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장다윗 목사) 사순절 40일 묵상집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장재형 목사 사순절 묵상집
장재형 목사

이 글은 미국의 장재형 목사(장다윗 목사, 올리벳대학교 설립)의 2003년 부터 2008년까지의 사순절 기간 장목사가 사순절 묵상을 위해 설교한 내용을 그의 편집해서 낸 ‘십자가의 길’중 요한복음 19장을 다룬 ‘빌라도의 심문’이라는 챕터를 묵상하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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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은 부활절 전, 주일을 빼고 재의 수요일부터 40일의 기간을 의미한다. 사순절 묵상은 예수를 믿는 우리 신앙이 깊어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사순절 묵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길 그 토록 고대하던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왔지만 그들 안에 있는 증오와 살기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라고 장재형목사는 이야기 한다. 빌라도 조차도 그분이 죄가 없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로마의 총독이었던 자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자가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민이라 스스로 믿었던 자들, 뿐만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의 선민이었던 자들인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라고 하는가?

요한복음 18장

18: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8:40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사순절이면 어느 교회에서건 사순절 묵상으로 이 부분을 읽을 것이다. 이 앞에 글에서 언급했지만 빌라도는 유대의 전통을 알고 있었다. 유월절이 되면 대제사장이 한명을 자유롭게 해줬는데 39절의 이 말은 ‘예수를 놓아 주길 원한느냐’ 였다. 하지만 요한복음 18장 40절 유대인의 외침이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를 죽이길 원한다” “우리는 예수가 죽기를 원한다” 와 같은 외침이다. 빌라도 조차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는데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유대 선민들은 얼마나 더 잘알고 있었을까? 그런데 그들은 알고 있었지만 또 알지 못했다. 이게 너무나 중요하다. 신앙이 뜨겁고 신념이 강할 수록 더 크게 빗나갈 수 있고 더 크게 증오에 바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순절 묵상은 특히 신앙인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오늘은 기술이 발달해서 AI로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도 하다. 심지어 가짜를 진짜 같이 만들어 내기도 하는게 그게 언듯 보기에는 그럴싸하다. 내 지인이 임영웅씨가 부르는 찬양이 있다면서 그 링크를 보내줘서 들어본적이 있다. 뭔가 어색하긴 하지만 임영웅씨가 안 부른 것도 아니라는 그런 애매 모호한 음성이었다. 그냥 들으면 ‘임영웅씨가 찬양도 부르는구나’ 할 정도인거다. 그런데 이게 AI가 만든 거라는 거였다. 이 때 나는 너무나 큰 충격에 빠졌다. 사순절 묵상과 무슨상관인가? 매우 정치적이었던 빌라도의 심문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들어가보자.

2024년 11월에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벌써 부터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선 후보들이 치열한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고 하더라. 지난 번에 대선에서 경쟁을 한 두 사람이기 때문에 올해 두 사람의 경쟁은 더 볼만 할거다. 세계의 초 패권국가인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 온다. 이걸 부인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 만큼 미국이라는 나라는 세계에 영향력이 큰 국가이다. 기술의 발달이 이번 대선에서 무슨 영향을 미치게 될까?

바로 AI를 가지고 허상의 이미지를 진짜 같이 만들어서 온라인에 배포를 하고 이를 선거 표심에 영향을 주게 되는 거다. 가령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번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최종 결정이 되었는데 거침없는 언사로 유명하지 않은가? 그를 지지하는 이들은 그를 지지하는 이유가 있을 거다. 그리고 민주당의 조 바이든 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들 또한 그를 지지하는 이유가 있을 거다.

대체로 자신의 지지 층이 있기 마련 일텐데 트럼트 전 대통령이 흑인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것을 AI로 만든 다음에 이것을 인터넷에 확산 시킨다는 거다. 흑인과 어울려 사진찍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현재 트럼프 전 대통령은 여러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우리 나라의 이재명대표 처럼 말이다. 그래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싫어하는 이들은 이가 경찰에 쫓기고 잡히는 장면을 AI로 만들어서 확산 시킨다.

