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구의 고전 성화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향유 옥합을 든 여인의 모습은 대개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오직 주님의 발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적인 장면이 뿜어내는 영적 파동은 수 세기를 지나 오늘날 우리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토록 소중한 것을 단번에 깨뜨리게 했는가? 왜 그녀는 남김없이 쏟아부어야만 했는가?”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는 이 침묵의 헌신 속에 기독교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정수, 즉 **’복음’**이 맥동하고 있다고 역설합니다. 여인이 옥합을 깨뜨린 행위는 단순한 미담이 아니라, 장차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미리 보여주는 거룩한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1. 효율의 논리를 뒤엎는 사랑의 파격
마태복음 26장의 배경은 긴장감으로 가득합니다. 한 여인이 지극히 귀한 향유를 가지고 나아와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순간, 그 장소에 모여 있던 이들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특히 제자들은 이를 ‘낭비’라고 규정하며 불쾌감을 드러냈습니다.
- 세상의 잣대: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이들을 구제했다면 얼마나 유익했겠는가?”라는 제자들의 항변은 매우 합리적이고 정의로워 보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효율성’과 ‘사회적 가치’의 언어와도 닮아 있습니다.
- 주님의 시선: 그러나 예수님은 이성적인 계산기를 두드리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여인을 옹호하셨습니다. “그녀는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는 주님의 선언은, 복음의 가치가 인간의 산술적 계산을 넘어선 곳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대목에서 복음의 심연이 열린다고 강조합니다. 복음은 ‘계산’이 멈춘 곳에서 비로소 ‘계시’로 다가옵니다.
2. 십자가, 하나님이 자신을 깨뜨리신 사건
왜 이 여인의 행위가 복음 그 자체가 될까요? 복음의 핵심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낸 업적에 있지 않습니다. 반대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먼저 비천한 죄인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 자기 비움(Kenosis):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쏟아내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창조주가 피조물의 손에 죽는 것은 가장 비효율적이고 어리석은 ‘자기 파괴’처럼 보입니다.
- 복구 불가능한 헌신: 옥합은 한 번 깨지면 다시 붙일 수 없고, 쏟아진 향유는 다시 병에 담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 또한 그러했습니다. 적당히 나누어준 것이 아니라,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전적인 투여를 하신 것입니다. 올리벳대학교의 신학적 묵상이 주목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입니다. 이 여인의 행위는 십자가라는 ‘거룩한 낭비’를 온몸으로 비추어낸 거울이었습니다.
3. 은전의 소리와 향유의 향기: 두 영혼의 갈림길
이 본문이 더욱 처연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여인의 헌신 바로 뒤에 유다의 배반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두 인물을 대조하며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 여인의 옥합: 사랑을 발견한 자는 가장 귀한 것을 깨뜨려 드렸습니다. 그녀에게 주님은 온 세상보다 귀한 분이었습니다.
- 유다의 은전: 사랑을 ‘허비’로 여긴 자는 가장 귀한 분을 은 30에 팔아넘겼습니다. 그에게 주님은 자신의 야망을 채워줄 도구이거나, 가성비가 떨어지면 처분해야 할 상품에 불과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신앙의 성패가 결국 ‘사랑을 대하는 태도’에서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주님 곁에서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내 영혼을 적시는 ‘은혜’가 되었느냐는 점입니다. 복음을 머리로만 이해하면 계산기가 남고, 복음을 가슴으로 영접하면 옥합을 깨뜨리는 모험이 시작됩니다.
4. 현대의 ‘실용주의 신앙’을 향한 경종
우리 또한 매일 이 두 사람 사이의 경계선 위에서 위태롭게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조차 ‘투자 대비 효율’을 따지는 순간, 우리는 유다의 길에 가까워집니다.
- 기도의 응답이라는 ‘결과’에만 매몰될 때, 순종보다는 ‘손익계산서’를 먼저 작성할 때, 우리는 옥합의 가치가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게 됩니다.
- 누군가의 눈물 어린 헌신을 보고 “적당히 좀 하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우리 마음에는 복음의 향기가 마른 것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역설을 가르칩니다. 사랑은 남는 자투리 시간을 내어주는 취미 생활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거룩한 허비’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도의 진정한 정체성은 바로 이 ‘어리석어 보일 만큼 깊은 사랑’ 안에서만 선명해집니다.
5. 사랑받은 자만이 옥합을 깰 수 있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는 우리에게 무거운 율법적 짐을 지우지 않습니다. 대신, 근원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대는 진정으로 사랑받았음을 확신하는가? 십자가가 여전히 그대의 심장을 뛰게 하는 복음인가?”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만이 자기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눌 수 있듯,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를 경험한 자만이 자신의 옥합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회개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너무나 익숙한 종교적 문장으로만 취급하며, 주님의 사랑을 효율의 언어로 난도질해 온 우리의 메마른 가슴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 지점에서 죽어있던 신학은 살아있는 묵상이 되고, 멀게만 느껴졌던 말씀은 가슴을 울리는 소망이 됩니다.
결론: 당신의 옥합은 어디에 있습니까?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가 복음인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방식—이유를 묻지 않고 자신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사랑—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이 ‘사랑의 낭비’를 이해하지 못해 멸망의 길로 갔지만, 여인은 이 사랑의 본질을 직감적으로 붙잡아 영생의 기록 속에 남았습니다.
우리는 매일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손해’로 볼 것인가, 아니면 내 존재를 바꿀 ‘생명의 향기’로 받을 것인가. 오늘 당신의 삶에서, 주님께 드리기 아까워 아직도 품속에 꼭 쥐고 있는 옥합은 무엇입니까?
그 옥합이 깨지는 순간, 당신의 삶에는 비로소 하늘의 향기가 진동하기 시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