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동행 – 장재형목사

이 글에서는 마가복음 14장 32-42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중점적으로 다루되, 장재형(장다윗)목사가 강조해 온‘그리스도와의 동행’이라는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성경 본문에서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과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그 고독한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신앙의 핵심 가치를 되새기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시지와 함께 장재형목사가 전하고자 하는 주요 가르침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전개는 여러 소주제나 구분 없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며,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장면이 우리 각자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성찰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마가복음 14장에 기록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 감람산 기슭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고, 거기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한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일반적으로 ‘감람산’은 올리브나무 숲이 가득하며, 그 가운데 ‘겟세마네’는‘채유소’, 즉 올리브 열매를 짜서 기름을 얻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장소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올리브 기름이 가져다주는 두 가지 상징, 즉 평화와 영원성, 그리고 메시아에게 기름 부음을 주던 전통을 함께 묵상해 볼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히브리어로 ‘메시야’, 헬라어로 ‘크리스토스’라는 표현이 모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즉 기름 부음받은 왕으로서 겟세마네 동산에 계셨음에도, 여기서 제자들에게는 그분을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우는 장면이 아니라 오히려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며 십자가 수난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왕으로 즉위하셔야 할 분이 극도로 비참한 기도를 드리시는 장면이기에, 성경 전체에서 매우 강렬하고도 역설적인 대조를 형성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마태·마가·누가복음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대단히 중요한 본문이지만,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특징이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에 대해, 요한이 이미 13장부터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는 길을 완전히 수락하셨음을 조명했기에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자신이 ‘이제 영광을 받았다’고 선언하셨고, 제자들에게 종말론적 당부와 고별 설교를 남기셨습니다. 즉, 십자가 수난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당신은 스스로 그 길을 ‘영광’이라 선포하심으로 결단하셨다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주님은 갈보리 언덕 이전부터 이미 그리스도의 길을 선택하셨다. 요한은 예수님의 내면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수용하는 왕적 위엄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에 겟세마네 기도를 생략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가 기록한 겟세마네 기도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인간적 고민’과 ‘극렬한 통곡’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4장33-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5장7절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참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께 ‘아바 아버지’라 간구하며 끝까지 순종하신 고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께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 그분 안에는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처절한 길인지, 또 그 길을 가는 데 있어 인간적 떨림과 고통이 없을 수 없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스스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고백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복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장재형목사가 자주 강조해 왔듯, 예수님이 사실상 십자가를 지는 길을 ‘피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이나 마가복음 14장에 드러난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 죽음 앞에서 느끼는 극심한 두려움과 고통을 토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이어집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단하고는 있지만, 종종 우리의 의지와 감정은 연약하기 때문에 다른 길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들이 많다. 예수님 또한 그 순간을 겪으셨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을 붙들고 끝까지 걸어가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본을 보여주셨다”고 풀이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모든 이가 반드시 직면해야 할 도전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는 진리입니다.

한편,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를 올리시는 동안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식사 자리에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를 쳤는데, 예수님은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로 들어와서 기도하시는 동안에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들어 버립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주님께는 지금이 가장 절박한 시간이고, 일생일대의 영적 투쟁이 벌어지는 중인데, 제자들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밤에 산책을 나온 사람들처럼 무심하게 잠에 든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종종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엄중한 순간에 우리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버릴 때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제자들은 허둥지둥 도망쳐 버리는데, 마가복음 14장 51-52절에는 베 홑이불을 두르고 따라오던 한 청년이 붙잡히자 홑이불을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전통적으로 이 ‘한 청년’을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자신의 집에서 최후의 만찬이 있었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감람산으로 나아가자, 밤중에 일단 잠들어 있던 마가가 뒤늦게 모든 상황을 감지하고 황급히 예수님을 따라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도 두려움 앞에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친다”라고 설명합니다. 마가는 이토록 부끄러운 장면을 자기 복음서에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기록함으로써, 인간적인 연약함이 얼마나 쉽게 드러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연약함조차도 결국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정직한 신앙고백’의 모범이라 칭하며, “마가는 자신이 부끄러운 존재임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런 자신도 변화시키신 주님의 은혜를 자랑하기 위해 이 장면을 그대로 쓴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약점을 숨기기보다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길을 열어 놓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셔야 마땅한 예수님께서 오히려 고통과 슬픔 속에 땀을 핏방울같이 흘리시는 비극적인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완전히 받아들여지기까지, 즉 예수가 진실로 ‘기름 부음받은 이’로 공인되고 고백되기까지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불가피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분의 길을 함께 걸어갈 영적·신앙적 성숙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홀로 고독의 길을 가야 했고, 그 절정이 바로 겟세마네의 땀방울과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였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에 대해,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떡과 포도주를 받고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나, 곧 이어서 펼쳐질 고난의 현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유월절에 희생된 양의 피가 기드론 시내로 흘러내려 붉게 물들어 있는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도, 주님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를 선명히 알지 못했다. 주님은 홀로 그 붉은 물살을 건너 겟세마네로 들어가셨고, 이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고독하고 처절한 순간,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이는 아람어 ‘아바’(아빠)와 헬라어‘파테르’(아버지)가 결합된 표현으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맺고 계신 친밀하고도 절대적인 신뢰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에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 부르셨으나, 이 고통의 골짜기에서 그분은 더욱 간절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아빠 아버지여”라 부르며 부르짖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을 때 가장 큰 유혹은‘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하는 의심이 생길 때다. 예수님조차 그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아바 아버지’를 찾으심으로, 인간적인 두려움의 순간에 우리도 전적으로 아버지를 신뢰해야 한다는 본을 보이셨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우리는 죽음의 세력이 가장 강력하게 덮쳐 올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을 놓지 말아야 하며,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의 기도 안에 ‘수단’으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순종’을 낳는 기도로서의 본질이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셨으나, 결국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결론지으셨습니다. 이 장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우리는 종종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바꿔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나를 바꾸도록’ 내어맡기는 태도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도의 정수는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뜻과 감정을 초월해 아버지께 끝까지 복종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된 기도의 목표”라고 강조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길을 따를 힘을 주는 근원적 모범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약함을 지닌 제자들은 이 기도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잠들었고, 야고보와 요한도 주님의 절박함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시며,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권면하셨으나, 그들은 여전히 무감각한 상태였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들을 ‘교회 내의 인간적인 모습’으로 비유하면서, “세상에서는 큰소리치고 대범해 보이는 신자도, 실상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잠들어 버리거나 도망가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고,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욱 겟세마네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하며, 베드로처럼 망령된 자신감을 내세우기보다, 예수님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후 예수님은 세 번째 기도 후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라고 하시며, 십자가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군병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몰려오자 제자들은 흩어집니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는 “아무리 강한 결심과 의지를 보여도, 결국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넘어지기 쉽다.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실제로는 가장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을 부인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가 넘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돌이키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곧 우리가 넘어지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지라도 주님께서 돌이킴의 은혜를 주신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됩니다.

결국,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죽음의 잔’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 수용하셨고,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신 현장이 바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방관자나 구경꾼의 위치로 남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며, 주님 안에 주어진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고 역설합니다. 즉, 겟세마네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순종의 길을 우리 또한 믿음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고독하고 비극적으로 보일지라도, 부활의 영광이 그 끝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한편, 요한복음이 겟세마네 기도를 생략한 것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영광으로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의 인간적 고뇌 부분을 생략하는 편집 의도를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다시 한 번 짚어 줍니다. 요한복음은 17장의 고별 기도를 통해 세상과 제자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왕적’ 위엄을 더욱 부각합니다. 반면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고통을 당하셨고,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기도를 드리셨는가에 포커스를 둡니다. 이 둘은 결코 모순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더 풍부하게 보여주는 보완적 시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도 종종 겟세마네 같은 어려움을 맞이한다. 세상에서 기드론 시내처럼 붉은 피의 흔적을 보며 때로 두렵고 떨리기도 하고, 아무도 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해 외롭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길을 이미 가셨고, 우리에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본을 남겨주셨다. 우리가 그 기도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때, 주님과 동행하는 길은 분명히 고독을 넘어 부활의 환희로 이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겟세마네와 갈보리 언덕은 고통이 극심하게 드러나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는 자리라는 진리가 우리에게 제시됩니다.

