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학자들의 혀와 귀로 전하는 생명의 복음

장재형목사

독일 문학의 서늘한 거장 프란츠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이 독자에게 남기는 가장 기괴하고 서늘한 비극의 장면은,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갑작스러운 흉측한 육체적 변화 그 자체보다도 닫힌 방문 너머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향해 그가 필사적으로 뱉어내는 핏빛 외침이 더 이상 상대에게 닿지 못하고 한낱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한 소음으로 전락해 버린 무서운 영적 단절에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의 이사야 50장 4절 강해 설교는, 일상 속에 숨겨진 이 비극적인 단절의 문제를 ‘학자들의 혀와 귀’라는 신학적이고 영적인 질문으로 깊이 있게 전환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목 놓아 부르셔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의 완악하고 닫힌 귀, 그리고 극심한 절망과 삶의 무게 앞에 무너진 곤고한 사람을 향해 단 한 마디 생명의 말도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 무기력한 혀는 과연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 안에서 온전히 회복될 수 있습니까.

은혜는 먼저 닫힌 귀를 깨운다

선지자 이사야가 바라본 이사야 50장의 하나님의 백성은 바벨론 포로라는 기나긴 절망의 어둠 속에 무기력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무서운 환란의 한복판에서 백성들에게 가장 먼저 선명하게 밝혀 보여주시는 것은 그들을 버렸다는 차가운 사실이 아니라,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는 변함없는 신실한 진실입니다.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향해 자신이 그들을 이혼 증서를 써서 내어버린 적도 없으며, 채주에게 돈을 받고 팔아넘긴 적도 결코 없다고 부드럽게 물으십니다. 그들이 겪는 참혹한 포로 생활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 아버지의 숭고한 사랑이 식었거나 구원의 손길이 짧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거룩한 말씀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불순종을 일삼은 백성 자신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본문 말씀이 폭로하는 인류의 가장 깊은 본질적 위기는 내 삶을 둘러싼 외형적인 환경의 무너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차갑게 닫혀 버린 영적인 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과 은혜로 목 놓아 부르셔도 끝내 응답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이 부드럽게 들려와도 마음 깊은 곳에서 겸허히 받아들이지 못할 때, 인간은 수많은 세속의 소리 가운데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무서운 영적 침묵 속에 갇히게 됩니다. 마땅히 들어야 할 하늘의 거룩한 음성을 듣지 못한 사람은, 마침내 말을 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도 비겁하게 침묵하거나 오히려 상처받아 신음하는 지친 이들에게 아무런 영적 힘도 되지 못하는 허무한 말만을 쏟아내게 됩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깊이 있게 붙드는 영적 과제는 입술의 현란한 언어적 기술이나 화술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할 영적인 순종과 들음의 자세입니다.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길고 혹독한 환란의 시간은, 우리가 평소에 과연 무엇을 참된 토대로 의지하며 살아왔는가를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예배의 형태나 모임의 방식이 크게 달라지고 일상의 익숙한 질서들이 흔들릴 때에도, 하나님께서 결코 그분의 피로 사신 교회를 무책임하게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이 선포하는 은혜의 흐름은 이 땅의 가정이 신앙을 보존하고 파수하는 마지막 거룩한 보루임을 엄중히 일깨우며,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가 서로 흩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서로를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거룩한 교회와 성도 공동체의 참된 회복은 멀리 있는 거대한 구호나 거창한 운동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내 바로 곁에 있는 가장 가까운 이의 숨겨진 신음 소리를 다시금 겸허히 듣는 작은 순종에서 출발합니다.

이사야 50장 4절의 위대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고난받는 그분의 종에게 “학자들의 혀”를 친히 선물로 주시고, 아침마다 그의 영적인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알아듣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거룩한 구속사의 예언은 궁극적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완전하게 성취되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안에 거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복된 약속으로 해석됩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 신음하는 곤고한 영혼을 온전히 살려내는 생명의 말은, 인간 스스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세속적인 재능이나 화려한 기교가 아니라, 아침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가장 먼저 청종하게 하시는 하늘의 깊은 은혜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됩니다.

“아침마다”라는 구절의 나지막한 표현 속에는 신앙생활의 가장 선명하고 거룩한 영적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성도의 혀가 세상을 향해 움직이기 전에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귀가 먼저 활짝 열려야 하고, 누군가를 가르치고 지도하기 전에 주님 앞에서 겸손히 배워야 하며, 절망에 빠진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기 전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먼저 통회함으로 일으켜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을 묵상하는 복된 시간은 그저 관념적인 신학 지식을 머릿속에 채우는 정적인 시간이 아니라, 세속의 물결 속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다시금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조율되는 거룩한 영적 스파크의 시간입니다. 성도의 진실한 믿음은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구체적인 방향으로 겸허히 받아들이는 순종을 통해 비로소 선명해지는 법입니다.

복음은 곤고한 사람의 이름을 먼저 듣는다

성경이 말하는 학자들의 혀는 결코 많은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의 화려한 언변이나 세속적인 웅변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거룩한 혀의 참된 목적을 오직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깊이 아는 사랑의 섬김에 두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언어는 말하는 사람의 우월한 지식이나 능력을 세상을 향해 증명하는 교만한 수단이 아니라, 절망 속에 지친 영혼이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보며 일어설 수 있도록 꼭 필요한 생명의 말씀을 겸손히 건네는 거룩한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건네는 참된 생명의 말은 언제나 내 입을 열기 전에 타인의 슬픔과 아픈 형편을 깊이 있게 듣는 겸손함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아무리 인간적으로 뛰어난 혀와 화려한 말재주를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혼을 살리지 못하는 무기력한 혀에 불과하다고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인간의 감상적인 말은 잠시 사람의 마음을 다독이거나 감정을 움직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깊은 죄악을 깨닫게 하고 진실한 회개로 돌이키며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품게 만드는 위대한 영적 능력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만 흘러나옵니다. 그렇기에 복음이 지닌 거룩한 권위는 내 목소리의 크기나 표현의 세련됨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진리의 말이 과연 어디에서부터 흘러나왔으며, 누구를 살리기 위해 자기 비움으로 사용되고 있는가에 완전히 달려 있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깊이 있게 들으려는 영적인 귀가 없이 인간의 말만 무성하게 많아지면, 거룩한 진리조차 쉽게 왜곡되고 상처를 주는 도구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상대방의 고통과 아픔을 충분히 공감하며 듣지 않은 채 경솔하게 던지는 성급한 충고는, 아무리 정답처럼 보이는 바른 말일지라도 상처 입은 영혼을 더욱 깊은 절망으로 밀어 넣는 또 다른 가해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겸허히 묻지 않은 인위적인 열심은 사람을 세우기보다 무겁게 짓누르는 종교적 멍에가 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의 귀는 단순히 타인의 말을 잘 받아 적는 인간적인 기술이 아니라, 성령의 나지막한 음성과 곤고한 이들의 아픈 신음 소리를 동시에 올바르게 분별해 내는 영적인 감각입니다. 그처럼 깊이 들은 사람만이 때에 온전히 맞는 위로와 책망, 그리고 진리와 사랑을 균형 있게 건넬 수 있게 됩니다.

