)라는 구절에 응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장차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고, 그분과 직접적인 사귐으로 들어가게 될 날이 온다고 선포한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희미하게 볼 뿐이나, ‘그 때’가 되면 완전히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아는 것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결국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신앙의 깊은 교제”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며 궁극적 목적이다.

장재형목사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볼 정도로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이 신앙의 지향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을 안다”라고 할 때, 지식적인 차원에서의 앎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이 부딪히는 관계적 앎이 필요하다. 그것이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부분과도 연결된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완전한 사랑을 누리셨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라는 극심한 고난을 견뎌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안에도 흘러들어오길 원하신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장 34절)는 새 계명을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이 그 사랑을 이웃에게도 전하고 실천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는 관계’라는 표현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체험하는 삶을 말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나셨고, 성막과 성전을 통해 임재하셨듯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성전 자체로 오시고, 또 승천 후에 보내신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는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묻는다. 하나님의 임재란, 그저 교회 건물 안에서만 느껴지는 제도적 종교 활동이 아니라,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아주 역동적이고 실존적인 사실이다. 그래서 성도는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바라볼 수 있다. 기도를 할 때는 하나님께 말하고, 말씀을 읽을 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렇게 매일의 삶에서 소통하는 관계가 바로 ‘인격적인 만남’이며,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본질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이라고 말한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어 대화하는 사람인가? 혹은 종교적 형식에 갇혀 의무감으로만 기도하고 예배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강제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진실한 교감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고백할 때, 그 고백은 생생한 관계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하루를 시작할 때, 길을 걸을 때, 밥을 먹을 때,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언제든지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 기도하고 대화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특권이다. 세상에 다른 종교나 명상법도 있지만, 그곳에는 분명한 기도의 대상이 없다. 그들이 말하는 ‘관상’이나 ‘묵상’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거나 우주적 에너지를 느끼는 것일 수 있지만, 기독교 기도는 ‘전능하신 분’이자 ‘사랑의 아버지’께 말을 건네는 인격적 교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참으로 독특하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주기도문의 첫 구절은, 기도에는 분명한 대상이 있다고 선언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시고,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시며, 동시에 내가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을 만큼 가까우신 분이 바로 그 대상이다. 그래서 작은 기도에도 응답하시고, 우리의 사소한 바람과 염려까지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부모가 자녀의 말을 소홀히 듣지 않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언어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신다. 이 점에서 기독교의 기도는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위로와 능력의 통로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라는 문구를 자주 예로 들며,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하는 가장 분명한 행동”이라고 역설한다. 실제로 성경 속 인물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하나님은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으시며, 다만 가장 선한 때와 방식으로 응답하신다. 어떤 응답은 금방 나타나고, 어떤 응답은 긴 세월이 지난 뒤에야 나타나기도 하지만, 결코 헛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룩’과 ‘얼굴을 맞대는 친밀함’은 서로 결합되어야 한다. 거룩을 상실하고, 하나님을 그저 만만한 분으로 취급한다면, 참된 경외심 없이 기도하게 된다. 또 하나님과 친밀하지 않다면, 그분을 ‘두려운 심판자’로만 여기고 멀리 도망치게 될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두 극단을 경계하며, “거룩하신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라는 균형 잡힌 하나님 이해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고린도전서 13장에 드러나는 사랑의 정수이며, 요한일서 4장에 나타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내포한 은혜이기도 하다. 그분의 사랑이 먼저 임했기에 우리가 그 사랑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3. 주기도문의 핵심 –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나라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 9절부터 13절, 그리고 누가복음 11장 2절부터 4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으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원형적 기도문’으로 여겨진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새해 첫 주일예배에서 “금년 한 해 수없이 반복될 주기도문을 ‘정말 깊이 묵상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기도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세 가지 간구—“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성도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압축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첫 번째 간구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도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그분은 결코 세상적인 의미의 아버지와 동일시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시고, 엘로힘이시고, 아도나이이시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God)’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매우 일반적인 호칭이고, 더 본질적으로는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고유성을 담아내지 못하기 쉽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라”는 기도를 가르치셨다. 이름은 곧 인격과 명예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일컫지 말라”(출 20장 7절)는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조롱하는 말을 쉽게 뱉는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우상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심각한 죄가 된다.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은, 곧 그분의 인격과 권위를 지극히 존중하는 것이다. 그 존중과 경외심이 예배와 찬양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며, 또 삶 속의 순종과 감사로 이어진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 덧붙여, “우리가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살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된다”고 말한다. 예수 믿는 이들이 교회 밖에서 싸우고 분열하고 비리를 저지르면, 세상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 이름”까지 비웃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은 곧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이름이 드러나도록 하는 거룩의 책임이기도 하다.