이 두 사진이 가짜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까? 이게 진짜라는 것을 사람들이 곰곰히 생각해볼까? 사실 확인을 하려고 할까? 그게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조작된 사진, 조작된 증거를 본다 하더라도 그게 조작되었다는 것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그 조작된 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전혀 없어서 정치 관련된 뉴스를 거의 보지를 않는다. 인터넷 신문에 들어가서 헤드라인 기사 정도만 간단히 읽는 정도이지 그것을 클릭해서 구체적으로 읽고 관련 기사를 찾아보고 하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

정치는 게임과 같다. 내가 하는 게임이 아니라 상대방이 하는 게임에 중독되는 거다. 기독교에도 정치가 존재한다. 교단 정치, 노회 정치치, 교회 정치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교단 안에서도 정치를 해야 하고 노회 안에서도 정치를 하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치라는 것은 불가근 불가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치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지만 또 그것에 너무 큰 관심을 가지면 허송 세월 하게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의 정치야 중요한 것이지만 기독교 안에서의 정치는 별로 중요한게 아니다. 왜냐? 우리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교단의 총회장이라고 해서 노회와 교회에 무슨 영향을 미칠 수 있단 말인가? 아무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정말로.

세상의 정치가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활과 관련된 입법이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게 가장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입법에 관련된 것을 찾아 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그것을 언제 다 하고 있나? 그러니 차라리 방관자가 되고 투표나 열심히 하는게 나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이라면 정치인 답게 행동하고 본을 보여야 하는데 우리 나라 정치는 매력젹이지가 않다. 유럽의 어느 나라 처럼 국회의원에게 주는 돈을 대폭 축소하고 권한까지도 분산 시키면 인기 없는 직업이될 텐데 이게 우리 나라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최근 대선 후보로 나왔었던 분을 만나서 차를 마셨다. 꿈은 가지고 있지만 현실이 되기 어려운…정치도 게임 처럼 중독이 된다.

위에 사진에서 보듯이 우리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더 잘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잘 못된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것에 더 확고한 증거를 쌓으려고 하는 데 그 증거가 거짓이더라도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민족의 특성이 그런지 몰라도 굉장히 선동에 약한 부분이 있다. 선동에 약하니 정치가 선동적으로 가는 거다.

자 이제 요한복음 19장이다. 사순절에 정말 이 장면을 많이 읽어왔다. 이 장에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 메달리심 그리고 운명하심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묵상하기 어려운 장이라고 생각한다. 장재형 목사도 사순절 묵상집에서 이 부분을 읽을 때 마음에 오는 슬픔과 고통이 큼을 여러 번 언급한다. 문이 있다면 열고 들어가기 싫은 문이다. 하지만, 이 문을 열고 들어가만 한다. 그래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귀한 것들이 있다.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장면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인류와 역사를 사랑한 하나님의 아들의 크신 사랑을 이 장을 통해서 볼 수 있게 된다. 문을 열고 들어가보자.

요한복음 19장 1절로 3절

19:1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19:2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19:3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채찍질을 당하고 군병들은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힌 후 조롱했다.

이것을 보고 계시던 성부 하나님은 어떠셨을까? 우리는 이것을 몇 가지 다른 시각에서 볼 수도 있다. 하나는 성부 하나님의 시각, 그리고 이 장면을 바라 보는 유대인들의 시각, 이 자리에 요한이라는 제자가 있었기 때문에 요한이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예수님의 시각 마지막으로 나의 시각이다.

성부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자

마가복음12장

12:1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12: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12:3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2: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12: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12:6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마가복음 12장 6절에 나온 것이 바로 성부 하나님의 마음이다. 사순절에는 내 마음 내려놓고, 아버지의 마음을 더 생각해봐야한다. 아름다운 포도원이 있었는데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다는 거다. 그리고 때가 되어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을 받으려고 종을 보냈는데 종을 잡아 심히 때렸다는 거다. 다른 종을 보냈는데 또 농부들은 종을 능욕하고 또 종을 보냈는데 그를 죽이고 많은 종들도 때리고 죽였다는 거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나? 이 농부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 뿐이다.