이 설교는 성도의 혀가 깨끗하고 정결해지는 복된 길을 진실한 회개의 눈물과 성령의 불이라는 강력한 영적 이미지로 깊이 있게 설명합니다. 스스로의 죄를 깊이 자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눈물이 마음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내고, 성령의 불길이 내 안에 오래도록 쌓여 있던 죄의 습성과 교만을 남김없이 태워버릴 때, 비로소 인간의 언어도 거룩하게 새로워집니다. 회개함으로 깨어지지 않은 혀는 진리를 말하면서도 타인을 차갑게 정죄하기 쉽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은밀하게 자기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쉽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자신의 완악함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한 사람만이, 다른 이의 아픈 상처를 함부로 다루지 않고 주님의 심장으로 품을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말은, 세상에서 많이 배운 입에서 교만하게 나오기 전에 하나님 말씀 앞에서 온전히 깨어진 성도의 겸손한 마음에서 태어납니다. 그러한 복음의 언어는 죄의 엄중한 무게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절망한 죄인에게 다시금 돌아올 생명의 길을 따뜻하게 비추어 주며, 하나님의 진리를 흐리지 않으면서도 삶에 지친 사람을 무참히 짓밟지 않습니다. 이처럼 은혜와 진리가 결코 분리되지 않고 온전히 하나로 만나는 영적 공간에서, 성도의 혀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거룩한 복음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침묵에서 부활의 말이 태어난다

선지자 이사야가 영안을 열어 바라본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의 환상은, 마침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통해 완전하고 온전하게 드러났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입에서 선포된 모든 말씀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권위가 서려 있었지만, 그 하늘의 권위는 결코 자신의 고난을 회피하거나 스스로를 높여 세속적 영광을 취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오직 말씀으로 곤고한 자들을 온전히 일으켜 세우셨고,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구속적 뜻에 완벽하게 순종하사 차가운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학자들의 혀’를 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화술이나 말의 기교만을 닮고 싶다는 사사로운 소원이 아니라, 그분의 말과 완벽하게 하나를 이루었던 숭고한 사랑과 낮아짐,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십자가의 삶 자체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거룩한 고백이자 기도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라는 장재형 목사의 강력한 선언은, 인간이 겪는 고통 그 자체를 가학적으로 미화하거나 높이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의 영광을 고단한 현실을 무책임하게 외면하는 값싼 낙관론이나 세속적인 위안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는 복음의 엄중한 질서입니다. 참혹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의와 다함 없는 사랑이 완벽하게 드러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길이 비로소 활짝 열렸기에, 주님의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포해야 할 소망은 결코 막연한 세속적 위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온가지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끝내 하나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게 만드는 굳건한 믿음의 증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깊이 있게 가르치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약속된 성령을 예루살렘에서 간절히 기다리게 하신 거룩한 흐름 역시 이 영적 질서 안에 놓여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별 설교를 통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은 성도들을 이 세상에 외로운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예수께서 친히 전하신 생명의 말씀을 깊이 있게 가르치시며 생각나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마침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의 불길이 임하자, 지극히 평범하고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의 입술은 천국 복음을 대담하게 선포하는 학자들의 혀로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먼저 하늘의 음성을 깊이 들었고, 주님의 약속을 참고 기다렸으며, 마침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성도들이 비로소 세상을 향해 거룩하게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깊은 신학적 통찰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이 위대한 구속사의 역사를 결코 과거의 초대교회에만 존재했던 특별한 사건으로 가두어 두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동일하신 보혜사 성령님, 그리고 동일한 구원의 복음이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온전히 함께하고 있으며, 그 생명의 말씀은 이미 우리의 입과 마음 가까이에 매우 가깝게 다가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존재하는 진짜 문제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주지 않으셨다는 부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삶에 성령으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영적으로 둔감해져 있거나, 이미 거저 받은 가늠할 수 없는 은혜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사용하지 않는 나태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는 세속의 화려하고 새로운 말의 유행을 좇아갈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변함없이 선포되어 온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오늘을 살아가는 곤고한 영혼들에게 어떻게 생명의 참된 말이 될 수 있는가를 겸허히 다시 물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남겨야 할 것은 살리는 말