두 번째 간구인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주기도문의 중심사상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늘나라”였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장 17절)라고 선포하셨고, 곳곳에서 비유를 통해 그 나라가 어떻게 임하는지 가르쳐주셨다. 주기도문에서도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명확히 간구하게 함으로써, 성도들의 기도와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에 맞춰져야 함을 일깨우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죽어서 가는 ‘내세 천국’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미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통치”, 곧 “왕 되신 하나님의 다스림”이 깃들어 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희망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장 20절~21절)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을 통해 이미 우리 마음속에 임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요한계시록 11장 15절)라는 궁극적 완성도 기다리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중적 의미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개인의 구원과 삶의 성결을 통해 “나라가 이미 임한 모습”을 살아내야 하며, 한편으로는 “주의 재림”과 함께 완전히 임할 ‘하나님의 왕국’을 소망해야 한다.

세 번째 간구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이 땅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구현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져 있다. 천사들이 순종하며, 죄나 불의가 일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고백은, 우리 현실의 불완전함과 모순, 죄와 고통이 가득한 환경 안에서도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펼쳐지길 바라는 성도의 간절한 소망을 반영한다. 아모스 5장 24절에서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했던 예언자적 절규와도 맥을 같이한다. 세상은 불의와 부정으로 가득 차 있고, 정치적·사회적·개인적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질서와 반대되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성도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고, 또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6장 33절). 바로 이 ‘의로움’이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단지 머리로만 이해되는 교리가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지침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내가 오늘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쳐내는 삶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일예배에서 이 기도를 한 번 낭송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매일의 삶에서 되새길 때, 성도는 기도와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가르침은 단순한 암송 과제가 아니라, 신앙 여정의 등대 역할을 한다.

장재형목사는 끝으로, 로마서 8장 26절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기도는 인간의 한계 속에서 절박하게 도전받을 때도 있지만, 주님이 분명히 “이렇게 기도하라”고 친히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이 있으니, 그것을 반복하여 묵상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기도의 가르침 속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거룩하며, 동시에 얼마나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인지 깨닫게 된다. 또한 그분이 이 땅에 어떤 나라를 이루길 원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 뜻을 분별하고 동참할 것인지를 배우게 된다. 그렇게 주기도문은 신앙인의 삶을 하나님께로 맞추고, 이 세상의 탐욕과 불안, 죄와 불의로부터 벗어나도록 돕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하기 위해 살고, 그분의 나라가 임하도록 헌신하며, 그분의 뜻이 이 땅에 펼쳐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 목적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목적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방황하고 허무해지며 죄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 목적이 분명해지면,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재물, 명예, 쾌락, 인간관계—등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받은 선물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받을 재료가 된다. 더 이상 그것들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고 우리가 그것들의 노예가 될 필요도 없다. 이처럼 인생관이 바뀌면, 궁극적으로는 삶의 행복과 안식이 찾아온다. 그 안식은 “하늘 아버지의 계획 아래 내가 존재하고, 그분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며, 결국 그분 품으로 돌아간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평안이다.

정리하자면,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주기도문의 핵심 사상은 크게 세 부분으로 집약된다.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기억하며, 그분께 경배와 감사, 순종을 드려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구하라는 것이다. 이 나라는 이미 예수님을 통해 시작되었지만, 재림을 통해 완성될 미래적 왕국이기도 하다. 셋째,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뤄지도록 기도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결국 복을 받을 것이고, 그 정의와 공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세상이 곧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이 땅만이 전부가 아니라, “저 세상(영원)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움직이지만, 동시에 이 땅의 현실에서도 ‘하나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애쓴다. 이런 신앙고백이 바로 주기도문에 담겨 있다.

결국, 새해 첫 주일예배의 메시지에서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왜 사느냐?”라는 근본적 물음에 대한 답을 주기도문을 통해 제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께 감사하기 위해 산다. 나아가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며, 하늘에서 이미 완성된 거룩한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노력한다. 그렇게 살 때,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단순하고도 직설적인 결론이 단지 두려움의 논리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복음으로 다가온다. 죽음 너머 영원한 심판이 있음을 깨닫고, 그 심판에서 건져주시는 구원의 은혜가 ‘예수님 안에 있음’을 안다면, 그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구원의 메시지는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냐”라는 문구를 실감하며, 매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어 보고, 거룩과 사랑이 가득한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해야 한다.

이처럼 성도들이 새해를 맞아 주기도문의 기본 정신에 충실하게 된다면, 개인의 영혼의 만족과 더불어 교회 공동체 안에 진정한 연합이 이뤄지고,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며, 그분의 나라가 실제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만천하에 선포할 수 있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을 아는 자들이 마땅히 달려가야 할 길”이라고 말한다. 주님 안에서 이제 막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이 때, 우리의 기도가 주기도문의 핵심을 품고 있느냐를 되돌아보고, 마음을 다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는 자리까지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님이 이미 약속하신 능력과 응답을 풍성히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곳에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생동하는 역사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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