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도 – 장재형목사

들어가며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는 여러 신학적 흐름과 영적 강조점이 공존한다. 이 가운데 장재형(장다윗목사) 목사는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개인 신앙과 교회 공동체 사역의 중심축으로 삼아, 복음이 실제 삶에서 구현되도록 돕는 사역을 펼쳐 왔다. 그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단순히 지식으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성령의 역사,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연합 등을 통해 삶 전반에서 드러나야 할 본질로 이해한다. 특히 그는 교회를 세상과 분리된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는 역동적인 공동체로 해석하면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실천적 방법을 제시한다. 이 글에서는 장재형 목사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그가 강조하는 제자도와 고난, 성령, 교회 공동체, 복음의 본질이라는 핵심 주제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신앙적 통찰과 적용점을 모색한다.

장재형 목사의 배경과 사역 개요

장재형 목사는 복음주의 신앙노선을 견지하는 한국 교회 목회자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면서도 현대 사회가 처한 복잡다단한 문제들에 대한 실천적 해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그는 교회가 예배와 교리를 지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 책임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세상에 복음의 영향력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말씀 중심 교육과 소그룹 운영, 국내외 선교, 그리고 제자훈련을 비롯한 여러 프로그램을 전개해 왔다. 그는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서도 복음을 살아 내도록 독려하며, 이를 위해 서로 돌보고 나누는 공동체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학문적·신학적 토대를 바탕으로 복음주의 전통을 현대화하려고 노력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온 인류에 미친 유일한 대속의 은혜로 보고, 복음 안에서 교단과 교파의 벽을 넘어선 에큐메니컬 협력을 추구한다. 이를 위해 교회가 본질적 복음에 합의하면서도, 서로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여 연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이러한 태도는 지역사회와의 협력, 교회연합운동 등으로 구체화되며, 다양한 사역 형태를 통해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에게도 복음의 손길을 전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뒷받침한다.

장재형 목사의 핵심 키워드

장재형 목사가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주제는 그리스도의 제자도이며, 그 외에도 고난, 성령의 내주하심, 교회의 본질과 사명, 그리고 복음의 실천적 삶이라는 핵심 영역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다. 그는 복음이 제자도를 통해 실천되며, 성령의 능력이 그 제자도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고난을 통해 제자들이 더욱 성숙해진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그 제자들이 함께 모여 서로 돕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공동체이며, 복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체화되고 전파되어야 할 메시지라는 것이 그의 일관된 견해다.

그리스도의 제자도

장재형 목사는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단순한 신학적·교리적 개념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구현되어야 할 헌신의 여정으로 간주한다. 그는 제자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근본적인 태도이며,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삶을 통해 진정한 영적 성장과 열매가 맺힌다고 설명한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명하신 본문을 자주 인용하면서, 이것이 제자도의 본질을 예리하게 보여 준다고 역설한다. 그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마태복음 28장의 지상명령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믿으며,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바로 이 대사명을 실천하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제자훈련을 위해 교회 내에서 말씀 묵상과 기도를 꾸준히 장려하며, 성도들이 말씀을 생활화하도록 돕는다. 소그룹 혹은 셀 단위로 모여 삶을 나누고 말씀을 적용하는 경험을 통해, 교인들은 피상적 신앙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영적 성장에 이른다. 그는 제자도의 여정이 결코 쉽지 않은 길임을 인정하면서도, 이 길을 함께 걸어갈 때 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부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제자도가 한 개인의 ‘신앙 프로그램’이나 ‘수료 증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늘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제자도의 목표라고 말한다. 그는 제자도가 교회 내 작은 모임과 예배, 봉사, 전도, 선교 등 다양한 활동 속에서 살아 움직일 때 교회 공동체가 더욱 견고해진다고 지적한다.

그는 제자도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올바른 신학 교육과 균형 잡힌 교리 해석이 중요하다고 본다. 교회가 잘못된 교리나 극단적 열정에 치우칠 경우, 제자도는 율법주의나 집단주의에 빠져 건강한 신앙 성숙 대신 갈등과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제자도가 단순한 행위주의나 성과주의로 변질되지 않도록, 말씀과 은혜에 근거한 바른 동기 부여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는 진정한 제자도가 개인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온전히 세우며,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통로가 된다고 확신한다.