하나님이 주시는 학자들의 혀는 결코 거룩한 예배당 건물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따뜻하게 돌보고, 절망과 압제에 갇혀 신음하는 이들의 아픈 고통을 무심히 외면하지 않으며, 영적인 위로와 간절한 기도, 그리고 삶에서의 실제적인 도움을 함께 손잡아 건넬 때, 비로소 우리의 말은 구체적인 삶의 몸을 입게 됩니다. 교회가 선포하는 영원한 복음이 인간의 영혼을 향하고 있다면, 그 영혼이 고단하게 견뎌내고 있는 아픈 삶의 세속 현실 또한 결코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법입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의 실천과 진리의 담대한 선포는 결코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하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가 함께 마땅히 걸어가야 할 거룩한 하나의 길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세상을 향해 훈계하고 지배하려 드는 권위적인 집단이 아니라, 오직 섬김의 종의 모습으로 세상의 발을 씻기는 겸손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을 품는다는 미명 아래 타협하며 진리의 거룩함을 잃어버려서도 결코 안 됩니다. 들어야 할 하늘의 귀가 없이 내 주장만 무성하게 많아지면 복음은 타인을 향한 차가운 정죄로 기울고, 마땅히 말해야 할 복음적 용기가 없이 들으려고만 한다면 이웃의 참혹한 고통 앞에서 무기력하게 침묵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배우는 듣는 귀와, 세상을 향해 담대히 진리를 증언하는 혀가 균형 있게 함께 존재할 때, 교회는 세상의 거센 환란 속에서도 영원한 소망의 이유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마침내 소망을 이룬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인간이 겪는 고난과 아픔을 결코 미화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는 굳건한 믿음으로 고통의 시간을 견디어 낼 때, 심지어 과거에 깊은 상처를 입은 피폐한 공동체조차도 다른 누군가의 아픔을 품어주는 거룩한 은혜의 그릇으로 새롭게 빚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내게 맡겨진 가정을 믿음으로 지켜내고, 성경 말씀 앞에 아침마다 귀를 활짝 열며, 내 곁에 있는 곤고한 이들의 눈물을 따뜻하게 닦아주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 나라의 동일한 거룩한 사명에 속해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의 작은 순종과 헌신들이 하나둘 모여, 교회를 세상을 향해 진정한 생명의 말을 건네는 복된 공동체로 지켜내는 것입니다.

복음이 선포하는 거룩한 언어는 세상을 향해 내 목소리를 높여 큰소리를 내는 세속적인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나지막한 음성을 깊이 듣고 깨달은 성도가 곤고함 속에 신음하는 이웃의 곁에서 겸손히 건네는 생명의 말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입술에는 이미 세상의 수많은 생각과 지식, 그리고 나를 변호하기 위한 수많은 말들이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많은 말들은 정말로 아침마다 하나님께 깊이 듣고 깨달은 거룩한 말씀입니까, 아니면 내 안의 불안과 교만한 자존심이 만들어낸 부질없는 세속의 소음입니까. 그리고 지금 바로 나의 곁에서, 내가 먼저 내 입을 다물고 조용히 그 아픔을 들어주어야 할 곤고한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solafide.kr

www.davidjang.org

어둠을 가르는 빛, 안디옥의 정신: 장재형 목사의 강해를 통해 본 선교적 부르심

카라바조(Caravaggio)의 걸작 **「성 마태의 소명」**을 보면,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세관 안으로 날카로운 빛 한 줄기가 비스듬히 파고듭니다. 그 빛은 방 안에 있는 모든 이를 무차별적으로 조명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사람, 마태의 얼굴을 정확히 겨냥합니다. 그 빛을 마주한 자는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근원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안디옥교회 강해는 바로 이 ‘빛의 사건’으로부터 신앙의 본질을 추적합니다. 복음이란 단순히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존재를 일으켜 세우고 공동체를 빚어내어, 마침내 세상을 향해 걸어가게 만드는 거대한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1. 고정된 장소에서 파송의 현장으로: 안디옥의 태동

기독교 역사에서 안디옥교회가 지니는 상징성은 매우 독특합니다. 이 교회는 화려한 성전이나 견고한 제도적 조직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철저한 자기 비움인 기도와 금식 속에서 세미한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 성령의 주권적 파송: 안디옥교회는 자신들의 공동체가 비대해지는 것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음성에 순복하여 가장 유능한 지도자였던 바나바와 바울을 세상의 한복판으로 기꺼이 보냈습니다.
  • 교회의 본질적 정의: 이를 통해 교회는 ‘복음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창고’가 아니라, ‘복음에 사로잡혀 세상으로 나가는 파송 기지’라는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교회는 모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흩어지기 위해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무게와 이방 선교의 지평

안디옥은 유대인과 헬라인, 그리고 수많은 이방인이 복음 안에서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를 이룬 역사적 현장입니다. 이곳에서 제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

  • 세상의 증언: 이 명칭은 성도들이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 지어낸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을 지켜보던 세상 사람들이 “저들은 진실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다”라고 인정하며 붙여준 영광스러운 흔적이었습니다.
  • 신앙의 이중주: 안디옥교회는 ‘내적 은혜’와 ‘외적 사명’의 균형을 완벽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끊임없는 기도와 감사가 샘솟았고, 공동체 밖으로는 전도와 교회 개척의 열매가 강물처럼 흘러갔습니다. 이러한 균형이 무너질 때 교회는 자기 보존에만 급급한 폐쇄적 집단이 되거나, 영적 뿌리 없이 활동만 무성한 단체가 되고 맙니다.

3. 골로새서의 신학적 기둥: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서다

안디옥교회의 열정적인 활동은 골로새서가 제시하는 단단한 교리적 기초 위에 서 있었습니다. 골로새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자 ‘모든 만물의 머리’라고 선언합니다. 장재형 목사의 신학적 통찰은 바로 이 기독론적(Christological) 기초를 강조합니다.

  • 윤리적 모범을 넘어서: 예수님을 단지 도덕적인 스승이나 성인으로 축소한다면, 교회는 세상의 수많은 구호단체 중 하나로 전락할 것입니다.
  •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복음: 십자가의 피로 하늘과 땅의 화평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때, 복음은 단순한 교훈을 넘어 우주의 질서를 재편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됩니다.
  • 지식과 삶의 일치: 신학적으로 바르게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바르게 사는 것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성경 묵상은 지적 유희가 아니라 회개와 순종을 통해 삶의 열매를 맺는 거룩한 노동입니다.

4. 기도와 감사의 다리: 보이지 않는 연합의 신비

초대교회가 지녔던 진정한 힘은 눈에 보이는 건물의 규모가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해 연결된 **’영적 유대’**에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멀리 떨어진 교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그들의 소식에 감사했던 것처럼, 기도와 감사는 흩어진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보이지 않는 다리였습니다.