더 나아가, 겟세마네 사건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모두를 돌아보게 하는 ‘영적 거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어쩌면 마가처럼 겨우 홑이불만 두른 채 뛰어갔다가 결국 도망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적인 결심과 맹세가 얼마나 한계가 뚜렷한지를 지적하면서, “베드로처럼 어떠한 어려움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큰소리쳐도, 하나님 앞에 깨어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작은 자극 하나에도 무너지고 만다. 그러므로 신앙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과 기도를 통해서만 단단해진다”고 합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열심보다 내면의 겸손과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4장 후반부에 보면, 예수님이 실제로 체포되시고 대제사장들 앞에서 신문받으시는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베드로는 정확히 예수님의 예언대로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맙니다. 닭이 울자마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죠.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인간적인 비참함과 눈물을 지적하면서, “우리는 실패하고 넘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베드로를 찾아가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다. 이는 겟세마네 기도에서 십자가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죄인인 우리를 얼마나 끝까지 붙드시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만든다”고 설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며, 때로는 고독하고 외롭고 눈물겨운 길임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길을 주님이 먼저 가셨기에, 그리고 그 길에서 제자들의 모든 실패까지도 주님이 포용하셨기에, 우리가 실패한다 할지라도 다시금 회복될 수 있는 길이라는 희망이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바로 이 ‘부활의 희망으로 이끌어가는 고난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겟세마네와 같은 어둠과 슬픔, 홀로 씨름해야 할 시험을 맞닥뜨릴 수 있으나, 기도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며 나아갈 때 우리 또한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을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첫째, 예수님도 인간적인 두려움과 고통을 겪으셨고, 우리 역시 그러한 시험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둘째, 그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를 부르짖으셨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라는 복종은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이를 위해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넷째, 제자들처럼 잠에 빠지거나 도망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도 솔직히 인정해야 하며, 그 연약함 속에 임하는 주님의 은혜로 인해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결국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점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적인 최악의 절망이지만,부활이라는 최후의 소망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며, 그 길에서 우리의 믿음은 성숙해집니다.

이처럼 겟세마네와 갈보리는 단순히 2000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영적 현실을 비추어 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에 주목하며, “우리는 너무 쉽게 제자들을 비난하지만, 사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라고 물어봐야 한다. 그 질문을 통해 자기 자신도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날 잠재력을 가진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 훨씬 더 큰 겸손과 회개의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신앙은 ‘내가 강해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끝까지 붙들어 주시고, 우리가 연약함을 인정하며 은혜를 구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나아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각종 위기와 유혹을 만날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처럼 그저 의지로 버티다가 결국 도망치거나 무너져 버리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처럼 아버지 앞에 모든 것을 토로하며 “아버지의 원대로 되길 원합니다”라는 고백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 후자의 길이, 장재형목사가 끊임없이 설파해 온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실질적 모습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먼저 그 길을 가셨고, 부활하심으로써 그 길이 결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따를 때, 비록 인간적인 약함과 눈물이 따른다 해도, 마지막에는 부활의 능력이 펼쳐지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보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틀어 우리는 ‘기도’의 역할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가장 힘겨운 순간에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의 자리에 가셨고, 그들이 함께 깨어 기도하기를 원하셨을까요? 장재형목사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 마음의 항복을 이끌어낸다. 기도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교만의 표현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코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제자들도 깨어 기도하기를 원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동안 어떤 의미 있는 역할도 하지 못하고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후에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에게‘기도의 자리’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복음 전파 사명을 맡기십니다. 결국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초대교회 부흥을 일으키는 주역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정적이고 결단력 있어 보인다 해도, 기도를 잃어버리면 베드로와 같이 작은 유혹 앞에서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의 주님처럼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어떤 시험도 결국 극복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점에서 “교회가 이 땅에서 설 자리를 잃고, 개인의 신앙이 깊은 내면적 능력을 잃어버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진정한 의미의 겟세마네 기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기도는 간절함과 절실함,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순종을 담고 있는데, 이를 놓치면 우리도 잠자고, 멀리 도망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순절 기간이나 특별 새벽기도회 등 특정 절기에만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자리에서 늘 겟세마네를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피할 수 없는 결단을 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하는 영적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거룩한 반복’이라 부릅니다. 즉, 역사 속에서 단 한 번 있었던 겟세마네의 이야기가 오늘도 우리 안에서 반복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가처럼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끝내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복음서의 저자로 세워지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세 번씩 주님을 부인했다 해도, 다시금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부여받고 장차 교회 기둥으로 쓰임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fuLEttN1gs

이렇듯, 마가복음에 기록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은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가장 강렬한 예시이자, 제자들의 연약함과 예수님의 인자하심이 극명히 대비되는 자리입니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그리스도와의 동행’은 결국 이 겟세마네 영성에서 비롯됩니다. 아무리 무서운 죽음이 다가온다 해도, 아바 아버지를 향한 절대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내 원대로 하지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외롭고 고독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그 길을 먼저 가셨고, 그 길이 영원한 승리로 이어졌음을 우리는 부활 사건을 통해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믿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과제입니다.

이러한 겟세마네 사건을 정리하며, 장재형목사는 우리 각자가 ‘내가 피하고 싶은 십자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라고 조언합니다. “혹은 내가 잠들어 버리고 있는 고난은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매달려야 할 일은 무엇인가? 또 나는 지금 베드로처럼 ‘주를 위해 목숨도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실상은 쉬지 못할 잠에 빠져 있거나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들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진실하게 답해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와 한층 더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더 이상 인간적인 힘이나 의지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늘 “신앙은 나의 결단 위에 서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과 예수님이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 순종 위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순종에 발붙여, 우리 역시 삶의 크고 작은 겟세마네를 만나게 될 때마다 “아바 아버지”를 부르짖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신뢰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바로‘그리스도와의 동행’이라는 영적 현실을 우리 일상에서 구체화시키는 열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신앙 행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밤중에 흘리는 눈물과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그 기도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이미 선언하신 구원과 생명의 능력을 우리 삶에 실제로 펼쳐 보이십니다.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에 담긴 예수님의 기도와 제자들의 연약함, 그리고 결국 십자가의 길을 향해 굳게 일어나신 예수님의 순종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상기하게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주님은 홀로 그 길을 가셨다. 제자들은 자고 있었고, 누군가는 도망쳤으며, 다른 누군가는 배신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길은 본래부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 치의 후퇴 없이 그 길을 가셨고, 그 길의 종착지는 부활이라는 승리였다”고 말합니다. 이 메시지는 예나 지금이나 제자도로 초청받은 모든 이에게 변함없이 유효하며, 우리 각자를 향해 ‘함께 가자’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초청입니다.

정리하자면, 장재형목사가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강조하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은 다음과 같은 함의를 지닙니다. 첫째, 우리의 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되, 그 약함을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의지와 다를 때에도, 나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이 더 선하고 옳음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어떤 강한 결심과 맹세도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 비록 내가 실패한다 해도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에도 제자를 버리지 않으셨듯, 우리 역시 다시 일으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부활의 영광을 내포하는 역설적 상징이기에, 지금 눈앞에 보이는 고난에만 매몰되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달려갈 때 그 영광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결국 겟세마네 기도를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내 인생에서 지금 겪고 있는 혼돈과 시련이 어떤 의미인가? 그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하게 만듭니다. 주님은 그 끝에 분명한 답을 주십니다. 내가 부담스러워하고 피하고 싶은 십자가가 있다면, 그 십자가 너머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영광과 부활의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절정이며, 장재형목사가 거듭거듭 전해 온 복음의 실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겟세마네에서 통곡하던 예수님을 향해 비로소 깨어 일어나 함께 걸어가는 결단입니다. 이제 더는 자고 있지 말고, 또 도망가지 말고, 주님과 함께 가는 진정한 동행자로 서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요약하면,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님이 가지신 인간적 약함과 신적 순종의 역설을 여실히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기도’로 나아가야 함을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겟세마네 영성의 중요성을 수없이 설파해 왔으며, 그 핵심은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과 동행하려면 우리도 겟세마네의 통곡을 치러야 하고, 십자가를 감당해야 하며, 끝내 그 길이 영광으로 가는 길임을 믿어야 한다”라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깨어 기도하며 겟세마네를 다시금 내 삶의 현장에 구현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동행이야말로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된 길이 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록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이 드러나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시고도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실패와 눈물도 마침내는 주님의 부활 능력 안에서 회복되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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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영원한 사랑 – 장재형목사

1.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환희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바울 사도의 로마서 8장은 성경 전체에서 복음의 정수를 가장 아름답고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는 장으로, 복음 이해의 핵심적인 열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로마서 8장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환희의 삶”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본문으로,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이야말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난 성도들이 얼마나 큰 기쁨과 소망을 누릴 수 있는지 잘 보여 준다고 말한다.

먼저 현대의 성경은 장과 절이 구분되어 있지만, 본래의 성경은 구분이 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로마서7장과 8장을 끊어서 보지 않고 연속된 메시지로 바라볼 때, 우리가 겪는 내적 갈등과 거듭난 이들의 영적인 자유를 더욱 선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로마서 7장 23절에서 24절은 구원받은 자도 심각한 내면의 분열과 곤고함을 겪는 현실을 보여 준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 본문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이미 구원받아 죄 사함을 받은 자들도 여전히 육신에 속한 문제로 인해 갈등을 경험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구원(칭의)은 받은 상태이지만, 동시에 성화라는 진행 과정 안에 있기에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나타나는 심각한 내면의 모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7장에서 이러한 고통을 토로하면서도, 로마서 8장에서 드디어 성령 안에서 누리는 해방과 기쁨을 선포한다.