고난과 영적 성숙

장재형 목사는 고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연적으로 수반된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사도들과 예수님의 삶을 보면, 고난과 영광은 분리되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고난을 통해 인간의 교만이 꺾이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갖추게 되며, 결국 더욱 깊은 신앙을 경험하게 된다고 본다. 야고보서 1장에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권면이 있듯이, 고난은 인내와 영적 성숙을 이끌어 내는 통로라는 해석이다.

그는 교회 공동체가 서로의 고난을 함께 지고 기도하며, 실제로 필요한 도움을 주는 과정을 통해 교회가 더 단단해진다고 설명한다. 욥기에서 욥이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던 모습이나,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안고도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자 속에서 온전해진다고 고백한 장면을 자주 예로 든다. 이 두 인물은 고난을 ‘믿음의 시험이자 성장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결국 하나님의 더 큰 은혜와 능력을 경험했다. 그는 이 점이 현대 신자들에게도 큰 도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신자들이 고난을 단순히 피해 가야 할 불행이나 징벌로 받아들이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자신을 낮추고 더욱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태도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연단을 겪고, 그 과정을 통해 인격적·영적 성숙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교회 내에서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무관심하게 방치해서는 안 되며, 서로 돌아보고 실제적인 도움과 기도를 제공할 때, 교회는 한 몸으로 더욱 결속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교회가 섬김 문화를 형성하고, 사회적 약자나 소외된 계층을 위한 봉사나 구제 활동을 중시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역사

장재형 목사는 성령이 제자도를 실제로 작동하게 하는 동력이라고 본다. 그는 성령이 교리적 설명에 머무는 분이 아니라, 개개인의 삶과 교회 공동체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능력의 원천이라고 강조한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사도행전 2장)이 초대교회의 시작을 알렸듯이, 오늘날 교회가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성령 충만은 일시적 감정 폭발이나 집회에서의 열광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대신,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토대로 삶의 자리에서 거룩과 순종을 실천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에베소서 5장에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근거로, 성령 충만은 매일의 삶에서 감사와 예배, 사랑의 섬김으로 표현되어야 하며, 갈라디아서 5장에 언급된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본다.

그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에 대해서도 강조하면서, 모든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는 본질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정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반대로 은사의 가치를 경시하여 교회가 서로 분열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성령의 인도는 개인적 체험을 넘어, 교회를 하나로 묶어 주고, 세상에 대한 사명을 확장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다.

교회 공동체와 사명

장재형 목사는 교회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구체화하는 공동체로 이해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유기적 몸이므로, 서로 다른 지체들이 협력하여 하나님 나라의 사명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에베소서 1장과 4장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몸 개념이나,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 모습을 통해, 교회가 서로 사랑과 나눔, 기도와 말씀,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열정으로 충만했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교회가 세상과 단절된 신앙 공동체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초대교회가 재산과 소유를 서로 통용하고 이웃을 섬겼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교회가 지역사회와 세계를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는 구제와 봉사, 사회적 약자를 향한 섬김으로 복음의 가치를 실천해야 하며, 이를 통해 교회가 단순히 모이는 장소에 그치지 않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펼치는 움직이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에베소서 4장에 기록된 여러 직분(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을 교회가 잘 구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직분들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봉사와 섬김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므로, 교회가 이를 효과적으로 개발해 나간다면 건강한 리더십과 조직 구조를 통해 보다 체계적인 제자 양성과 복음 전파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그는 교회가 서로 다른 은사와 재능을 가진 이들을 존중하고 협력하도록 장려해야 하며, 교회 내부의 다툼이나 파벌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는 교회 간 연합의 중요성도 역설한다.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세를 과시하거나 교파 간 갈등을 벌이기보다는, 복음 안에서 하나 되는 연합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지역사회 복음화와 해외 선교가 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보다 충실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복음의 본질과 실천적 삶

장재형 목사는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하는 구원의 소식임을 분명히 강조한다. 인간이 죄로 인해 영원한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죄 값을 지불하셨고 부활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으므로, 이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복음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 체현해야 진정한 믿음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야고보서 2장에 등장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문장을 즐겨 언급하며,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기준에 따르려 노력하는 삶이 바로 복음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이웃 사랑과 정의, 나눔과 용서 등 예수님이 몸소 보여 주신 삶의 태도를 일상에서 구현하는 것이며, 교회 밖에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복음이 궁극적으로 개인 구원을 넘어 세상 변혁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교회가 복음으로 무장하고 사회적 불의와 약자를 돌보는 일에 앞장설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체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복음이 세상 끝까지 전해져야 할 대사명인 동시에, 현재 삶의 자리에서 실현되어야 할 일상의 가치라고 설명한다. 교회가 단순한 ‘구원 클럽’이 아닌, 세상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데에는 이러한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종합적 결론: 제자도의 길