  • 공교회성의 회복: 교회는 지역적인 모임이면서 동시에 전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단이나 문화의 장벽을 넘어 복음 안에서 서로를 기억할 때, 선교는 소모적인 경쟁이 아닌 아름다운 동역으로 승화됩니다.
  • 감사라는 엔진: 감사 없는 사역은 금세 피로와 번아웃을 부릅니다. 그러나 은혜를 기억하는 공동체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기보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높이며, 내부의 안정을 박차고 세상의 고통 속으로 기꺼이 뛰어듭니다.

5. 흩어지는 교회, 세상을 밝히는 등불

안디옥교회의 위대함은 ‘가장 귀한 것을 붙잡아 두지 않은 용기’에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라는 핵심 인재를 파송한 것은 선교적 교회가 지닌 역설적 승리를 보여줍니다.

  • 역동적인 생명력: 복음은 정적인 지식이 아니라 움직이는 생명입니다. 성도는 은혜를 받은 지점에서 머무는 정체된 존재가 아니라, 그 은혜를 삶의 모든 현장(가정, 직장, 사회)으로 실어 나르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 선교적 존재 양식: 세계 선교는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는 사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언어와 인종의 경계를 넘어 흘러가게 하는 영적 사건입니다. 사랑은 말보다 태도에서, 순종은 편안함보다 선택의 순간에 그 진실함이 드러납니다.

결론: 우리는 무엇에 붙들려 있는가

결국 안디옥교회의 정신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준엄한 질문을 남깁니다. 우리는 복음을 얼마나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를 자랑합니까, 아니면 복음이 우리 삶을 얼마나 강력하게 뒤흔들고 있는가를 고백합니까?

복음의 본질적인 운동성:

$$복음(Gospel) \rightarrow 은혜(Grace) \rightarrow 깨달음(Understanding) \rightarrow 파송(Sending)$$

교회의 성취는 얼마나 많은 인원이 모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각자의 삶의 자리로 거룩하게 흩어졌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며, 그 은혜를 온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삶. 그것이 안디옥이 남긴 믿음의 궤적입니다.

당신은 지금 복음을 붙들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복음에 붙들려 세상을 향해 보내진 사람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당신의 응답이 바로 당신의 오늘을 결정할 것입니다.

solafide.kr

davidjang.org

거룩한 낭비, 복음의 정수를 담은 향기: 장재형 목사의 마태복음 26장 강해

서구의 고전 성화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향유 옥합을 든 여인의 모습은 대개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오직 주님의 발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적인 장면이 뿜어내는 영적 파동은 수 세기를 지나 오늘날 우리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토록 소중한 것을 단번에 깨뜨리게 했는가? 왜 그녀는 남김없이 쏟아부어야만 했는가?”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는 이 침묵의 헌신 속에 기독교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정수, 즉 **’복음’**이 맥동하고 있다고 역설합니다. 여인이 옥합을 깨뜨린 행위는 단순한 미담이 아니라, 장차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미리 보여주는 거룩한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1. 효율의 논리를 뒤엎는 사랑의 파격

마태복음 26장의 배경은 긴장감으로 가득합니다. 한 여인이 지극히 귀한 향유를 가지고 나아와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순간, 그 장소에 모여 있던 이들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특히 제자들은 이를 ‘낭비’라고 규정하며 불쾌감을 드러냈습니다.

  • 세상의 잣대: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이들을 구제했다면 얼마나 유익했겠는가?”라는 제자들의 항변은 매우 합리적이고 정의로워 보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효율성’과 ‘사회적 가치’의 언어와도 닮아 있습니다.
  • 주님의 시선: 그러나 예수님은 이성적인 계산기를 두드리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여인을 옹호하셨습니다. “그녀는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는 주님의 선언은, 복음의 가치가 인간의 산술적 계산을 넘어선 곳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대목에서 복음의 심연이 열린다고 강조합니다. 복음은 ‘계산’이 멈춘 곳에서 비로소 ‘계시’로 다가옵니다.

2. 십자가, 하나님이 자신을 깨뜨리신 사건

왜 이 여인의 행위가 복음 그 자체가 될까요? 복음의 핵심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낸 업적에 있지 않습니다. 반대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먼저 비천한 죄인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 자기 비움(Kenosis):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쏟아내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창조주가 피조물의 손에 죽는 것은 가장 비효율적이고 어리석은 ‘자기 파괴’처럼 보입니다.
  • 복구 불가능한 헌신: 옥합은 한 번 깨지면 다시 붙일 수 없고, 쏟아진 향유는 다시 병에 담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 또한 그러했습니다. 적당히 나누어준 것이 아니라,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전적인 투여를 하신 것입니다. 올리벳대학교의 신학적 묵상이 주목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입니다. 이 여인의 행위는 십자가라는 ‘거룩한 낭비’를 온몸으로 비추어낸 거울이었습니다.

3. 은전의 소리와 향유의 향기: 두 영혼의 갈림길

이 본문이 더욱 처연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여인의 헌신 바로 뒤에 유다의 배반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두 인물을 대조하며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1. 여인의 옥합: 사랑을 발견한 자는 가장 귀한 것을 깨뜨려 드렸습니다. 그녀에게 주님은 온 세상보다 귀한 분이었습니다.
  2. 유다의 은전: 사랑을 ‘허비’로 여긴 자는 가장 귀한 분을 은 30에 팔아넘겼습니다. 그에게 주님은 자신의 야망을 채워줄 도구이거나, 가성비가 떨어지면 처분해야 할 상품에 불과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신앙의 성패가 결국 ‘사랑을 대하는 태도’에서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주님 곁에서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내 영혼을 적시는 ‘은혜’가 되었느냐는 점입니다. 복음을 머리로만 이해하면 계산기가 남고, 복음을 가슴으로 영접하면 옥합을 깨뜨리는 모험이 시작됩니다.


4. 현대의 ‘실용주의 신앙’을 향한 경종

우리 또한 매일 이 두 사람 사이의 경계선 위에서 위태롭게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조차 ‘투자 대비 효율’을 따지는 순간, 우리는 유다의 길에 가까워집니다.