로마서 8장의 가장 큰 주제 중 하나는 ‘성령 안에서의 삶’이다. 바울이 8장 전체를 통해 보여 주는 메시지를 정리해 보면,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자유가 어떤 환희와 능력을 낳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포도주에 비유되는 성령에 취한 삶”이라 일컫는다. 이는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삶이 전면적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상징한다. 이미 바뀐 존재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구원받은 성도 역시 원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영광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원죄가 사함받았어도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습관적인 죄’ 혹은 ‘자범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포도주가 이미 되었으나, 그 안에 물이 섞여서 싱거워진 상태’에 빗대어 설명한다. 성령에 의해 거듭나 거룩하게 된 자라 할지라도, 과거의 죄적 습관이 우리의 내면에 계속해서 작동하기 때문에 성화의 과정에서 이를 씻고 정결케 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흔히 혼동하는 것이 예레미야 2장 22절과 이사야 1장 18절 사이의 긴장이다. 예레미야는 “너희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너희 죄악이 여호와 앞에 그대로 있다”고 말했고, 이사야는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라고 선포했다. 장재형목사는 “이 두 예언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으로 결코 죄를 온전히 빨 수 없지만,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기에 하나님의 은혜로는 완전히 씻길 수 있다”라는 구원론적 진리를 지적한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원죄’와 ‘자범죄’를 구분해야 한다.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보편적이며 연대적인 죄의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끊어졌음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원죄 사함’이며, 칭의(Justification)로 설명되는 ‘지위의 변화’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위 변화가 우리의 과거와 전혀 다른 운명을 선사한다고 역설한다. 더 이상 아담 안에서 지배받던 ‘사망의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철폐되었고, 실제로 예수를 믿고 거듭난 자들의 삶에서 ‘칠 대 저주’와 같은 운명적 징벌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죄와의 싸움에서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습관적인 죄’ 즉 자범죄가 여전히 남아서 우리의 걸음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정규전은 끝났으나, 소탕전이 남아 있다”라고 비유한다.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이미 큰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일상에서의 작은 전투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은 전투들은 소탕전이기에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하지만 소탕전을 소홀히 하면 그 잔당들이 다시금 우리를 괴롭게 하고, 성결의 길을 방해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가운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요 13장)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미 전신이 깨끗한 자라도, 걸어 다니는 과정에서 발에 묻은 먼지를 씻어야 하듯이, 구원받은 자들도 일상 속에서 짓는 자범죄를 계속 씻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과정을 “성령 안에서 행하는 자기 성찰과 회개”의 과정으로 본다. 이러한 성화의 훈련은 우리가 이미 얻은 칭의의 확신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견고하게 하는 은혜의 수단이다.

결국 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두 측면을 동시에 품어야 한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큰 전쟁을 이기셨다”라는 승리의 관점이다. 다른 하나는 “남은 전투인 소탕전을 우리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라는 긴장감이다. 장재형목사는 신학자들의 연구와 더불어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인간이 죄를 대할 때 이 이중적 시각을 놓치면 극단으로 치우치기 쉽다고 경고한다. 즉, “이미 죄가 완전히 없어졌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라고 착각하거나, 반대로 “우리 안에 여전히 죄가 남아 있으니 구원의 확신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라고 낙심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균형 잡힌 이해 속에서, 로마서 8장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첫 번째 핵심 메시지는 “성령 안에서의 완전한 자유와 환희는 실제로 경험 가능한 실재”라는 점이다. 바울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으며,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고 선언한다(롬 8:1-2). 여기서 우리는 법적 신분이 바뀐 것에 따른 실질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 14절에서 17절을 통해, 이 자유는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된 자가 ‘성령 안에서’ 아바 아버지를 부르며 친밀하게 교제하는 데서 오는 구체적인 기쁨과 영광으로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자녀 된 자들은 하나님의 상속자이자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되기에, 이 땅에서 어떤 고난이 있어도 그 고난이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단순히 머리로만 이해하는 진리가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친히 증언해 주시는 내면의 확신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18절에서 30절에 이르는 말씀, 즉 ‘우주적인 회복’과 ‘산 자의 부활’에 관한 가르침은 바로 이러한 자유가 개인적·영적 차원을 넘어서 창조세계 전체로 확장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해산의 수고를 하는 이유는,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 때문에 함께 회복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롬 8:19-22). 여기서 바울은 인류를 포함한 우주적 재창조의 비전을 제시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리 맛보는 성도들이 누리는 성령 안에서의 자유가, 개인의 내적 평안에 그치지 않고 역사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된다”라고 설명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창세기 9장의 노아 이야기에 연결 지어, 노아가 홍수 심판 후 새로운 땅, 곧 신천신지(new heaven and new earth)에 내려서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누린 자유와 기쁨을 비유로 사용한다. 노아가 취해 벌거벗은 모습은, 에덴동산에서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모습과 통한다고 말한다. 이는 ‘죄 이전의 순수함’, 혹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거룩한 기쁨’을 상징한다.

여기서 포도주는 성령의 상징이자, 죄 사함과 새 생명의 기쁨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이 이를 예표하며,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 사도와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뒤 “새 술에 취했다”라는 비난을 받았던 장면 또한 같은 맥락이다. 즉 성령 강림으로 인해 예언되었던 새 술이 실제로 부어졌고, 이것이야말로 구약의 예언(요엘 2장 등)이 성취된 결과라고 장재형목사는 강조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이 보여 주는 자유는, ‘물 같은 존재’가 ‘포도주’로 변화되어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거듭남의 실체다. 이것이 우리가 이미 이룬 것이면서도 동시에 계속 누려야 할, 그리고 나아가 자범죄의 흔적을 씻어 내는 성화의 과정에서 더욱 완성해 가야 할 삶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미 우리는 새 집에 이사했지만, 과거의 구습으로 인해 이전 집으로 돌아가려는 습관적 죄에 휘둘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깨어 있는 삶을 살면, 점차 그 습관에서 벗어나 점점 더 성결한 모습으로 나아가게 된다”라고 말한다.

이때 ‘죄의 두루마기’를 빨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묵시록(계 22:14)의 이미지가 중요한데, 이것은 칭의 이후에 우리가 게을리하지 말고 수행해야 하는 매일의 회개와 순종의 삶을 뜻한다. 흰 두루마기를 입고 하나님 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다는 비전(계 19:7-8)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최종적인 영광이자 영화(Glorification)의 단계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성도는 이 미래의 영광을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정리한다.

이처럼 로마서 7장과 8장을 연속성 속에서 살펴보면, 구원받은 자가 현실에서 겪는 내적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제공된 거대한 해방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된다. 또한 장재형목사는 이 모든 과정을 총괄해“우주적인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개인의 신앙 여정이 어떻게 통합되는지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죄와 사망의 법을 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그리고 성령의 내주와 인도하심, 그로 말미암는 자유와 환희는 바로 로마서 8장이 가장 심오하게 증언하는 구원의 보화이자 보증이다.

이것이 첫 번째 소주제인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환희”의 전반적 내용이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했듯, 성도들도 칭의를 받아 새 생명으로 탈바꿈했으며, 그 상태를 유지하고 더욱 선명하게 살아내는 힘이 바로 성령이라고 장재형목사는 지속적으로 역설한다. 구원의 핵심은 단지 죄 사함이나 천국 입장의 권리만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성령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 충만한 기쁨, 활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은 결국 구원을 보증하는 열매가 되고, 우리를 더 높은 차원의 영광으로 이끈다.

2.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

앞서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환희”가 로마서 8장의 전반부(1절에서 30절까지)에 걸쳐 펼쳐진다면, 이어지는 31절부터39절은 이 모든 구원과 성령의 역사를 종합하고 결론 내리며, 절정으로 치닫는 장면을 보여 준다. 이 마지막 단락은 흔히“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혹은 “영원한 사랑”에 대한 가르침으로 알려져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두고 로마서 16장 중에서도 가장 웅장하고 확실한 ‘승리의 찬가’라고 칭한다.

먼저 성도의 견인이란, 구원받은 사람이 끝까지 믿음을 지켜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는다는 교리를 말한다. 칼뱅주의 전통에서“성도의 견인”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라는 교리와도 연결되나, 단순히 기계적인 교리적 해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바울은 로마서 8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끝까지 붙드시는 사랑의 능력과 확실성을 증언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해설하면서, “성령 안에서 거듭난 성도들은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 어떤 세력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 없는 굳건한 언약 관계에 들어섰다”라고 강조한다. 이는 구원의 확신과 더불어 우리에게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자범죄로 인한 넘어짐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고, 결코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신다는 약속이다.