장재형 목사의 가르침을 통틀어 가장 핵심이 되는 주제는 그리스도의 제자도다. 제자도가 모든 영역을 아우르며, 복음의 핵심을 현실화하고, 성령의 능력을 실천하게 만들며, 고난을 통해 영적 성숙을 이끌어 내고, 교회를 하나 되게 하여 세상 속에서 복음을 드러나게 하는 구심점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이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해야 하고, 그 명령이 곧 교회의 존재 이유라는 사실을 거듭 상기시킨다.

그는 제자도가 결코 쉬운 길이 아님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모든 신자는 이 길에 서야만 진정한 의미의 신앙적 성장과 공동체적 성숙을 맛본다고 말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은 고난과 시련을 동반하지만, 성령의 내주하심과 교회 공동체의 도움을 통해 그 고난이 풍성한 열매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자도는 따라서 나 홀로 사는 신앙이 아니라, 교회라는 몸 안에서 함께 성장하고 서로를 돌보며, 또 세상으로 파송되어 복음을 전파하는 열린 구조로 이해된다.

신학적 기여와 현대 교회적 의의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는 현대 교회가 직면한 세속화, 개인주의, 물질만능주의 등의 도전에 대한 한 가지 유효한 해답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제자도와 고난, 성령, 교회 공동체, 그리고 복음의 실제적 적용을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써, 교회가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돕는다. 그는 교회를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는 모습으로 세우고, 성도 각자가 교회의 본질을 구현하는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되새긴다.

그의 가르침은 한국 교회를 넘어 세계 교회도 함께 고민해야 할 제자도 회복의 길을 제시한다. 많은 교회가 프로그램과 행사 중심의 성장 방식에서 탈피해, 본질적인 복음과 제자도에 초점을 맞추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장재형 목사의 제자도 중심 목회는 이러한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그는 교리적이며 영적 체험을 중시하되, 행함으로 이어지는 실제 신앙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교회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실천적 모델이 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성경 구절과 예화

그리스도의 제자도와 관련하여, 그는 마태복음 28장의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말씀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이는 교회가 추구해야 할 절대적 목표이자, 모든 사역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제자도가 헌신과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는 본문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다.

고난과 인내를 예화로 설명할 때는 욥기와 바울의 ‘육체의 가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욥은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버리지 않았고,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것이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그 과정을 통해 영적 성숙에 이르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한다.

교회 공동체와 성령의 역사와 관련해서는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핵심 본문으로 제시한다.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각기 다른 언어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회심자가 나타나며 초대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는 초대교회의 기적적 성장 배후에는 성령의 역사와 함께, 말씀과 기도, 나눔과 사랑이 어우러진 ‘코이노니아’의 삶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실천적 제안과 적용

장재형 목사의 가르침은 개인 신앙생활, 교회 공동체, 그리고 지도자 양성이라는 세 영역 모두에 두루 적용할 수 있다. 그는 개인이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려고 고민하는 과정을 소중히 여긴다. 기도 역시 자기 문제만을 위한 간구가 아니라, 교회와 이웃, 더 나아가 나라와 민족, 세계를 위한 중보 기도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본다.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는 소그룹 활성화를 핵심 전략으로 삼는다. 소그룹을 통해 교인들이 서로의 삶과 신앙을 나누고, 말씀과 기도에 더욱 밀착할 수 있으며, 실제적인 돌봄과 봉사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교회는 연령과 상황에 따라 다른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 새신자나 청년, 직장인 등이 각각 제자도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선교와 구제, 봉사 프로젝트 등 교회가 함께할 수 있는 실천적 활동을 마련해, 제자도로 훈련받은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세상 속에서 복음적 삶을 실천하도록 이끈다.

