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나서…로마서 1-2

장재형 목사 로마서 강해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시작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인생임을 말하고 있다.

장재형 목사 로마서 강해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내 인생이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라는 깊은 고민에 빠져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내 인생을 시작한 사람이 내가 아니니, 내가 나의 인생을 시작한 사람이 아니니, 내 인생이 어디서부터 왔고, 어떤 목적과 이유로 시작된 것인지에 대한 답이 내 안에 있을 턱이 없다. 인간은 너무나도 철저히 결과적인 존재인 것이다. 내 안을 온통 뒤져보아도 그 답이 없었다. 없을 뿐 아니라, 점점 더 깊은 무지에 빠져들어만 가는 것 같았다. 그 답답함과 절망감이란…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데, 어떻게 하루하루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마치 첫 단추가 제대로 끼워졌는지를 알지 못한 채, 그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다음 단추들을 열심히 채워간다는게 너무나 힘겨운 그런 무기력함과 허무함이라고 할까.

이전에 ‘정글’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 깊고 깊은 열대우림에서 길을 잃은 한 사람의 실화를 담은 영화였다. 사실 그 영화는 나에겐 공포영화였다. 길을 잃은 사람안에 그 공포와 불안을 따라가다보니 식은땀이 흘렀다. 주인공은 방향을 알지 못하는데 날마다 전진한다. 그러니 이 전진이 오히려 나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전진일지도 모른다. 열심히 가다가 가다가 결국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구나를 깨달았을 때의 공포감이란…..숨막히는 고통이다. 그 영화를 보면서 어쩌면 나의 인생이 그런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까지 가는 것인지를 모른채 하루 하루를 살면서 그저 막연히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헛된 소망일 뿐이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인생은 주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고린도전서도 그렇게 시작한다.

고린도전서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갈라디아서 1:1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갈라디아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장재형 목사의 로마서 강해의 처음부분은 이러한 점을 강조한다. 혹자는 나를 나되게 한 것이 어떤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가장 쉽게는 부모로 말미암아 내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부모나 조상, 아니면 나의 인생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 누군가로 말미암아 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조상이나 부모도 사실 궁극적인 원인이 될 수는 없다. 사람이 사람의 원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누구나 결과적인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자신의 삶을 너무도 정확히 정의했다.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오직 나의 인생은 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시작하셨고, 나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그토록 아름답고 선하신 뜻을 따라 나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셨고, 나를 시작하셨다고… 이렇게 너무도 분명한 창조가 있었고, 시작이 있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분은 나를 시작하셨을 뿐 아니라, 이보다 더 선하고 아름다울 수 없는 가장 좋은 삶의 길로 그렇게 인도하시고, 가장 최고의 사랑으로 나를 이끄시며, 나를 날마다 지키시고 보호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 내가 쓰러지면 나를 일으키시고 내가 더럽혀지면 나를 씻기시고 내가 사망으로 떨어지면 나를 구원하셔서 반드시 나를 온전케 하시는 그런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사도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당신의 영광과 아름다운 나라의 모든 것을 상속해주시며 그토록 좋은 당신의 품에 영원히 거하는 삶을 온전히 누리도록 나와 끝까지 동행하시고 날마다 인도하시는 온전한 사랑의 주님이심을 사도는 말하고 있다.

장재형 목사의 로마서 강해 책을 읽으며 나의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분명해진다. 이런 주님의 예정하심, 이런 주님의 부르심, 이런 주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나의 인생임을 마음 깊이 깨달아가며, 나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하며, 기쁜 것인지를 알아간다.

예수만이 진리이며 나의 삶의 길이며 생명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믿는자들안에 있는 영적 교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

여정은 결코 무겁고 짐스러운 것이 아니라,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며 가치롭고 소중한 과정이리라…우리를 사랑하시되 이리도 온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속에 빠져 한걸음 한걸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2장 강해를 통해 믿는 자들 안에 있는 ‘영적 교만’ 에 대해서 말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이 항상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모습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영적 교만이 내 안에 스며들어와 결국 나를 침몰시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랜 시간 다른 사람을 지도하고 인도해 왔던 사역자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선행이 많을수록 공로가 많을수록 위험할 수 있는 것이다.

영적 교만이란 무엇일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향한 멸시의 마음과 동시에 스스로를 향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지옥의 불쏘시개와 뗄감으로 사용될 자들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우리 안에 있는 남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서고 싶은 교만스러운 욕망이 생각이상으로 너무나 강렬히 뿌리박혀 있지 않은가 생각해보게 된다. 다른 사람을 인도하거나 어떤 일을 결정하는 자리에 서는 사람일수록 이 교만을 깊이 바라보지 않으면 안된다. 마치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더 우월한 존재라는 착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의 통찰은 참 대단하다.