그렇다면 이 견인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으니,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라고 반문한다. 즉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절대적인 사랑, 곧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극진한 사랑이, 우리의 구원을 보존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라는 것이다. 우리가 연약할 때, 혹은 신앙적으로 흔들릴 때, 심지어 죄의 습관에 매여 잠시 길을 잃을 때도,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하나님 편의 100% 헌신에 근거한 구원의 보증”이라 부른다.

또한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라는 구절이 말해 주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칭의받은 성도에게는 죄의 정죄 권한이 더 이상 없음을 확실히 보여 준다. 세상이나 사탄이 고소한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우리를 의롭게 선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의 판결은 취소될 수 없다.

장재형목사가 주목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끊을 수 없음’이 곧 방종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그 사랑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사랑을 깨달은 자들은 ‘포도주로 옷을 빨아야 한다’라는 묵시록적 이미지를 기억하고, 더욱 경건과 순종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아는 자는, 그 사랑을 배반하는 길을 택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넘어질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다시 회개하고 돌아와 견인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편에서 결코 끊어지지 않는 언약적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사랑’이라는 표현으로도 설명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랑이 칭의, 성화, 영화까지 이어지는 전 구원의 과정 내내, 성도를 인도하고 지키는 절대적 힘이라고 강조한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셨다”라는 복음의 기초적 선언이며, 이 사실 위에서 로마서 8장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다”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두 축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 로마서 8장 후반부는 마치 구원의 대서사시가 결론 부분에 다다라 울리는 웅장한 합창과 같다. 바울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이 얼마나 견고하며 영원한 것인지를 놀랍도록 힘차게 선포한다. 이 메시지가 주는 위로와 확신은, 우리의 일상적 신앙생활 속에서 커다란 힘이 된다.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성도들은, 계속되는 자범죄와의 싸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성화의 과정을 걸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라는 절대적 약속이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가르침을 삶에 실제로 적용해야 함을 여러 차례 설교와 강의에서 역설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보장된 구원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초월하는 자유와 담대함’을 준다. 세상적 가치나 환경이 우리를 흔들 수 있으나, 결국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 강력하기에, 우리는 어떠한 환난이나 박해도 이겨 낼 수 있다. 실제로 믿음의 선진들, 교회사 속의 무수한 순교자들, 그리고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성도들은, 이 로마서 8장의 약속을 붙들고서 담대히 믿음을 지킨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을 “노아의 포도주 비유”와 함께 연결 지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릴 영원한 기쁨이 이미 이 땅의 성도들에게 예표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노아가 홍수 후 새로운 땅에 발을 디딘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해 마치 심판 이후의 새 세계를 미리 맛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옷을 벗고도 부끄러움이 없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기쁨은 참으로 완전하며, 장차 도래할 천국 잔치의 작은 모형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삶을 지속하도록 붙들어 주는 것이 “영원한 사랑”이다.

또한 이 견인 교리는 우리의 인간적 약함이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구원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교리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선택했고, 죄를 멀리할 의무가 있지만, 여전히 연약해서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이 ‘영원한 사랑’의 본질이다. 하나님 편에서 절대 끊지 않겠다고 하신 언약적 사랑이 있기에, 성도는 언제든지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으며, 끝까지 구원을 지켜 갈 수 있다”고 해설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은 ‘칭의(Justification) → 성화(Sanctification) → 영화(Glorification)’로 이어지는 구원의 전 과정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완성된 상태로 죄와 씨름하는 모습을 7장 후반부에서 현실감 있게 보여 준 후, 8장에 이르러서는 성령 안에서의 자유와 환희의 삶, 그리고 결국에는 성도의 견인, 곧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완전히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조적 흐름이 “신학적 지식”을 넘어 신앙인이 삶으로 체험해야 할 “구원의 서정”이라고 설명한다. 지식으로만 알 때는 피상적일 수 있지만, 실제 삶에서 성령의 거룩한 인도를 경험하고, 매일의 회개와 말씀 묵상을 통해 옛 죄의 습관을 씻어 내며,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끝까지 나를 사랑으로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체험함으로써, 로마서 8장의 진수를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은 우리에게 종말론적 소망도 준다. 이 땅의 고난이나 불안, 그리고 죽음조차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대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담대한 믿음을 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8장이 말하는 최고의 클라이맥스이며, 나아가 복음 전체가 선포하는 ‘승리의 복음’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견인의 교리가 지닌 실제적 효력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교회 역사상 많은 성도들이 낙심의 순간, 혹은 시험과 고난의 때에 로마서 8장 31절부터 39절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의 무릎을 꿇으며, “어떤 것도 우리를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라는 선포로 절망을 돌파했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이 결국은 실제 삶에서의 극복과 승리로 이어졌다. 바울의 선언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승리자이기 때문이다(롬 8:37).

이처럼 두 번째 소주제인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을 통해, 로마서 8장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는 단지 신학적 교리의 완결이 아니라, 실제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를 붙드는 가장 강력한 힘이자 약속이다. 우리는 로마서 8장을 통해 죄의 문제에서 자유와 환희를 경험할 뿐 아니라, 아무리 힘든 상황이 닥쳐도 하나님이 시작하신 구원을 끝까지 온전하게 완성하시리라는 ‘반석 같은 확신’을 얻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로마서 8장은 구원의 드라마가 정점에 달하는 장면이며, 성령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동시에, 마지막에는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위에 굳게 서 있음을 확인해 주는 클라이맥스다. 장재형목사는 이 로마서 8장의 메시지를 붙들면, 성도들이 인생의 여러 전환점을 맞고 비약적인 영적 성장과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아무리 죄의 습관이 견고해 보여도,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보증하기에 소망이 있다.

바울이 로마서 8장 곳곳에서 성령의 역할, 죄로부터의 해방, 자녀 됨의 영광, 우주적 회복, 그리고 견인의 확신을 일관되게 증거하는 것은, 한마디로 “복음의 핵심을 집약적으로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 복음의 결론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의 사역, 봉사, 순종, 심지어 회개와 성화의 노력조차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지 않다면 헛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를 내어 주시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우리가 끝까지 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따라서 장재형목사가 일관되게 강조하듯, 로마서 8장은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그 사랑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역사하며, 우리를 변화시키고, 자유케 하고, 환희를 맛보게 하고, 결국은 영원한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되는지에 대한 전체 과정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언약으로써, 성도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신뢰할 수 있는 반석과 같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정리하자면, 로마서 8장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환희, 그리고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된 위대한 구원의 장이다. 첫 번째 축에서는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고 성령의 내주로 인해 경험하는 새로운 삶의 기쁨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두 번째 축에서는 그렇게 시작된 구원이 궁극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이유, 즉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우리를 붙들기 때문임을 힘차게 선포한다. 이 사랑은 어떤 조건이나 능력, 혹은 우리의 공로에 달려 있지 않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신 대속적 희생과 성령의 인치심이 보증이 된다.

결국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을 공부하는 것이야말로 성도들이 영적 전환과 깊은 회복을 경험하는 핵심 열쇠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다. 구원의 서정을 이해하고, 이미 주어진 자유와 기쁨을 소홀히 하지 않으며, 동시에 어떤 환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견인과 영원한 사랑의 확신을 붙들 때, 우리의 신앙은 한 단계 더 성숙해지고, 더 큰 평안과 능력 가운데 거하게 된다. 이는 바울이 꿈꾸었고 경험한,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동일하게 누릴 수 있는 복음의 실제적 능력이다.

이처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환희’와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이라는 두 소주제로 재구성해 보았을 때, 로마서 8장은 죄의 문제로부터의 해방, 하나님의 자녀 됨의 영광, 우주적 회복의 비전,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끊을 수 없는 사랑 안에 거하는 성도의 견인까지, 복음의 정수와 희망을 가장 웅장하게 드러내는 장이 된다. 칭의, 성화, 영화라는 구원의 전 과정 속에서 인간이 겪는 모든 실존적 갈등과 그것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데 어우러져, 성경 안에서도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이룬다.

결국 로마서 8장의 결론은 “우리에게는 어떤 정죄도 없다”와 “어떤 것도 우리를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로 요약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두 선언이야말로 기독교 복음이 제시하는 가장 확고한 기쁨과 소망의 표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을 듣는 성도들은 지금도 큰 위로와 확신을 얻어, 세상 속에서 빛으로 살아가며,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소망 중에 기다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을 연구하며 설교할 때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죄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포도주가 되어 가는 체험을 하는 것”임을 누차 말한다. 다시 말해, 물과 같은 상태에서 포도주로 변화된 존재가 결코 물로 돌아갈 수 없듯이, 우리도 이미 거듭난 후에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물론 삶에서의 실패나 유혹이 있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근거가 ‘성도의 견인’이며, 우리의 결말이 ‘영원한 사랑 안에서의 완성’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점점 더 죄의 습관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께 가까워질 수 있다.