지도자 양성 영역에서는 목회자뿐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에게도 비전을 부여한다. 교회 안팎의 여러 사역을 감당하고, 성도들을 돌보며, 지역사회를 복음으로 섬기는 과정에서 다양한 리더십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그는 건강한 리더십을 세우기 위해 정기적인 수련회와 멘토링 체계를 구축하여, 말씀과 기도로 무장된 리더들이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격려한다. 이를 통해 교회는 제자도를 보다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인적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마무리: 실천하는 복음으로의 초대

장재형 목사는 복음이 지식이나 교리로만 머물지 않고, 실제 행동과 태도로 이어지는 길을 ‘제자도’라고 부른다. 그는 이 제자도의 길에 성령의 능력과 교회의 연합이 더해질 때, 고난도 성도의 영적 성장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제자도를 통해 개인 신앙과 교회 공동체가 동시에 성숙해 가며, 그 결실로서 세상에 복음의 빛을 전하는 일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그는 초대교회의 역동적 모습을 언급하며, 교회가 그 본질적 DNA를 되찾을 때 세상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거창한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보다, 말씀과 기도에 충실하며 서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상의 작은 모임에서부터 진정한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부르심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일상적인 순종이다.

참고 및 정리 방식 안내

이 글은 장재형 목사의 주된 가르침과 설교, 그리고 복음주의 신앙 노선을 지지하는 한국 교회의 특성을 토대로 제자도, 고난, 성령, 교회 공동체, 복음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성경 인용은 주로 개역개정판을 기준으로 하되, 문맥에 맞추어 일부 구절은 요약하여 제시했다. 실제 교회 현장에서는 이 내용이 더욱 구체적이며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으니, 장재형 목사의 저서나 설교 자료, 영상 콘텐츠 등을 참고하면 보다 직접적인 이해를 얻게 될 것이다.

이 글에 담긴 모든 제안은 어디까지나 기본 원리에 대한 것이므로, 실제 적용 시에는 각 교회와 성도들의 상황과 필요를 고려해야 한다. 제자도는 교회마다, 그리고 성도 각자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지지만, 그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과정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 – 장재형목사

1.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 됨의 기초”

에베소서 4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은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라고 선포한다. 이는 교회가 왜 그리스도의몸으로서 하나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구절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본문을 해석하며, 교회가 다양한모습과 문화를 품고 있을지라도 그 근원이 오직 그리스도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몸이 하나라는선언은 단순히 조직이나 제도상의 통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영적·실질적으로 “연합”된다는본질을 보여준다.

이 연합은 외적인 형태나 특정 공동체만의 색깔을 주장하는 것과 다르다. 바울은 “성령이 하나”임을강조함으로써, 교회 내 모든 성도의 궁극적 출발점이 어디인지 분명히 한다. 우리가 교회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자체가 성령께서 각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이끄시고 그분의 몸 안에 들어오게 하셨음을 뜻한다. 그결과, 어느 누구도 교회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독점하거나 우위를 주장할 근거가 없고, 한 몸 안에서 함께성장하는 동등한 지체라는 본질을 받아들여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다는 이 개념이 다양성의 무시나 획일적 일치를 의미하지 않는다고설명한다. 오히려 서로 다른 은사와 사역을 조화롭게 엮어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를 이룬다는 점이 핵심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듯이 교회에도 다양한 지체가 있다”고 언급한 사상과도상통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통해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각자의 위치와 사명을 온전히 인정받고, 서로경쟁하기보다는 상호 의존함으로써 진정한 하나 됨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에베소서 4장 4~6절을 보면 몸·성령·소망·주·믿음·세례·하나님 등 일곱 가지 ‘하나 됨’의 근거가 제시된다. 몸이하나, 성령이 하나, 소망이 하나, 주가 하나, 믿음이 하나, 세례가 하나, 하나님이 하나. 바울은 이를 통해 교회가분열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그리고 본질적으로 하나의 공동체임을 설명한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이렇게분명한 기초를 제시했음에도, 교회는 여러 사소한 문제와 역사적·문화적 차이로 인해 분열을 반복해 왔다”고지적하면서, 오직 복음의 근본을 붙드는 것만이 참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교회가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해 피해야 할 위험 요소 중 하나는 세속화이다. 20세기 후반부터 각종문화적·사상적 흐름이 교회에도 파급되면서, 한편으로는 교회가 복음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나가야 한다는열정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도한 세속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딜레마가 생겼다. 장재형 목사는 “세속화신학”이 모두 그르다고 단정 짓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적 관점”을 긍정적으로수용하되, 복음의 본질이 희석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가 지나치게 폐쇄적이거나 자기 배타적 형태를 취해도 문제가 된다. 특정 교단이나 신앙 전통만이 완전하고옳다고 주장할 때, 복음의 본질과 하나 됨의 정신은 무시되고 외형적 기준만을 내세우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장재형 목사는 그러한 편협성과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에베소서 4장에 제시된 ‘일곱 가지 하나 됨의 근거’를날마다 되새길 것을 권면한다.