주인이 농부를 죽이는게 상식적이다. 칭키스칸이라는 몽골의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진 제국에 자신의 사신을 보냈다고 한다. 400명 정도의 상인과 사을 보내면서 나는 칭기스칸인데 너희들 내 밑으로 들어와라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자 그들은 칭기스칸의 사신을 모조리 죽여버렸단다. 다시 칭기스칸이 같은 수의 사신을 또 보냈는데 이번에는 머리 카락을 다 잘라버린 후 돌려 보냈다고 하더라. 그 다음에 칭기스칸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와서 그 나라를 완전히 섬멸시켜서 이 지구상에서 아예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이게 호라즘 왕국이라는 곳이다.

보통 이러지 않은가? 강대국을 무시했을 때 전쟁이 일어나고 약자는 전멸하고 종이 되는게 역사에 일반적인 흐름이다. 계속 해서 애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정말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보낸 많은 종을 때리고 모욕하고 능욕하며 죽인 농부들에게 마지막으로 죽음의 신을 보내는게 아니라 자신의 아들을 보낸다. 사순절 묵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길을 바라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해보라.

마가복음12장 6절

12:6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내 아들은 공경하겠지? 내 아들이라고 알아보고 그들이 잘 따르겠지? 하지만 꿈의 배반이 온다. 마치 유다가 사랑의 배반을 하듯 그 선민들도 유다를 닮아서 사랑의 배반을 한다.

마가복음 12장 7절

12:7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12: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상속자를 죽이자. 사순절 묵상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이다. 죽이자. 죽임. 상속자를 죽이고 우리가 그의 포도원을 빼앗아 버리자. 예수님을 이야기 하는 거다. 그런데 농부들 안에 어떤 마음이 있는가? 포도원이 무엇인가? 농부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로 보면 유대인들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그들이 지킨 것이 무엇인가? 성전이라고 하자. 예배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자. 그런데 그들이 성전을 통해서 무엇을 하는가? 자신의 유익을 구한다. 자신의 배를 부르게 하고 자신의 부를 축적하고 로마와 결탁한다.

이를 지키기 위해서 그들이 하는게 무엇인가? 이 포도원을 빼앗아 버리자. 내것이 되게 하자. 이 포도원을 사유화하자. 이 포도원을 영원이 내것이 되게 하려면 상속자를 죽여버리자. 이 농부들은 상속자를 상속자로 알아 봤다. 추측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인가? 몰랐다는 것인가? 알았다는 거다. 마가복음 12장을 보면 그들이 상속자를 상속자로 알았다는 거다. 아들을 아들로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상속자를 죽였다. 왜? 포도원을 빼앗아 버리기 위해서 아들을 죽인거다. 사순절 묵상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이 죄가 우리 안에도 있다는 것이다.

빌라도가 예수님이 죄가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대제사장들도 마찬 가지였고 유대인들도 마찬 가지였다. 그들은 예수가 죄가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고 제자들의 고백을 통해서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율법을 찾아 보지 않았겠는가? 예언서를 찾아 보지 않았겠는가? 그들은 예수가 상속자임을 알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하시는 것들을 보고 그들은 그가 그리스도임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 성전을 빼앗기게 생겼으니 그를 죽이고 성전을 빼앗아 버리자라고 했던거다. 이게 사순절 우리가 묵상할 것이다.