여기서 죄의 습관을 씻고 정결하게 하는 과정은 결코 단발적 이벤트가 아니다. 이는 매일의 말씀 묵상, 기도, 회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훈련 등을 통해 이뤄진다. 그 과정에서 한순간에 완벽해지지는 않지만, 분명히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생명의 힘이 우리 안에서 작동한다. 로마서 8장이 말하는 ‘성령의 내주’란 결코 추상적인 사상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안의 욕망과 두려움을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만드는 힘이다.

더불어, 장재형목사가 즐겨 사용하는 예화인 노아의 포도원은 이 과정을 조금 더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만들어 즐기는 모습은, 종말론적 구원 이후에 누리는 충만한 기쁨을 상징한다. 그러나 노아가 그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었을 때, 함의 태도와 셈과 야벳의 태도가 갈렸다. 누군가는 아버지의 수치를 들추어내려 했고, 누군가는 그것을 덮어 주었다. 이처럼 구원 이후에도 인간의 다양한 태도가 드러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포도주”는 축복이었고,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무대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열매 맺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로마서 8장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도 우리를 포도주처럼 변화시키며, 그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여러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약속으로 귀결된다(롬 8:28).

마지막으로,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은 곧 “끝까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동행”을 의미한다. 바울이 8장 끝에서 고백한 “내가 확신하노니…”라는 선언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시작하신 것이며, 하나님이 충성스럽게 마무리하신다(빌 1:6 참조). 그 과정에서 성도는 중간에 흔들릴 수 있어도, 결코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그 사랑이 너무나 크고, 죄인이었던 우리를 아들 삼으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실로 완전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로마서 8장의 메시지를 통해, 장재형목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시대적 혼란과 개인적 고통 가운데서도 결코 좌절하지 말고,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환희”를 붙들며, 동시에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사랑”을 신뢰할 것을 강조한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질 때, 우리 신앙은 튼튼한 기둥을 세우게 되고,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영적 유산을 간직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 8장 전 구절에 걸쳐 호흡을 담아 전하려 했던 복음의 핵심이며, 장재형목사가 설교와 강의, 저술 등에서 끊임없이 외치는 신앙의 정수다.

결국 로마서 8장은 ‘복음의 하이라이트’로서 성령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동시에 그 삶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위에 세워져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죄의 짐을 벗고 자유롭게 걷는 성도들이, 혹여나 넘어질까 두려워할 때 바울의 음성이 들린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그리고 이 말씀을 연구한 장재형목사는 확신에 차서 대답한다. “아무것도 끊을 수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안에 있다.”

이것이 로마서 8장의 결론이자,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복음의 정수다. 두렵고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우리는 이 말씀을 다시 깊이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어떠한 상황도 우리를 흔들어 놓을 수 없다는 견인과 영원한 사랑 위에 굳게 서야 한다. 이 복음의 능력이 오늘도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으며,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진리의 빛으로 세상 속에서 빛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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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 장재형(장다윗)목사

1. 사랑의 하나님과 거룩의 전제

장재형(장다윗)목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라는 본질적 메시지를 강조한다. 이는 요한일서 4장 8절에 기록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구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인간이 그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매우 깊고도 넓은 주제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진리는 단순히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성도들이 신앙 안에서 반드시 체득해야 할 ‘본질’에 해당한다. 이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성경이 제시하는 핵심적 전제가 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우리와 거룩의 관계’를 아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사랑의 하나님을 언급하며, 동시에 그 사랑에 필연적으로 전제된 것이 바로 ‘거룩’임을 강조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구절에 마음이 끌리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메시지는 간과하기 쉽다. 사랑을 말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사랑이 거룩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단지 ‘사랑하기 좋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분은 전능자요, 동시에 전적으로 다른 분이시다. 구약 성경에서 모세가 미디안 광야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 3장 5절)고 명령하신 장면이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옛것’을 벗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구별되게 서야 한다. 떨기나무 에피소드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형상화된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셨던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일반적으로 구약의 인물들이 만난 것은 ‘하나님의 사자들’이었지, 하나님의 실체적 현현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세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그 하나님의 형상 같은 모습을 가장 뚜렷하게 체험했다. 그리고 거기서 첫 번째 명제를 배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거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룩은 ‘전적으로 다르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의 생각과 길과 다르다(이사야 55장8절).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분이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시는 초월자이자 창조주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셨을 뿐 아니라 보존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분을 향해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은 그분이 인간에게 “내가 너희를 지었으니 내게 순종하라” 하고 억압적인 요구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분명한 관계 속에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예배적 행위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함이 없으면 로마서 1장에 나타난 죄인들의 전철을 밟게 된다”라고 설명한다. 로마서 1장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며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인간의 타락상을 보여준다. 그 결과는 영벌, 즉 지옥이다. 바울은 이것을 “핑계할 수 없다”(롬 1장 20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계에 대한 증거를 분명히 남겨놓으셨기 때문이다. 자연 만물과 인간의 양심은 물론,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분명한 당위를 깨달을 수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등을 돌리면 심판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어떻게 양립하는가?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동시에 거룩하시다는 것은 전혀 모순이 없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almighty God)인 동시에 기다리시는 분, 곧 어떤 면에서는 ‘powerless God’처럼 보이기도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역사 속에 들어오실 때는 인간에게 강권적으로 무엇인가를 강요하기보다, 인격적인 초청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도록 허용하신다. 바로 그 점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면서 ‘무력해 보이시는 하나님’이라는 양극적 표현이 성립된다. 전능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동시에 인간을 기다리시고 인내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인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거룩과 사랑은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사랑을 바로 이해하려면 먼저 거룩의 전제를 이해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즉, 거룩함 없는 사랑은 방종과 퇴폐로 이어지기 쉽고, 사랑 없는 거룩함은 율법적인 금욕주의나 형식주의로 흐르기 쉽다.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거룩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신약시대에 이르러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골로새서 1장 15절)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인간이 그토록 알고 싶어 하던 하나님의 ‘사랑’이 결정적으로 계시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자 “동일본질”을 지니신 분이시다. 삼위일체 교리 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시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9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신약성도들의 특권인 셈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태복음 6장 9절~10절)”라는 주기도문의 서두는, 바로 이 거룩하신 하나님이 동시에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선포한다. 이는 하나님의 높은 위엄(Transcendence)과 친밀성(Immanence)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하나님은 초월해 계시지만, 또한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아버지로 다가오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요,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기에 우리가 감히“아빠 아버지”(로마서 8장 15절)라고 부르는 특권을 누린다. 그렇기에 장재형목사는 “사랑의 하나님은 곧 거룩의 하나님”이라는 그 전제에 기초하여, 성도들이 점점 더 하나님 앞에 구별된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한다. 세상 속에서 거룩한 생각, 거룩한 행동, 거룩한 말과 태도를 지님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거룩의 자리’가 견고해질 때,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온전히 맺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요컨대,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고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그 거룩을 깨닫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2.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는 사랑의 관계

장재형목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부르면서, 사랑의 궁극적 모습이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 13장 12절)라는 구절에 응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장차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고, 그분과 직접적인 사귐으로 들어가게 될 날이 온다고 선포한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희미하게 볼 뿐이나, ‘그 때’가 되면 완전히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아는 것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결국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신앙의 깊은 교제”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며 궁극적 목적이다.