교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는 역사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통일되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임하는 데 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시작이자 마침이시라는 것을 믿고 고백한다면, 교회는그 방향을 더 선명히 드러내야 한다. 우리가 “하나 됨”을 추구하는 것은 단지 교회 안의 화합을 위해서만이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예비하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칼과 창이 낫과 보습으로 바뀌는 진정한평화와 회복은 이 땅의 어떠한 제도나 인간적 노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이 신자들을하나로 묶고 세상으로 흩어 보낼 때, 그 나라가 확장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으로서, 동시에 복음 전파와 봉사를 통해 세상에 소금을 뿌리고 빛을 비추는‘파송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는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와 은혜를 경험하고, 다시 세상속으로 나가 그 은혜를 나누도록 부름받은 존재”라고 강조한다. 이는 곧 “하나 됨의 이유가 교회 외부로 확장되는선교적 목적에 있음을 잊지 말라”는 점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에베소서 4장에 담긴 “몸이 하나이고, 성령이 하나이며, 소망이 하나이고, 주·믿음·세례·하나님이모두 하나이시다”라는 일곱 가지 선언을 붙드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하나 됨을 온전히 이루며,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질적 진리 위에교회가 다시 서면, 아무리 급변하는 세상에서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복음의 힘과 은혜를 더욱 풍성히 맛보게 될것”이라고 말한다.

2. “은혜와 선물의 신비—값없이 주어진 구원의 본질”

에베소서 4장 7절에서 바울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란 우리의 자격이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진은혜”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밝혀낸다.

이 은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로 마태복음 20장에 등장하는 ‘포도원 품꾼 비유’를 들 수 있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일한 품꾼도, 오후 늦게 불려와 한 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품꾼도 동일한 품삯을 받았다. 이 장면에서 오래일한 이들은 불평하지만, 주인은 “내가 너희에게 불의를 행한 것이 아니다.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준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은혜의 세계가 얼마나 ‘불공평’하게 보일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갑작스럽게 모든 것을 받아 버리는” 놀라운 은혜가 무엇인지를 예수께서 설명하신것이다.

포도원 주인에 해당하는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어떠한 선한 공로도 쌓을 수 없었던 죄인에게도 동일한 구원을베푸실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야말로 “은혜의 대반전”이며, 구원을 자격으로 환산하려는 인간의 모든오만한 시도를 일거에 부정한다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우리의 노력이나 자격의 결과’로 믿는다면, 그것은 이미 복음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charis)라고 불리는데, 이는 신약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하나님의 일방적호의를 의미한다. 선물은 받는 사람이 값을 치르지 않는다. 오직 베푸는 이의 호의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일뿐이다. 마태복음 20장의 비유뿐 아니라,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 역시 이를 잘 그려낸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방탕하고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가 조건 없이 환대하고 잔치를 베푸는 모습은 그 어떤 상황에서든 ‘돌아오기만하면’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상징한다.

교회는 이런 은혜를 모르는 이들이나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동시에 스스로도 그 은혜 안에머무름으로써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야말로은혜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오직 하나님의 선물에 의지할 때 감사와 겸손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역설한다. 교회가 만약 이 은혜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내가 행했으므로 받는다”는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면, 그순간부터 정죄와 배제의 문화가 나타나게 된다. 이는 복음의 본질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며,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왔노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이런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 세상의 모든 죄인을 향한 자비와 구원의 초청장을준비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오직 주의 은혜로 살게 되었음을 아는 사람이 진정한복음의 증인”이라고 말한다. 결국 교회 안에서 우리가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는 이유도, 모두가 은혜로 초대받은죄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배타적인 클럽이 되어서도 안 되고, 스스로를 의인으로 포장하며 세상을재단해서도 안 된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교회의 하나 됨도 마찬가지로 이 은혜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값없이 받은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더 낫다”는 자기 자랑이 사라지고, 서로를 존중하게 될 때, 교회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역사를 실제로 누리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접착제 역할을 하는 한 몸의 공동체가 교회”라고가르치며, 은혜의 신비가 사라지면 곧 갈등과 분열이 시작된다고 덧붙인다.