  • 기도의 응답이라는 ‘결과’에만 매몰될 때, 순종보다는 ‘손익계산서’를 먼저 작성할 때, 우리는 옥합의 가치가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게 됩니다.
  • 누군가의 눈물 어린 헌신을 보고 “적당히 좀 하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우리 마음에는 복음의 향기가 마른 것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역설을 가르칩니다. 사랑은 남는 자투리 시간을 내어주는 취미 생활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거룩한 허비’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도의 진정한 정체성은 바로 이 ‘어리석어 보일 만큼 깊은 사랑’ 안에서만 선명해집니다.


5. 사랑받은 자만이 옥합을 깰 수 있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는 우리에게 무거운 율법적 짐을 지우지 않습니다. 대신, 근원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대는 진정으로 사랑받았음을 확신하는가? 십자가가 여전히 그대의 심장을 뛰게 하는 복음인가?”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만이 자기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눌 수 있듯,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를 경험한 자만이 자신의 옥합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회개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너무나 익숙한 종교적 문장으로만 취급하며, 주님의 사랑을 효율의 언어로 난도질해 온 우리의 메마른 가슴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 지점에서 죽어있던 신학은 살아있는 묵상이 되고, 멀게만 느껴졌던 말씀은 가슴을 울리는 소망이 됩니다.


결론: 당신의 옥합은 어디에 있습니까?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가 복음인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방식—이유를 묻지 않고 자신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사랑—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이 ‘사랑의 낭비’를 이해하지 못해 멸망의 길로 갔지만, 여인은 이 사랑의 본질을 직감적으로 붙잡아 영생의 기록 속에 남았습니다.

우리는 매일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손해’로 볼 것인가, 아니면 내 존재를 바꿀 ‘생명의 향기’로 받을 것인가. 오늘 당신의 삶에서, 주님께 드리기 아까워 아직도 품속에 꼭 쥐고 있는 옥합은 무엇입니까?

그 옥합이 깨지는 순간, 당신의 삶에는 비로소 하늘의 향기가 진동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solafide.kr

davidjang.org

십자가로 투영한 고린도전서 10장: 장재형 목사의 시선

고린도전서 10장은 신앙의 무대가 정결한 성소뿐만 아니라, 거친 광야의 모래바람과 복잡한 도심의 소음 한복판임을 일깨워줍니다.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설립자)는 이 본문을 통해 단순한 율법적 경고를 넘어, 그 엄중함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세밀한 은총을 길어냅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을 박제된 과거사로 취급하지 않고, 오늘날의 성도가 매일 마주해야 할 영적인 거울로 소환합니다. 기적 같은 구름기둥의 인도와 하늘의 만나를 경험했음에도 무너졌던 이들의 역사는, 은혜를 경험했다는 안일함에 빠진 신자들에게 “선 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유의하라”는 날카로운 각성을 촉구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권면이 공포를 조장하는 위협이 아니라, 은혜를 변질시키지 않고 끝까지 보존하게 하려는 사랑의 초대라고 해석합니다.

1. 광야: 자만을 태우고 신뢰를 빚는 공간

광야는 과거의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성도의 내면에 수시로 재현되는 영적 환경입니다.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욕망과 관계의 균열, 효율성을 숭상하는 세상의 압박이라는 현대판 광야와 마주합니다. 장재형 목사가 이 본문을 ‘광야 생활 지침서’로 풀어내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많은 이들이 영적 성취를 ‘완전한 면역’으로 오해하지만, 바울은 은혜의 경험이 곧 자만의 근거가 될 때 그것이 오히려 우상처럼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계합니다. 은혜가 “나는 안전하다”는 자기 확신으로 굳어지는 순간, 신뢰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절망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시고 피할 길을 내신다”는 약속은 시험을 제거해달라는 기도보다, 시험을 통과하는 중심의 변화를 구하게 합니다. 여기서 ‘피할 길’은 상황의 모면이 아니라, 동일한 고난을 전혀 다른 영성으로 돌파해내는 은총의 통로를 뜻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신앙을 상황의 통제가 아닌 ‘예배의 지속’으로 정의하며, 광야를 믿음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정금의 도가니로 묘사합니다.

2. 우상숭배와 성찬: 어떤 교제에 참여할 것인가

바울은 광야의 교훈을 당시 고린도의 우상 숭배 문제로 직결시킵니다. 장재형 목사는 우상의 위험성이 그 ‘일상성’에 있다고 진단합니다. 고린도의 우상은 사회적 관계와 경제 활동 속에 공기처럼 스며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우상 역시 조각상의 형태가 아니라 성공, 소비, 자극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합니다. 예배가 특정 시간이 아닌 마음의 왕좌를 결정하는 일이듯, 우상숭배는 하나님 없이도 삶이 충분하다고 믿게 만드는 모든 체계의 총합입니다.

이에 대한 강력한 대안으로 바울은 ‘성찬’을 제시합니다. 성찬은 십자가라는 과거의 사건을 현재형으로 끌어오는 식탁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성찬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고백하고, 그분의 희생이 내 삶의 결정을 내리는 실질적인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보여주듯, 그 식탁은 완벽한 자들의 잔치가 아니라 결함 있는 자들이 십자가 빛 아래서 새 생명으로 빚어지는 용광로입니다.

3. 공동체의 질서: 아가페의 계산과 자유의 품격

성찬의 연합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윤리로 확장됩니다. “떡이 하나요 우리가 한 몸”이라는 선언은 개인주의적 영성을 거부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성찬이 사적인 경건으로 축소될 때 교회의 생명력은 사라진다고 지적합니다. 코이노니아(교제)는 정서적 친목을 넘어, 상대방을 경쟁자가 아닌 배려의 대상으로 보는 십자가의 질서입니다. 이 연합은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케리그마(선포)가 되며, 약한 자를 돌보는 디아코니아(섬김)로 완성됩니다.