장재형목사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볼 정도로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이 신앙의 지향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을 안다”라고 할 때, 지식적인 차원에서의 앎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이 부딪히는 관계적 앎이 필요하다. 그것이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부분과도 연결된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완전한 사랑을 누리셨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라는 극심한 고난을 견뎌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안에도 흘러들어오길 원하신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장 34절)는 새 계명을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이 그 사랑을 이웃에게도 전하고 실천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는 관계’라는 표현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체험하는 삶을 말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나셨고, 성막과 성전을 통해 임재하셨듯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성전 자체로 오시고, 또 승천 후에 보내신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는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묻는다. 하나님의 임재란, 그저 교회 건물 안에서만 느껴지는 제도적 종교 활동이 아니라,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아주 역동적이고 실존적인 사실이다. 그래서 성도는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바라볼 수 있다. 기도를 할 때는 하나님께 말하고, 말씀을 읽을 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렇게 매일의 삶에서 소통하는 관계가 바로 ‘인격적인 만남’이며,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본질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이라고 말한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어 대화하는 사람인가? 혹은 종교적 형식에 갇혀 의무감으로만 기도하고 예배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강제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진실한 교감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고백할 때, 그 고백은 생생한 관계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하루를 시작할 때, 길을 걸을 때, 밥을 먹을 때,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언제든지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 기도하고 대화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특권이다. 세상에 다른 종교나 명상법도 있지만, 그곳에는 분명한 기도의 대상이 없다. 그들이 말하는 ‘관상’이나 ‘묵상’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거나 우주적 에너지를 느끼는 것일 수 있지만, 기독교 기도는 ‘전능하신 분’이자 ‘사랑의 아버지’께 말을 건네는 인격적 교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참으로 독특하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주기도문의 첫 구절은, 기도에는 분명한 대상이 있다고 선언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시고,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시며, 동시에 내가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을 만큼 가까우신 분이 바로 그 대상이다. 그래서 작은 기도에도 응답하시고, 우리의 사소한 바람과 염려까지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부모가 자녀의 말을 소홀히 듣지 않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언어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신다. 이 점에서 기독교의 기도는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위로와 능력의 통로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라는 문구를 자주 예로 들며,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하는 가장 분명한 행동”이라고 역설한다. 실제로 성경 속 인물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하나님은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으시며, 다만 가장 선한 때와 방식으로 응답하신다. 어떤 응답은 금방 나타나고, 어떤 응답은 긴 세월이 지난 뒤에야 나타나기도 하지만, 결코 헛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룩’과 ‘얼굴을 맞대는 친밀함’은 서로 결합되어야 한다. 거룩을 상실하고, 하나님을 그저 만만한 분으로 취급한다면, 참된 경외심 없이 기도하게 된다. 또 하나님과 친밀하지 않다면, 그분을 ‘두려운 심판자’로만 여기고 멀리 도망치게 될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두 극단을 경계하며, “거룩하신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라는 균형 잡힌 하나님 이해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고린도전서 13장에 드러나는 사랑의 정수이며, 요한일서 4장에 나타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내포한 은혜이기도 하다. 그분의 사랑이 먼저 임했기에 우리가 그 사랑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3. 주기도문의 핵심 –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나라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 9절부터 13절, 그리고 누가복음 11장 2절부터 4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으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원형적 기도문’으로 여겨진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새해 첫 주일예배에서 “금년 한 해 수없이 반복될 주기도문을 ‘정말 깊이 묵상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기도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세 가지 간구—“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성도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압축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첫 번째 간구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도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그분은 결코 세상적인 의미의 아버지와 동일시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시고, 엘로힘이시고, 아도나이이시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God)’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매우 일반적인 호칭이고, 더 본질적으로는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고유성을 담아내지 못하기 쉽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라”는 기도를 가르치셨다. 이름은 곧 인격과 명예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일컫지 말라”(출 20장 7절)는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조롱하는 말을 쉽게 뱉는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우상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심각한 죄가 된다.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은, 곧 그분의 인격과 권위를 지극히 존중하는 것이다. 그 존중과 경외심이 예배와 찬양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며, 또 삶 속의 순종과 감사로 이어진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 덧붙여, “우리가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살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된다”고 말한다. 예수 믿는 이들이 교회 밖에서 싸우고 분열하고 비리를 저지르면, 세상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 이름”까지 비웃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은 곧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이름이 드러나도록 하는 거룩의 책임이기도 하다.

두 번째 간구인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주기도문의 중심사상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늘나라”였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장 17절)라고 선포하셨고, 곳곳에서 비유를 통해 그 나라가 어떻게 임하는지 가르쳐주셨다. 주기도문에서도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명확히 간구하게 함으로써, 성도들의 기도와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에 맞춰져야 함을 일깨우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죽어서 가는 ‘내세 천국’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미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통치”, 곧 “왕 되신 하나님의 다스림”이 깃들어 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희망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장 20절~21절)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을 통해 이미 우리 마음속에 임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요한계시록 11장 15절)라는 궁극적 완성도 기다리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중적 의미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개인의 구원과 삶의 성결을 통해 “나라가 이미 임한 모습”을 살아내야 하며, 한편으로는 “주의 재림”과 함께 완전히 임할 ‘하나님의 왕국’을 소망해야 한다.

세 번째 간구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이 땅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구현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져 있다. 천사들이 순종하며, 죄나 불의가 일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고백은, 우리 현실의 불완전함과 모순, 죄와 고통이 가득한 환경 안에서도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펼쳐지길 바라는 성도의 간절한 소망을 반영한다. 아모스 5장 24절에서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했던 예언자적 절규와도 맥을 같이한다. 세상은 불의와 부정으로 가득 차 있고, 정치적·사회적·개인적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질서와 반대되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성도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고, 또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6장 33절). 바로 이 ‘의로움’이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단지 머리로만 이해되는 교리가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지침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내가 오늘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쳐내는 삶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일예배에서 이 기도를 한 번 낭송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매일의 삶에서 되새길 때, 성도는 기도와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가르침은 단순한 암송 과제가 아니라, 신앙 여정의 등대 역할을 한다.

장재형목사는 끝으로, 로마서 8장 26절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기도는 인간의 한계 속에서 절박하게 도전받을 때도 있지만, 주님이 분명히 “이렇게 기도하라”고 친히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이 있으니, 그것을 반복하여 묵상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기도의 가르침 속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거룩하며, 동시에 얼마나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인지 깨닫게 된다. 또한 그분이 이 땅에 어떤 나라를 이루길 원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 뜻을 분별하고 동참할 것인지를 배우게 된다. 그렇게 주기도문은 신앙인의 삶을 하나님께로 맞추고, 이 세상의 탐욕과 불안, 죄와 불의로부터 벗어나도록 돕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하기 위해 살고, 그분의 나라가 임하도록 헌신하며, 그분의 뜻이 이 땅에 펼쳐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 목적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목적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방황하고 허무해지며 죄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 목적이 분명해지면,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재물, 명예, 쾌락, 인간관계—등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받은 선물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받을 재료가 된다. 더 이상 그것들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고 우리가 그것들의 노예가 될 필요도 없다. 이처럼 인생관이 바뀌면, 궁극적으로는 삶의 행복과 안식이 찾아온다. 그 안식은 “하늘 아버지의 계획 아래 내가 존재하고, 그분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며, 결국 그분 품으로 돌아간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평안이다.

정리하자면,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주기도문의 핵심 사상은 크게 세 부분으로 집약된다.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기억하며, 그분께 경배와 감사, 순종을 드려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구하라는 것이다. 이 나라는 이미 예수님을 통해 시작되었지만, 재림을 통해 완성될 미래적 왕국이기도 하다. 셋째,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뤄지도록 기도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결국 복을 받을 것이고, 그 정의와 공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세상이 곧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이 땅만이 전부가 아니라, “저 세상(영원)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움직이지만, 동시에 이 땅의 현실에서도 ‘하나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애쓴다. 이런 신앙고백이 바로 주기도문에 담겨 있다.

결국, 새해 첫 주일예배의 메시지에서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왜 사느냐?”라는 근본적 물음에 대한 답을 주기도문을 통해 제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께 감사하기 위해 산다. 나아가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며, 하늘에서 이미 완성된 거룩한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노력한다. 그렇게 살 때,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단순하고도 직설적인 결론이 단지 두려움의 논리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복음으로 다가온다. 죽음 너머 영원한 심판이 있음을 깨닫고, 그 심판에서 건져주시는 구원의 은혜가 ‘예수님 안에 있음’을 안다면, 그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구원의 메시지는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냐”라는 문구를 실감하며, 매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어 보고, 거룩과 사랑이 가득한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해야 한다.

이처럼 성도들이 새해를 맞아 주기도문의 기본 정신에 충실하게 된다면, 개인의 영혼의 만족과 더불어 교회 공동체 안에 진정한 연합이 이뤄지고,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며, 그분의 나라가 실제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만천하에 선포할 수 있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을 아는 자들이 마땅히 달려가야 할 길”이라고 말한다. 주님 안에서 이제 막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이 때, 우리의 기도가 주기도문의 핵심을 품고 있느냐를 되돌아보고, 마음을 다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는 자리까지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님이 이미 약속하신 능력과 응답을 풍성히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곳에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생동하는 역사가 담겨 있다.

제자도 – 장재형목사

들어가며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는 여러 신학적 흐름과 영적 강조점이 공존한다. 이 가운데 장재형(장다윗목사) 목사는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개인 신앙과 교회 공동체 사역의 중심축으로 삼아, 복음이 실제 삶에서 구현되도록 돕는 사역을 펼쳐 왔다. 그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단순히 지식으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성령의 역사,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연합 등을 통해 삶 전반에서 드러나야 할 본질로 이해한다. 특히 그는 교회를 세상과 분리된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는 역동적인 공동체로 해석하면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실천적 방법을 제시한다. 이 글에서는 장재형 목사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그가 강조하는 제자도와 고난, 성령, 교회 공동체, 복음의 본질이라는 핵심 주제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신앙적 통찰과 적용점을 모색한다.