이렇듯 은혜에 대한 자각이 깊어질수록, 교회와 성도들은 자신을 높이는 대신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게 되고, 어렵고 힘든 영혼들조차도 함께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의 용량이 커진다. 포도원에 오후 다섯 시에 들어온품꾼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호의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했다는 사실을기억한다면, 교회 안에는 결코 서열이나 차별이 자랄 자리가 없다.

3. “다양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통일성—은사의 목적과 직분”

에베소서 4장 8절에서 바울은 시편 68편을 인용하여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는 구절을 언급한다. 이는 구약에서 전쟁에 승리한 장수가 전리품을 얻게 되고, 그것을 나누어 갖는 장면에서 따온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바울은 이걸 그리스도께 적용한다. 낮아지시고(성육신과 고난), 죽음을 통해 승리하신(부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 오르사 교회에게 은사를‘전리품’처럼 분배하셨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의 사역이 곧 주님의 승리에서 비롯된 결과”라고강조하며, 하나님이 교회에 은사를 주심은 인간적 자격과 능력에 근거한 게 아님을 상기시킨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실 때 사람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모습이 은사의 다양성을 잘보여준다. 고린도전서 12장, 로마서 12장, 그리고 에베소서 4장에는 은사들이 다채롭게 언급되는데, 이러한다양성은 교회 안에서 상호 보완을 통해 더 큰 통일성을 이룬다. 장재형 목사는 “은사의 목표는 교회를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바울은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라는 다섯 가지 대표 직분을 언급한다. (일부 학자들은 목사와 교사를 묶어 네 가지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 교회 당시의 상황을반영하지만, 본질적으로 오늘날 교회도 이 다섯 직분이 제시하는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고 해설한다. 사도는개척하고 파송되는 자,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자, 복음 전하는 자(전도자)는 곳곳에 복음을 퍼뜨리는자, 목사는 양을 돌보는 자, 교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각각 지칭한다.

이 직분들 중 어느 것도 우열이 없으며, 모두가 귀하다. 교회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은사를 가지고 섬기는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바울은 “몸의 다양한 지체”에 비유했다. 눈과 손, 발, 귀 등 각 지체가 서로 다른기능을 담당하지만,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온전한 몸으로서의 활동이 제한된다. 교회가 한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획일성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자의 고유한 역할을 통해 풍성한 하모니를 이룬다는 데 진정한아름다움이 있다.

에베소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은사를 주신 목적을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세우려 하심이라”고 요약한다. 이를 조금 더 풀면 첫째,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일이 교회의몫이다. 헬라어 ‘카타르티스모스’가 지닌 “꿰매고 교정한다”는 의미처럼, 교회는 죄와 아픔으로 갈라진 영혼들을보살피고 수선하는 작업에 부름받았다. 둘째, 그 회복된 성도들이 세상에 나가 봉사와 섬김을 실천하도록준비시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예배하고 교육받은 성도는, 세상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약자들을돌보고 정의를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 셋째, 그 모든 활동의 최종 목표는 그리스도의 몸(교회)을 견고히 세우는데 있다. 교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이며,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동시에 파송된 공동체이기도 하다.

장재형 목사는 “성도들이 은사를 제대로 발견하고 활용하도록 돕는 일이 교회 리더십의 핵심 과제”라고 말한다. 은사는 때로 잘못된 방식으로 사용되면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어떤 성도가 “내 은사가 더영적이다”라며 우월감을 갖거나, 반대로 “나는 눈에 띄는 은사가 없으니 쓸모없다”고 낙담하면, 교회는 건강한기능을 잃고 만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눈이 손에게, 손이 발에게 우열을 논할 수 없음을 언급한 이유가바로 이것이다. 교회 안에서 각 은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개인의 명성과자부심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은사를 나누고 협력하는 교회 문화를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호 존중과 겸손”이 필요하다. 특히 현대 대형교회나 복잡한 구조를 가진 교회에서는, 주목받기 쉬운 은사와 그렇지 않은 은사 간의 간극이 크게 벌어질 수있다. 그러나 서비스팀, 행정팀, 재정팀, 주차 안내 봉사, 각종 돌봄 사역 등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있는 이들의헌신 없이는, 결코 교회가 온전히 운영될 수 없다. 장재형 목사는 “서로 다른 은사를 발견하고 인정하며 함께협력할 때, 세상은 그 모습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해 있다는 사실을 엿보게 된다”고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은사가 다양해도, 그 목적과 방향이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다면 오히려 교회는 더 온전한 통일성을이룰 수 있다. 이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야말로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제시하는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이며, 장재형 목사가 끊임없이 설파하는 교회론적 핵심이다.