바울이 다룬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 논쟁은 현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라는 대원칙은 율법주의와 방종이라는 양극단을 모두 경계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양심의 배려’를 기독교 윤리의 정수로 꼽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권리를 관철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할 줄 아는 성숙한 존재입니다. 효율이 아닌 사랑을 계산하는 ‘아가페의 셈법’은 십자가의 방향성을 닮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모든 일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결국 고린도전서 10장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대주제로 귀결됩니다. 이는 관념적인 구호가 아니라, 스마트폰을 다루는 손끝에서부터 돈을 쓰고 이웃과 대화하는 사소한 순간까지 하나님을 높이는 기준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십자가의 빛 아래 사는 신자가 광야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 속에서 복음의 향기를 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세상의 문화 속에 거하지만 세상의 가치를 섬기지 않는 것, 자유를 누리되 타인의 유익을 먼저 헤아리는 것, 그리고 어떤 시련 중에도 하나님의 미쁘심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십자가가 비추는 성도의 소명입니다. 십자가의 빛 안에서 우리의 변명은 멈추고, 하나님의 참되심만이 우리를 다시 인간다운 삶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솔라피데

davidjang.org

장재형 목사, ‘은혜의 빚’과 로마서의 숨결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 목사의 로마서 강해를 따라 읽다 보면, 오래전 사도 바울이 기록한 문장이 더 이상 고대 문헌에 머물지 않고 오늘 우리의 호흡과 이어지는 듯한 생동감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로마서 1장 8–15절에 대한 그의 해설은 단순한 주석의 범위를 넘어, 한 사도가 어떤 심정으로 교회를 품었고 복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섬세하게 드러냅니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의 신앙 또한 그 거울에 비춰져 재정렬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논할 때, 장재형 목사의 이름은 해석자의 지위를 넘어 바울의 내면을 오늘 언어로 번역해 주는 통로처럼 자리합니다.

가장 먼저 마음을 끄는 것은 바울의 감사 고백입니다.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라.” 이 말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로마에 먼저 복음이 도달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라 자부하던 사람에게 로마는 그 누구보다 먼저 가고 싶었던 전략적 요충지였을 터입니다. 그럼에도 장재형 목사는 바울에게는 서운함이나 경쟁심이 전혀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누군가 자신보다 먼저 로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시기하는 대신, 바울은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이름이 남지 않은 누군가가 뿌린 씨앗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넓은 마음이야말로 복음의 체질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장면은 자연스레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수확의 주역은 따로 있지만, 들판에 남겨진 이삭을 묵묵히 줍는 이름 없는 여인들의 손길이 결국 풍성함을 완성합니다. 로마 교회의 성장도 이와 같았습니다. 누가 처음 복음을 전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믿음은 조용히, 그러나 굳세게 자리 잡았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무명의 헌신을 바라보는 바울의 마음을, 따뜻한 화가의 시선에 비유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이들의 손으로 자라난다고 설명합니다.

예수의 겨자씨 비유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출발에서부터 상상할 수 없는 확장을 이룹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역사 속에서도, 깊은 곳에서는 일정한 방향의 흐름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장재형 목사는 복음의 ‘확산력’을 강조합니다. 죄가 퍼지는 속도가 무섭게 느껴질 때가 많지만, 그보다 더 깊고 더 강하게 세계를 움직이는 힘은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표면적인 변화 너머에서 거대한 해류가 꾸준히 한 방향으로 흐르듯,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관점입니다.

이 설명은 미켈란젤로의 「사울의 회심」을 연상시킵니다. 캔버스 곳곳에 역동적인 혼란이 그려져 있지만, 전체를 지배하는 빛의 방향은 오직 하나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길이 막힌 듯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이미 복음의 흐름이 정해져 있다는 암시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흐름 안으로 우리가 초대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의 이유라고 말합니다.

또한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를 “기도로 쓰인 편지”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음에도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기도했다고 고백합니다. 초대교회의 교제는 물리적 만남을 넘어 영적 연대에 기반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처럼 “떠난 것은 얼굴뿐, 마음은 여전히 함께”라는 관계가 기도로 유지되었습니다.

이런 영적 연결망은 렘브란트의 「야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화면 속 인물들은 각기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만, 전체 조명과 구도는 하나의 공동체적 긴장을 이룹니다. 초대교회 역시 떨어져 있지만 기도로 하나를 이루었고, 장재형 목사는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합니다. 내가 세우지 않은 교회라도, 이미 성령이 역사하고 있는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 — 이것이 바울의 심장이며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태도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향하려 했음에도 여러 차례 길이 막힌 배경을 설명하면서, 장재형 목사는 “예루살렘 퍼스트”의 정신을 짚어 줍니다. 아무리 이방 교회가 성장해도 바울은 자신에게 영적 유산을 넘겨준 예루살렘 교회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방 교회들의 헌금을 “은혜의 헌금”이라 표현한 것은 이 영적 중심과의 연합을 유지하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는 마치 큰 원을 그리기 전에 정확한 중심점을 먼저 찍는 것과 같다고 장재형 목사는 설명합니다. 세계 선교의 원을 그리기 위해 바울은 먼저 예루살렘이라는 중심축을 확립한 것입니다.

이 연합의 비전은 라파엘로의 「성체 논쟁」에서 보이는 원형적 구도와 닮았습니다. 하늘과 땅, 시대와 지위를 초월해 다양한 인물들이 하나의 신비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그 장면처럼, 장재형 목사가 그리는 교회도 예루살렘과 이방 교회, 사도와 성도가 하나의 원 안에서 연결된 모습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로마에 가려는 또 하나의 목적을 “재교육과 견고함”에서 찾습니다.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미 세워진 교회들의 믿음을 다시 다지고 재정비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영적 지도력을 꾸짖으며 “한 사람을 얻고도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만든다”고 경고하신 장면과 연결됩니다. 진짜 목회는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끝까지 붙들고 세워 주는 일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부분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과 아름답게 호응합니다.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가 감싸 안고 회복시키는 장면처럼,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들을 다시 돌아가 살피며 상처를 치유하고 중심을 바로 세워 주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율법적 바리새인이 은혜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음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누고자 한다”는 바울의 말에 대해, 장재형 목사는 그 의미를 단순한 특별계시나 독점적 능력으로 좁히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나누어 주신 경험, 지혜, 위로, 간증, 가르침 등 삶의 모든 은총이 은사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와의 관계를 ‘일방적 가르침’이 아니라 “피차 안위함” 즉 상호 위로의 구도로 이해합니다.