장재형 목사의 배경과 사역 개요

장재형 목사는 복음주의 신앙노선을 견지하는 한국 교회 목회자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면서도 현대 사회가 처한 복잡다단한 문제들에 대한 실천적 해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그는 교회가 예배와 교리를 지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 책임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세상에 복음의 영향력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말씀 중심 교육과 소그룹 운영, 국내외 선교, 그리고 제자훈련을 비롯한 여러 프로그램을 전개해 왔다. 그는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서도 복음을 살아 내도록 독려하며, 이를 위해 서로 돌보고 나누는 공동체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학문적·신학적 토대를 바탕으로 복음주의 전통을 현대화하려고 노력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온 인류에 미친 유일한 대속의 은혜로 보고, 복음 안에서 교단과 교파의 벽을 넘어선 에큐메니컬 협력을 추구한다. 이를 위해 교회가 본질적 복음에 합의하면서도, 서로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여 연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이러한 태도는 지역사회와의 협력, 교회연합운동 등으로 구체화되며, 다양한 사역 형태를 통해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에게도 복음의 손길을 전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뒷받침한다.

장재형 목사의 핵심 키워드

장재형 목사가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주제는 그리스도의 제자도이며, 그 외에도 고난, 성령의 내주하심, 교회의 본질과 사명, 그리고 복음의 실천적 삶이라는 핵심 영역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다. 그는 복음이 제자도를 통해 실천되며, 성령의 능력이 그 제자도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고난을 통해 제자들이 더욱 성숙해진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그 제자들이 함께 모여 서로 돕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공동체이며, 복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체화되고 전파되어야 할 메시지라는 것이 그의 일관된 견해다.

그리스도의 제자도

장재형 목사는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단순한 신학적·교리적 개념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구현되어야 할 헌신의 여정으로 간주한다. 그는 제자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근본적인 태도이며,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삶을 통해 진정한 영적 성장과 열매가 맺힌다고 설명한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명하신 본문을 자주 인용하면서, 이것이 제자도의 본질을 예리하게 보여 준다고 역설한다. 그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마태복음 28장의 지상명령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믿으며,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바로 이 대사명을 실천하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제자훈련을 위해 교회 내에서 말씀 묵상과 기도를 꾸준히 장려하며, 성도들이 말씀을 생활화하도록 돕는다. 소그룹 혹은 셀 단위로 모여 삶을 나누고 말씀을 적용하는 경험을 통해, 교인들은 피상적 신앙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영적 성장에 이른다. 그는 제자도의 여정이 결코 쉽지 않은 길임을 인정하면서도, 이 길을 함께 걸어갈 때 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부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제자도가 한 개인의 ‘신앙 프로그램’이나 ‘수료 증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늘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제자도의 목표라고 말한다. 그는 제자도가 교회 내 작은 모임과 예배, 봉사, 전도, 선교 등 다양한 활동 속에서 살아 움직일 때 교회 공동체가 더욱 견고해진다고 지적한다.

그는 제자도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올바른 신학 교육과 균형 잡힌 교리 해석이 중요하다고 본다. 교회가 잘못된 교리나 극단적 열정에 치우칠 경우, 제자도는 율법주의나 집단주의에 빠져 건강한 신앙 성숙 대신 갈등과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제자도가 단순한 행위주의나 성과주의로 변질되지 않도록, 말씀과 은혜에 근거한 바른 동기 부여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는 진정한 제자도가 개인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온전히 세우며,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통로가 된다고 확신한다.

고난과 영적 성숙

장재형 목사는 고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연적으로 수반된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사도들과 예수님의 삶을 보면, 고난과 영광은 분리되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고난을 통해 인간의 교만이 꺾이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갖추게 되며, 결국 더욱 깊은 신앙을 경험하게 된다고 본다. 야고보서 1장에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권면이 있듯이, 고난은 인내와 영적 성숙을 이끌어 내는 통로라는 해석이다.

그는 교회 공동체가 서로의 고난을 함께 지고 기도하며, 실제로 필요한 도움을 주는 과정을 통해 교회가 더 단단해진다고 설명한다. 욥기에서 욥이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던 모습이나,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안고도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자 속에서 온전해진다고 고백한 장면을 자주 예로 든다. 이 두 인물은 고난을 ‘믿음의 시험이자 성장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결국 하나님의 더 큰 은혜와 능력을 경험했다. 그는 이 점이 현대 신자들에게도 큰 도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신자들이 고난을 단순히 피해 가야 할 불행이나 징벌로 받아들이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자신을 낮추고 더욱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태도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연단을 겪고, 그 과정을 통해 인격적·영적 성숙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교회 내에서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무관심하게 방치해서는 안 되며, 서로 돌아보고 실제적인 도움과 기도를 제공할 때, 교회는 한 몸으로 더욱 결속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교회가 섬김 문화를 형성하고, 사회적 약자나 소외된 계층을 위한 봉사나 구제 활동을 중시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역사

장재형 목사는 성령이 제자도를 실제로 작동하게 하는 동력이라고 본다. 그는 성령이 교리적 설명에 머무는 분이 아니라, 개개인의 삶과 교회 공동체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능력의 원천이라고 강조한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사도행전 2장)이 초대교회의 시작을 알렸듯이, 오늘날 교회가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성령 충만은 일시적 감정 폭발이나 집회에서의 열광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대신,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토대로 삶의 자리에서 거룩과 순종을 실천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에베소서 5장에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근거로, 성령 충만은 매일의 삶에서 감사와 예배, 사랑의 섬김으로 표현되어야 하며, 갈라디아서 5장에 언급된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본다.

그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에 대해서도 강조하면서, 모든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는 본질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정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반대로 은사의 가치를 경시하여 교회가 서로 분열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성령의 인도는 개인적 체험을 넘어, 교회를 하나로 묶어 주고, 세상에 대한 사명을 확장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다.

교회 공동체와 사명

장재형 목사는 교회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구체화하는 공동체로 이해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유기적 몸이므로, 서로 다른 지체들이 협력하여 하나님 나라의 사명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에베소서 1장과 4장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몸 개념이나,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 모습을 통해, 교회가 서로 사랑과 나눔, 기도와 말씀,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열정으로 충만했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교회가 세상과 단절된 신앙 공동체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초대교회가 재산과 소유를 서로 통용하고 이웃을 섬겼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교회가 지역사회와 세계를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는 구제와 봉사, 사회적 약자를 향한 섬김으로 복음의 가치를 실천해야 하며, 이를 통해 교회가 단순히 모이는 장소에 그치지 않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펼치는 움직이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에베소서 4장에 기록된 여러 직분(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을 교회가 잘 구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직분들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봉사와 섬김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므로, 교회가 이를 효과적으로 개발해 나간다면 건강한 리더십과 조직 구조를 통해 보다 체계적인 제자 양성과 복음 전파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그는 교회가 서로 다른 은사와 재능을 가진 이들을 존중하고 협력하도록 장려해야 하며, 교회 내부의 다툼이나 파벌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는 교회 간 연합의 중요성도 역설한다.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세를 과시하거나 교파 간 갈등을 벌이기보다는, 복음 안에서 하나 되는 연합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지역사회 복음화와 해외 선교가 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보다 충실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복음의 본질과 실천적 삶

장재형 목사는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하는 구원의 소식임을 분명히 강조한다. 인간이 죄로 인해 영원한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죄 값을 지불하셨고 부활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으므로, 이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복음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 체현해야 진정한 믿음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야고보서 2장에 등장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문장을 즐겨 언급하며,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기준에 따르려 노력하는 삶이 바로 복음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이웃 사랑과 정의, 나눔과 용서 등 예수님이 몸소 보여 주신 삶의 태도를 일상에서 구현하는 것이며, 교회 밖에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복음이 궁극적으로 개인 구원을 넘어 세상 변혁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교회가 복음으로 무장하고 사회적 불의와 약자를 돌보는 일에 앞장설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체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복음이 세상 끝까지 전해져야 할 대사명인 동시에, 현재 삶의 자리에서 실현되어야 할 일상의 가치라고 설명한다. 교회가 단순한 ‘구원 클럽’이 아닌, 세상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데에는 이러한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종합적 결론: 제자도의 길

장재형 목사의 가르침을 통틀어 가장 핵심이 되는 주제는 그리스도의 제자도다. 제자도가 모든 영역을 아우르며, 복음의 핵심을 현실화하고, 성령의 능력을 실천하게 만들며, 고난을 통해 영적 성숙을 이끌어 내고, 교회를 하나 되게 하여 세상 속에서 복음을 드러나게 하는 구심점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이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해야 하고, 그 명령이 곧 교회의 존재 이유라는 사실을 거듭 상기시킨다.

그는 제자도가 결코 쉬운 길이 아님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모든 신자는 이 길에 서야만 진정한 의미의 신앙적 성장과 공동체적 성숙을 맛본다고 말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은 고난과 시련을 동반하지만, 성령의 내주하심과 교회 공동체의 도움을 통해 그 고난이 풍성한 열매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자도는 따라서 나 홀로 사는 신앙이 아니라, 교회라는 몸 안에서 함께 성장하고 서로를 돌보며, 또 세상으로 파송되어 복음을 전파하는 열린 구조로 이해된다.