4. “교회의 참된 사명—세상 속으로 파송된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장재형 목사는 교회의 방향성을 논할 때 자주 “In and Out”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교회가 모이는 것(In)과흩어지는 것(Out)의 두 가지 축을 균형 있게 잡고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초대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내부적으로 뜨거운 예배 공동체가 되었지만, 동시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흩어져 복음을전했다. 교회가 이 두 측면 중 어느 한 쪽만 강조해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오직 안에만 머문다면 세속과단절된 종교 집단이 되고, 밖으로만 나간다면 영적 교제와 예배의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특히 20세기 중후반 ‘세속화 신학’이 대두하면서,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이활발해졌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도 같은 시기에 부각되었다. 이는 선교가 교회의 전략이나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이 세상에서 구원 사역을 펼치고 계신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교회는 그저‘하나님의 선교’에 초청받아 동참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바울의 에베소서 전체 맥락을 놓고 보면, 그리스도께서이미 만물을 통일하시기 위해 역사 가운데 일하신다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교회가 이 사실을 깨달으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어느 민족이나 문화 안에서도 선포할 수 있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급변하고 있는 지금, 교회가 더 넓은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주장한다. 과거와 달리 다양한 인종과 언어,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한 지역 안에 공존한다. 이 과정에서 갈등도발생하지만, 동시에 복음 전파의 기회도 열린다. 교회가 만약 지역과 민족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은혜와사랑으로 접근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 이는 곧 에베소서 1장10절에서 말하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우주적그리스도론과 결을 같이한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도 이 맥락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종종 교회 사명 하면 전도와 예배만을 떠올리기쉽지만, 성경은 고아와 과부, 낙은애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구약부터 신약까지 지속적으로 전달한다. 예수는 복음서에서 병든 자와 죄인들을 찾아가셨고, 초대 교회도 유무상통의 정신으로 약자들을 보살폈다. 장재형 목사는 “수직적 영성(예배와 기도)만 강조하면 세상과 분리된 종교 생활로 전락하기 쉽고, 수평적사랑(사회적 봉사)만 강조하면 영적 뿌리가 흔들릴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교회는 이 두 축을 균형 있게붙들어야 한다.

결국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하는 공동체다. 교회가 서로 하나 되고, 각자의 은사를 최대한발휘하여 상호 보완하고, 동시에 지역사회와 열방을 섬긴다면,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체험하게 된다. 바울이 “하나님 나라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희락이라”고 했던 말처럼, 교회는 이 세 가치(의·평강·희락)를 삶으로 드러내야 하는 증인이다.

장재형 목사는 가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세속적 표현을 빌려,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이세상 구조도 결국 ‘새 하늘과 새 땅’ 앞에서 해체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는 종말론적 확신을 자주전한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거나 더디게 느껴도,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하고 있고 또 결국 완성에 이를것이다. 교회는 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세상 가운데 조금씩 펼쳐 보이는 모델 하우스 같은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교회가 은혜에 기초하고, 다양성 속 통일성을 추구하며, 세상으로 파송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실천할 때, 비로소 주님의 몸으로서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하나 됨과 거룩함을 교회 안에만 가두지 않고, 세상속에 해방과 치유와 축복의 통로로 가져가는 것이 참된 교회의 사명이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교회가 때때로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지만, 에베소서 4장의 교훈, 즉 통일성과 다양성, 은혜와 선물, 그리고 파송된 공동체라는본질을 재발견함으로써 다시금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써 나갈 수 있다”고 역설한다.

결국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자, 세상에 흩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전초 기지이다. 값없이 받은 은혜로하나 되어, 서로 다른 은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아픈 영혼을 치유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포도원에 초대받은 품꾼들이며, 결코 자격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은혜 덕분에 자리를 얻은사람들이다. 그 은혜의 힘으로 교회가 세상을 섬길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엿보고, 장차 완전하게임할 그 나라의 아름다움을 기대하게 된다. 이러한 놀라운 복음적 순환이 멈추지 않을 때, 닭의 모가지를비틀어도 새벽이 오듯,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더 선명히 드러날 것이다.