이 상호성의 구조는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아이콘을 떠올리게 합니다. 서로를 향해 앉아 있는 세 위격, 그리고 열려 있는 빈자리—위계와 지배가 아닌 순환과 교제의 구조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이런 원형적 구조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랑이 흐르는 곳에서는 삼각형이 아니라 원이 그려진다는 것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에게 내가 빚진 자라”는 고백에서 복음의 심장이 뛰기 시작합니다. 바리새인 시절 바울은 자신의 공로를 하나님이 갚아야 한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는 자신이 이미 갚을 수 없는 은혜의 빚을 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사랑의 빚”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의무감이 아니라 내적 필연성을 낳는다고 설명합니다.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바로 복음의 체질입니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은 이 사랑의 빚을 시각적으로 보여 줍니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들은 평생 아버지의 사랑에 빚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빚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존재의 근거입니다. 바울이 모든 계층과 민족에게 자신이 빚진 자라고 고백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특정 문화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주어진 보편적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할 때, 장재형 목사는 이 복음을 단순한 교리 요약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존재에 이미 스며든 은혜의 세계 전체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허락된 수많은 체험—눈물, 기쁨, 실패, 회복, 간증, 그리고 각 교회가 가진 독특한 이야기들—을 로마 교회와 나누고, 동시에 그들로부터도 배우고자 합니다. 이것이 상호 나눔의 교회입니다.

결국 장재형 목사의 강해가 우리에게 남기는 핵심은 ‘복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름 없는 이들에 대한 감사, 보지 못한 교회를 향한 중보, 이미 세워진 공동체를 다시 돌보는 책임, 예루살렘과 이방 교회를 잇는 연합, 사랑의 빚을 자각한 자의 겸손한 열정, 그리고 원형적 교회 공동체를 향한 갈망—이것이 로마서가 그려내는 영적 지형이며 장재형 목사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울처럼, 그리고 장재형 목사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나는 헬라인에게나 야만인에게나,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든 이웃과 열방에게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솔라피데

davidjang.org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설교학 수업: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당신의 삶으로 전파하기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신학교(OTCS)의 김 야고보 박사는 설교나 설교 작성 기술인 설교학을 단순히 실용적인 기술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의 표현에 관한 것으로 바라봅니다.

그는 설교를 단순히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에게 신앙을 전달하고 영감을 주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이번 학기에 김 박사는 Olivet University Riverside 메인 캠퍼스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수강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교학 과정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은 안수 목사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설교 준비와 발표의 기본 개념을 소개합니다. 김 박사는 학생들에게 설교 듣기 연습, 메모 작성, 설교 본문 초안 작성 등을 지도하고, 마지막으로는 학생들이 스스로 설교하는 연습을 하도록 돕습니다.

2학년 학생인 마크 히는 김 박사님의 수업을 통해 많은 새로운 관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김 박사님은 청중의 상황을 이해하고, 메시지를 삶에 적용하는 것이 설교의 핵심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는 매우 도전적인 요구이지만, 마크 히에게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주었습니다.

김 박사님은 20년 이상에 걸쳐 선교사로 봉사하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교회를 개척해왔습니다. 그는 다양한 기회에 많은 종류의 청중에게 설교한 경험이 있으며, 캠퍼스에서도 인기 있는 채플 설교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김 박사님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관점과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 캠퍼스 개발 추진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에 랄프 윈터 도서관 개원

장재형 목사 설립한 WOA에 기독일보 방미단 방문

장재형목사 설립 WETIA, 세계 복음주의 신학대 네트워크

장재형목사 설립한 WEC 한교연 미국연수단 내방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유럽 신학교들과 협력 논의

장재형목사 설립한 진젠도르프 2023 박사과정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OIT 교수진 CES 2022 컨퍼런스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대표단, ABHE 연례 회의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진젠도르프 박사과정에 전세계 학생들 참여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 최신 랜더링 공개

장재형목사 설립 OTCS 기독교 변증학 과정 신앙의 이유 탐구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나서…로마서 1장1절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으며…[로마서2장]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으며….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나서…

솔라피데

매력적인 콘텐츠 제작에 중점을 두고 개정된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OSMC 소셜 미디어 과정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OSMC(Olivet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는 봄 분기에 매력적인 콘텐츠 제작에 중점을 두고 개정된 소셜 미디어 과정을 도입할 예정입니다.

이전에 소셜 미디어 과정 커리큘럼은 뉴스 속보, 스토리 리드, 정보 수집 및 콘텐츠 큐레이팅을 위해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는 언론인을 교육하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정보 수집 및 전파를 위해 일반적으로 Facebook, Twitter, Instagram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러나 Tiktok 및 Clubhouse와 같은 다른 새로운 플랫폼이 미국과 그 외 지역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지난 해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식 격차를 메우기 위해 커리큘럼을 재설계하고 있습니다.

재설계된 과정에서는 소셜 미디어의 전략적 콘텐츠 제작이 가장 중점을 둘 것입니다. 학생들은 경험을 창출하고 목소리를 정의하는 효과적이고 매력적인 콘텐츠 제작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진정성과 전문성의 균형을 맞추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청중의 매우 다양한 부분에 다른 “피치”를 제공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다음은 새로운 소셜 미디어 과정에서 다룰 심층적인 질문의 몇 가지 예입니다.

OSMC 커리큘럼 검토 패널은 매년 모든 과정을 검토하여 미디어 업계의 최신 개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과정 콘텐츠를 조정하거나 재설계합니다.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 캠퍼스 개발 추진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에 랄프 윈터 도서관 개원

장재형 목사 설립한 WOA에 기독일보 방미단 방문

장재형목사 설립 WETIA, 세계 복음주의 신학대 네트워크

장재형목사 설립한 WEC 한교연 미국연수단 내방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유럽 신학교들과 협력 논의

장재형목사 설립한 진젠도르프 2023 박사과정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OIT 교수진 CES 2022 컨퍼런스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대표단, ABHE 연례 회의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진젠도르프 박사과정에 전세계 학생들 참여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 최신 랜더링 공개

장재형목사 설립 OTCS 기독교 변증학 과정 신앙의 이유 탐구

솔라피데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ESL 학생들은 내레이션 학습 방법으로 영어 실력을 향상시킵니다.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리버사이드의 Olivet School of Language and Education(OSLE)에서는 최근 ESL(영어를 제2언어로 가르치는 프로그램) 교육에 새로운 학습 방법인 내레이션 방법을 도입했습니다. 이 방법은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내레이션 방법은 다단계 학습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학생들은 텍스트를 보지 않고 기사나 책의 오디오 녹음을 듣습니다. 그런 다음, 학생들은 텍스트와 함께 두 번째 듣기를 통해 익숙하지 않은 어휘를 식별하게 됩니다. 또한, 배운 각각의 새로운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고 해당 단어를 사용하여 문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 학생들은 오디오를 들으면서 텍스트를 전사하여 봅니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은 읽은 기사나 책의 내용을 요약하기 위해 구두 내레이션을 녹음해야 합니다.