이들이 누구인가? 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할때 손으로 때릴 때 예수님을 보호해야 할 자들이 아닌가? 그들의 주인이 아닌가? 종들이 오히려 상속자의 죽음을 당연시 여기는 이 참혹한 역사의 한 장면을 봐라. 인간이 타락하면 여기까지 오게 된다. 누구까지 죽이게 되는가?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죽이는게 인간이라는 거다. 요한은 이것을 기록하고 있다. 사랑의 사도는 사랑을 배반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악한 행위가 무엇인가를 써놨다. 그것은 자신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해서 이 땅에 그들을 죄의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해 온 메시아를 그들의 손으로 죽이는 장면을 써놨다.

어제 뉴스에서 보니 2011년 후쿠시마 온천이 폭발을 했는데 원자로를 폐쇄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을 하면서 원자로 안으로 로봇을 들여 보내 그 내부를 촬영한 뉴스가 나왔다 그러면서 죽음의 원전이라고 했던가…가장 무서운 장면이라고 표현하더라. 그 뉴스를 보면서 내가 생각났던게 우리의 죄가 원전 보다 더하다는 거다. 저렇게 무서워서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고 로봇을 개발해서 사고가 난 장소로 들여보내고 그곳을 파악하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은 눈물 겹지만 원전보다 더 무서운게 우리의 죄가 아닌가? 그런데 우리의 죄를 우리가 그렇게 무서워하는가? 죽음 보다 죄를 더 무서워하는가? 아니다. 너무나 죄에는 익숙하다. 죄에 무디어지고 원전 사고는 무서워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이 우리에게 있다. 사순절에는 이러한 모습을 더 깊이 알아가야한다.

일본산 생선에 후쿠시마 원전의 열을 식히는데 쓰인 그 물을 바다에 방수하고 있는데 그것에 생선이 방사능 오염이 되었을 테니 우리가 먹으면 방사능 오염된 생선을 먹어 큰 일 난다는 뉴스가 나온다. 옛 날에 광우병 사태가 생각나더라.

오염된 생선이네 아니네를 따지자는건 아니다. 인간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타인의 생명까지도 소중이 여기는 존재라는 거다. 나의 생명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생존권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 할 줄도 아는 존재가 인간 아닌가? 지구를 위해서 환경 운동하는 그린피스도 존재하고 동물의 생존을 위해서 북극곰을 지키기 위해서 운동하는 단체도 있지 않은가? 유럽 어느 나라에서는 살아 있는 생선을 바로 칼로 죽인 후 음식을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왜냐고? 생선이 고통을 느낄 거니까 기절 시킨 후 고통없이 죽여야 한다는 거다. 그렇게 타인을 배려하고 심지어 생선까지도 배려하는 존재가 인간 아닌가? 그렇게 고상한 존재가 인간 아닌가? 그런데 왜 예수는 죽였는가? 죄로 인해 죽어가는 자기 자신은 왜 돌아보지 못하는가? 나는 아니라고 할건가? 사순절이니 더 정직하게 나를 돌아보자.

요한복음19장4절로 5절

19: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더라

19:5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고 가시관을 쓴 33세의 젊은 청년 예수, 빌라도는 이런 예수님을 군중 앞에 보이면서 죄가 없다고 한다. 로마의 총독이 예수는 죄가 없다고 한다. 이방인이 죄가 없다고 한다. 빌라도는 어떤 자인가? 아주 흉폭한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는 예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고 다시 말 한다. 죄가 없는데 너희를 돌이키기 위해서 내가 채찍으로 그를 쳤다. 이 고통스러워하는 젊은 청년을 보라. 너희 마음에 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지 않느냐? 이 사람은 죄가 없다. 이게 빌라도의 외침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어떤가? 동정의 마음이 없다. 이 흠없는 어린양의 피를 보고도 그들은 동정심이 생기지 않고 오히려 뭐라고 하는가?

요한복음 19장 6절

19:6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 이 말은 너무나 우회적이다. 우리에게 쉽게 와닿는 직접적인 표현으로는 “예수를 죽여라”이 말이다. 이 말은 빌라도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었던 자들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 외침이 빌라도의 관정에서 크게 들린거다. 이런 잔인한 외침이..

“예수를 죽여라” “예수를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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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 사순절 묵상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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