이런 교만을 뿌리로 하는 수 많은 습관들이 우리 안에 있을 것이다. 이 습관을 따라 생각없이 살다보면, 예수를 늘 말하면서도 막상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삶을 살게 될 수 있다. 습관을 따라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행동들, 그리고 말과 생각들… 이런 것들이 진정 겸손의 왕이신 예수로 충만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히도 성화의 길을 걸어가야 하리라…

예수의 십자가를 날마다 바라보며 사랑하며 그것을 닮아가는 성화의음을 내딛는 그 삶이 어찌 고되기만 할까.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그 사랑의 힘이 우리가 인도하시는데 그것이 어찌 절망으로만 얼룩진 삶일 수 있으리라…우리의 넘어짐마저도 함께 하시며 날마다 동행하시고 지키시는데, 성화의 길이라는 것이 어찌 고독과 외로움의 연속이라 할 수 있으랴…

마치 에덴에 있었던 계명이 우리를 속박하고 우리를 시험하며 잘못을 하기만 하면 바로 심판을 내리시려고 하셨던 그런 두렵고도 괴로운 것이 아니었듯이, 오히려 우리를 사랑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그 사랑을 위해 자유를 허락하시고, 자유를 가지고 방종으로 흘러갈까 걱정하시며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 우리를 정결하고 깨끗하게 올바르게 키우시려고 계명까지 세워주셨던 끝이 없는 사랑의 표현이었듯이….

그렇게 오해가 벗겨지고 사랑에 눈을 뜨고 나니 계명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를 지켜주는 소중한 것으로 계명이 다가오게 되었다. 더이상 나의 자유를 빼앗고 나를 정죄하며 나를 더욱 죄짓게 부추기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예수로 말미암아 그 사랑을 알고 나니, 계명이 나를 향한 주의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성화’도 그러하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까지는 좋은데, 선물과 같은 은총을 거저 받는다는 것은 너무도 행복한데, 어느 순간 성화의 과정이 짐스럽고 절망스러우며 외로운 길이 되었다. 나의 힘으로 악한 습관을 벗고 거룩해져 가려고 발버둥쳤지만 절망이 겹겹이 쌓이며 끝없이 참아야만 그런 과정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복음에 하나하나 눈떠가며 성화의 과정이 너무도 따뜻한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과정이라는 것이 마음 깊이 다가왔다. 내 안에 구석구석 깊숙이 자리잡아 그 정체를 온갖 다른 것으로 위장하고 숨어 있는 교만의 흔적들까지도 하나하나 벗기시고 온전케 하시는, 끝까지 책임지시는 그 사랑이 너무나 크다.

그 사랑을 믿지 못하는 불신을 날마다 내려놓고 장차 다가올 영광에 대한 소망을 품으며 내 모든 것을 주께 내어맡기고 주의 진리를 따라 나아가는 그 과정보다 위대한 인생이 있을까? 나 하나를 향하신 주의 사랑은 그토록 나를 소중하고 귀한 존재로 대해주시고 보배롭고 존귀하다 칭해주시고 헤아릴 수 없이 가치롭다 여겨주신다.

그 사랑이 내가 가는 모든 성화의 길의 원동력이고 내가 날마다 전진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며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밖에 없는 근거이다. 내가 잘되길, 내가 온전케 되길 나보다 더 더 바라시는 주가 계시고, 그렇게 나를 반드시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주의 음성이 있는 한 나의 삶엔 어떤 절망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이구나. 한없이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시각을 가지고 살아왔던 나에게 복음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놀라운 능력이다.

그러므로 이제 내 안의 죄에 대한 폭로가 두렵지 않다. 그리고 말씀에 비추어본 내 모습은 매우 심각하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서 있음이 드러날 때, 안심한다. 그렇지 못할 때, 두렵다. 물론, 내 안에 나보다 다른 이가 더 빛나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이 있다. 그의 기쁨이 진심으로 나의 기쁨이 되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죄적인 모습도 있는 것이다.

두려움의 많은 부분이 교만에 기인한다. 교만으로 빚어지는 수많은 빗나간 감정들이 있다. 아버지의 기쁨에 진정으로 동참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슬픔에 진정으로 동참하지 못하는 아들답지 못한 나의 모습들이 있다. 아들다운 아들이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삶이다. 이것이 내 삶의 시작점이고 내 인생의 목적이다. 너무나 본능적으로 높아지려는 교만이 있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파괴하고 우리의 삶을 빗나가게 하는 그 지점이다.

유대인들 안에 이방인을 향한 멸시와 경멸… ‘너희는 지옥이고 나는 천국이다’라는 이 영적 교만의 모습은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수록 오히려 더 짙어지는 모양새를 가진다. 장재형 목사의 로마서 2장 강해에서도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비와 축복까지도 자신을 높이는 데 필요한 재료로 전락시키고, 그 진정한 사랑을 깨닫지 못한 채, 이방인들 앞에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근거로 삼아버리는 이 교만의 간교함이 진리앞에 부서져야만 하는 것이다. 남들보다 높아지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과 끔찍한 교만을 따라가는 그런 삶이 될 수는 없다. 겸손의 왕, 예수만을 따라가기 원한다. 장재형 목사의 로마서 강해 2장은 신앙인의 죄를 깊이 찌른다. 앞으로도 더 읽어봐야겠다.

장재형 목사 로마서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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