이번 분기부터 ESL 학생들은 이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여 수업 시간과 개별 학습에서 영어를 연습해 왔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학생들의 영어 이해력, 작문 및 말하기 능력이 크게 향상되도록 도왔습니다.

“번거로운 문법적 지시는 학습자를 만족시키거나 용기를 고무시킬 수 있지만, ‘내레이션’ 방법은 학습자의 타고난 호기심과 지식에 대한 사랑을 자극합니다.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업시간에 구술을 정확하게 하기 위한 방법입니다.”라고 ESL 강사가 설명했습니다.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 캠퍼스 개발 추진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에 랄프 윈터 도서관 개원

장재형 목사 설립한 WOA에 기독일보 방미단 방문

장재형목사 설립 WETIA, 세계 복음주의 신학대 네트워크

장재형목사 설립한 WEC 한교연 미국연수단 내방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유럽 신학교들과 협력 논의

장재형목사 설립한 진젠도르프 2023 박사과정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OIT 교수진 CES 2022 컨퍼런스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대표단, ABHE 연례 회의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진젠도르프 박사과정에 전세계 학생들 참여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 최신 랜더링 공개

장재형목사 설립 OTCS 기독교 변증학 과정 신앙의 이유 탐구

솔라피데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ZSDS, 트랙 리더들과 협력하여 DMin 후보자의 성공적인 이수 추구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진젠도르프 박사과정(ZSDS)은 2월 25일 목회학박사(D.Min.) 프로그램의 사역 트랙 리더들과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이 회의의 목적은 각 트랙의 리더에게 2022년 4월에 열릴 예정인 구전 변론 일정을 알리는 것입니다. ZSDS는 트랙 리더가 박사 학위 과정을 지원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형식 가이드 및 신학 연구 작성을 포함한 리소스를 소개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멘토와 후보자에게 제공할 것입니다.

ZSDS는 트랙 리더들에게 D.Min의 마지막 단계에서 각 후보자를 격려하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프로그램을 마치기 위해 최종 논문을 기한 내에 완성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입니다. 후보자는 논문 프로젝트를 발표하기 위해 구두 변론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구술심사를 통과한 후보자들은 6월 올리벳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할 것입니다. ZSDS는 계속해서 트랙 리더 및 멘토와 긴밀히 협력하여 각 후보자가 졸업을 위한 업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입니다.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 캠퍼스 개발 추진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에 랄프 윈터 도서관 개원

장재형 목사 설립한 WOA에 기독일보 방미단 방문

장재형목사 설립 WETIA, 세계 복음주의 신학대 네트워크

장재형목사 설립한 WEC 한교연 미국연수단 내방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유럽 신학교들과 협력 논의

장재형목사 설립한 진젠도르프 2023 박사과정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OIT 교수진 CES 2022 컨퍼런스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대표단, ABHE 연례 회의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진젠도르프 박사과정에 전세계 학생들 참여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 최신 랜더링 공개

장재형목사 설립 OTCS 기독교 변증학 과정 신앙의 이유 탐구

솔라피데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대표단, ABHE 75차 연례 회의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ABHE  연례 회의 참석

장재형목사가 설립한 올리벳대학교 대표단이 올해 미국성서고등교육협회(ABHE) 연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모였습니다.

미국성서고등교육협회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념하며”라는 주제로 창립 75주년을 기념했습니다.

장재형목사가 설립한 올리벳대학교는 이 행사의 주요 후원사 중 하나로, 눈에 잘 띄는 곳에 대형 부스를 마련했습니다. Olivet School of Art and Design의 부학장인 Zimou Tan 교수는 입주 작가로 활동하며 초상화를 신청한 행운의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즉석에서 목탄 스케치를 그려주었습니다.

올리벳대학교 부스에서는 신학 및 목회학 박사 학위 과정인 진젠도르프 박사 과정과 목회학 박사 과정을 소개하며 진젠도르프 박사 과정을 홍보했습니다.

장재형목사가 설립한 올리벳대학교 대표단은 특정 학교 관리자 그룹을 대상으로 한 프레젠테이션과 토론으로 구성된 사전 컨벤션 포럼에 참여했습니다. 본회의 기조 연설자로는 성서학대학 총장 윌리엄 블로커(William Blocker), ABHE 총장 필립 디어본(Philip Dearborn), 무디성경연구소 마크 조브(Mark Jobe) 총장, 앤더슨 대학교 총장 존 피스톨(John Pistole), 예배를 인도한 스티브 클라크(Steve Clarke)가 참석했습니다.

올리벳은 올해 다른 ABHE 학교들과 함께 650명이 넘는 대표단을 구성하여 협회 역사상 가장 많은 성경적 고등교육 지도자들이 모인 최대 규모의 모임이 되었습니다.

ABHE 및 연례 회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www.abhe.org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 캠퍼스 개발 추진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에 랄프 윈터 도서관 개원

장재형 목사 설립한 WOA에 기독일보 방미단 방문

장재형목사 설립 WETIA, 세계 복음주의 신학대 네트워크

장재형목사 설립한 WEC 한교연 미국연수단 내방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유럽 신학교들과 협력 논의

장재형목사 설립한 진젠도르프 2023 박사과정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OIT 교수진 CES 2022 컨퍼런스 참석

솔라피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