신학적 기여와 현대 교회적 의의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는 현대 교회가 직면한 세속화, 개인주의, 물질만능주의 등의 도전에 대한 한 가지 유효한 해답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제자도와 고난, 성령, 교회 공동체, 그리고 복음의 실제적 적용을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써, 교회가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돕는다. 그는 교회를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는 모습으로 세우고, 성도 각자가 교회의 본질을 구현하는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되새긴다.

그의 가르침은 한국 교회를 넘어 세계 교회도 함께 고민해야 할 제자도 회복의 길을 제시한다. 많은 교회가 프로그램과 행사 중심의 성장 방식에서 탈피해, 본질적인 복음과 제자도에 초점을 맞추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장재형 목사의 제자도 중심 목회는 이러한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그는 교리적이며 영적 체험을 중시하되, 행함으로 이어지는 실제 신앙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교회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실천적 모델이 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성경 구절과 예화

그리스도의 제자도와 관련하여, 그는 마태복음 28장의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말씀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이는 교회가 추구해야 할 절대적 목표이자, 모든 사역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제자도가 헌신과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는 본문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다.

고난과 인내를 예화로 설명할 때는 욥기와 바울의 ‘육체의 가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욥은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버리지 않았고,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것이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그 과정을 통해 영적 성숙에 이르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한다.

교회 공동체와 성령의 역사와 관련해서는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핵심 본문으로 제시한다.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각기 다른 언어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회심자가 나타나며 초대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는 초대교회의 기적적 성장 배후에는 성령의 역사와 함께, 말씀과 기도, 나눔과 사랑이 어우러진 ‘코이노니아’의 삶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실천적 제안과 적용

장재형 목사의 가르침은 개인 신앙생활, 교회 공동체, 그리고 지도자 양성이라는 세 영역 모두에 두루 적용할 수 있다. 그는 개인이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려고 고민하는 과정을 소중히 여긴다. 기도 역시 자기 문제만을 위한 간구가 아니라, 교회와 이웃, 더 나아가 나라와 민족, 세계를 위한 중보 기도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본다.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는 소그룹 활성화를 핵심 전략으로 삼는다. 소그룹을 통해 교인들이 서로의 삶과 신앙을 나누고, 말씀과 기도에 더욱 밀착할 수 있으며, 실제적인 돌봄과 봉사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교회는 연령과 상황에 따라 다른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 새신자나 청년, 직장인 등이 각각 제자도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선교와 구제, 봉사 프로젝트 등 교회가 함께할 수 있는 실천적 활동을 마련해, 제자도로 훈련받은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세상 속에서 복음적 삶을 실천하도록 이끈다.

지도자 양성 영역에서는 목회자뿐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에게도 비전을 부여한다. 교회 안팎의 여러 사역을 감당하고, 성도들을 돌보며, 지역사회를 복음으로 섬기는 과정에서 다양한 리더십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그는 건강한 리더십을 세우기 위해 정기적인 수련회와 멘토링 체계를 구축하여, 말씀과 기도로 무장된 리더들이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격려한다. 이를 통해 교회는 제자도를 보다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인적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마무리: 실천하는 복음으로의 초대

장재형 목사는 복음이 지식이나 교리로만 머물지 않고, 실제 행동과 태도로 이어지는 길을 ‘제자도’라고 부른다. 그는 이 제자도의 길에 성령의 능력과 교회의 연합이 더해질 때, 고난도 성도의 영적 성장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제자도를 통해 개인 신앙과 교회 공동체가 동시에 성숙해 가며, 그 결실로서 세상에 복음의 빛을 전하는 일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그는 초대교회의 역동적 모습을 언급하며, 교회가 그 본질적 DNA를 되찾을 때 세상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거창한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보다, 말씀과 기도에 충실하며 서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상의 작은 모임에서부터 진정한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부르심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일상적인 순종이다.

참고 및 정리 방식 안내

이 글은 장재형 목사의 주된 가르침과 설교, 그리고 복음주의 신앙 노선을 지지하는 한국 교회의 특성을 토대로 제자도, 고난, 성령, 교회 공동체, 복음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성경 인용은 주로 개역개정판을 기준으로 하되, 문맥에 맞추어 일부 구절은 요약하여 제시했다. 실제 교회 현장에서는 이 내용이 더욱 구체적이며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으니, 장재형 목사의 저서나 설교 자료, 영상 콘텐츠 등을 참고하면 보다 직접적인 이해를 얻게 될 것이다.

이 글에 담긴 모든 제안은 어디까지나 기본 원리에 대한 것이므로, 실제 적용 시에는 각 교회와 성도들의 상황과 필요를 고려해야 한다. 제자도는 교회마다, 그리고 성도 각자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지지만, 그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과정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렘브란트 작품과 사순절 묵상(장재형목사의 ‘십자가의 길’)

렘브란트 작품과 사순절 묵상(장재형목사의 ‘십자가의 길’)

장재형목사(장다윗목사)의 십자가의 길을 읽어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 I – 다 이루었다’라는 제목으로 장재형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요13-19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읽으며 먼저 소개하고 싶은 렘브란트의 작품은 ‘갈릴리 호수’, 그의 유일한 바다풍경 그림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림 속에는 14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 작품입니다. 그의 화풍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이 인물들 중 일부는 아마도 렘브란트 자신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갈릴리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지역으로, 이곳은 이스라엘에 있는 담수 호수이지만 전통적으로 바다로 불려왔습니다. 게네사렛, 디베랴 등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 갈릴리는 성지순례객들이 매우 감격해하는 곳 중 하나입니다.

이 갈릴리 호수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마가복음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양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많아 실제로는 많은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3년간의 공생 기간 동안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며, 이는 매우 짧은 시간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폭풍은 예수님과 12명의 제자들이 주요한 주제입니다. 이 12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분들로 이 중에는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도 포함됩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갈릴리호수 북쪽의 가버나움 동네에서 어부로 일하던 사람들입니다.

이 때 폭풍우가 일어나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신 것을 깨운 제자들은 위험을 알리며 살려 달라고 외쳤습니다. 이 상황은 렘브란트가 작품으로 그렸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바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바다에 대한 지식이 예수님보다 더 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폭풍이 일어나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워 구원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이 피곤하셨을 때 그 배에 누워 쉬고 계시던 것을 상상하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의 끝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장재형목사의 사순절 묵상집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를 향한 사랑임을 깨닫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감리교에서 동성애자를 축복하고 제명하고 출교시킨 사례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우리가 현재의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가요? 나 자신도 나 스스로를 사랑하기 어려운 존재로서 죄인이 아닌가요? 현재의 모습이 사랑스럽고 만족스러운 것일까요?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이 나의 이런 모습도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요?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실까요?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일까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임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누가 저주받기 위해 태어나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르며 태어나지만, 그 사람이 다른 길을 택하거나 주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폭풍이 일어났지만 제자들은 놀라지 않고 예수님이 주무시는 모습을 그려낸 화가가 렘브란트입니다. 렘브란트의 몇몇 작품을 보고 장재형목사의 사순절 묵상집 ‘십자가의 길’도 함께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작품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바다의 폭풍을 잠잠케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무엇이 바다의 풍랑과 같을까요?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우리의 길과 진리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에게는 새로운 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길임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 삶이 우리를 위한 사랑이고, 섬김이었고, 그의 죽음과 부활까지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주님과 제자들은 이별을 맞이해야 합니다.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과 안네스의 뜰, 그리고 빌라도의 관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돌아보면, 제자들은 정말 많이 무지했던 것 같습니다. 이를 어떻게 말할까요? 아마도 신앙이 너무 어렸을 것입니다.

몸은 커서 성인이 되었고, 직업은 어부인 이들이 갈릴리 호수에 있었던 제자들은 감당할 수 없는 폭풍에 직면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재능이 있고 인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도 우리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에 힘입어 가능합니다. 장재형목사도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야함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작은 것 하나까지도 그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누군가와 교제하며 살아가야 하지만,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의심스럽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의문입니다. 아마도 이런 생각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막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함께하는 동료가 나를 사랑하거나 미워한다는 것을 따지는 것은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 아이가 사춘기에 들어가면서 아빠를 사랑해? 이런 말을 안 합니다. 자신이 해야 할 공부를 하고 자신이 할 일을 하며 친구들과 놀기가 이 아이의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중학생을 둔 부모들이 나를 누군가가 미워한다고 말할 때인가?

어쨌든, 세족식 때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동안 그들에게 보여주신 것들이 다 있는데도 그들은 서로 낮아지고 섬기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주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장재형목사의 묵상집을 읽어보며 예수님의 절절한 섬김을 배우게 됩니다.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니까 이제는 몸으로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음에는 렘브란트가 그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님’과 장재형 목사의 사순절 묵상집인 ‘십자가의 길’의 내용들을 함께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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