렘브란트 작품과 사순절 묵상(장재형목사의 ‘십자가의 길’)

렘브란트 작품과 사순절 묵상(장재형목사의 ‘십자가의 길’)

장재형목사(장다윗목사)의 십자가의 길을 읽어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 I – 다 이루었다’라는 제목으로 장재형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요13-19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읽으며 먼저 소개하고 싶은 렘브란트의 작품은 ‘갈릴리 호수’, 그의 유일한 바다풍경 그림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림 속에는 14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 작품입니다. 그의 화풍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이 인물들 중 일부는 아마도 렘브란트 자신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갈릴리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지역으로, 이곳은 이스라엘에 있는 담수 호수이지만 전통적으로 바다로 불려왔습니다. 게네사렛, 디베랴 등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 갈릴리는 성지순례객들이 매우 감격해하는 곳 중 하나입니다.

이 갈릴리 호수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마가복음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양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많아 실제로는 많은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3년간의 공생 기간 동안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며, 이는 매우 짧은 시간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폭풍은 예수님과 12명의 제자들이 주요한 주제입니다. 이 12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분들로 이 중에는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도 포함됩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갈릴리호수 북쪽의 가버나움 동네에서 어부로 일하던 사람들입니다.

이 때 폭풍우가 일어나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신 것을 깨운 제자들은 위험을 알리며 살려 달라고 외쳤습니다. 이 상황은 렘브란트가 작품으로 그렸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바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바다에 대한 지식이 예수님보다 더 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폭풍이 일어나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워 구원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이 피곤하셨을 때 그 배에 누워 쉬고 계시던 것을 상상하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의 끝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장재형목사의 사순절 묵상집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를 향한 사랑임을 깨닫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감리교에서 동성애자를 축복하고 제명하고 출교시킨 사례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우리가 현재의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가요? 나 자신도 나 스스로를 사랑하기 어려운 존재로서 죄인이 아닌가요? 현재의 모습이 사랑스럽고 만족스러운 것일까요?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이 나의 이런 모습도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요?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실까요?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일까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임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누가 저주받기 위해 태어나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르며 태어나지만, 그 사람이 다른 길을 택하거나 주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폭풍이 일어났지만 제자들은 놀라지 않고 예수님이 주무시는 모습을 그려낸 화가가 렘브란트입니다. 렘브란트의 몇몇 작품을 보고 장재형목사의 사순절 묵상집 ‘십자가의 길’도 함께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작품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바다의 폭풍을 잠잠케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무엇이 바다의 풍랑과 같을까요?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우리의 길과 진리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에게는 새로운 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길임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 삶이 우리를 위한 사랑이고, 섬김이었고, 그의 죽음과 부활까지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주님과 제자들은 이별을 맞이해야 합니다.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과 안네스의 뜰, 그리고 빌라도의 관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돌아보면, 제자들은 정말 많이 무지했던 것 같습니다. 이를 어떻게 말할까요? 아마도 신앙이 너무 어렸을 것입니다.

몸은 커서 성인이 되었고, 직업은 어부인 이들이 갈릴리 호수에 있었던 제자들은 감당할 수 없는 폭풍에 직면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재능이 있고 인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도 우리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에 힘입어 가능합니다. 장재형목사도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야함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작은 것 하나까지도 그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누군가와 교제하며 살아가야 하지만,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의심스럽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의문입니다. 아마도 이런 생각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막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함께하는 동료가 나를 사랑하거나 미워한다는 것을 따지는 것은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 아이가 사춘기에 들어가면서 아빠를 사랑해? 이런 말을 안 합니다. 자신이 해야 할 공부를 하고 자신이 할 일을 하며 친구들과 놀기가 이 아이의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중학생을 둔 부모들이 나를 누군가가 미워한다고 말할 때인가?

어쨌든, 세족식 때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동안 그들에게 보여주신 것들이 다 있는데도 그들은 서로 낮아지고 섬기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주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장재형목사의 묵상집을 읽어보며 예수님의 절절한 섬김을 배우게 됩니다.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니까 이제는 몸으로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음에는 렘브란트가 그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님’과 장재형 목사의 사순절 묵상집인 ‘십자가의 길’의 내용들을 함께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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