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부활 – 눅24장 엠마오의 두 제자를 중심으로(장재형 목사)

부활 누가복음24장 크리스천투데이

부활은 언제 있게 되는가?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이 같은 건가? 다른건가?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 장재형 목사의 누가복음 24장 강해를 들으며 깊이 묵상할 수 있었다.

성경에 마지막 날, 마지막 때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을 말 하기도 한다. 이때우리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다고 되어 있는데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는 심판이 있게 된다. 그러면 이미 잠들어 있는 자들은 다시 살아 나야 한다. 이게 부활이다. 죽은 자의 부활과 산자의 부활이 있는 거다.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잠든자의 부활이다. 잠든 자들이 다시 깨어 나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산자들 또한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된다.

이때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가? 심판이다. 잠든 자들을 깨우신다. 악한 자들도 깨어 나야 하고 주님을 믿었지만 생명이 다해 잠들어 있는 자들 또한 깨어 나야 한다. 천국 나팔 소리가 이들을 깨우는 거다.

우리는 흔히 죽으면 바로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 질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성경적인 것은아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잠이 들었다고 표현하는 거다. 죽은게 아니다. 잠이 드는 것이다.

요11장에 나사로를 살리셨는데 이것을 보고 가야바인 대제사장이 예수를 죽이자고 한다. 이때 부터 예수를 죽이기로 생각했다는 거다. 사람을 살리는 능력을 보자 이들이 놀라 죽이려하고 한다. 다 믿을거니까 죽이자

11:53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요한복음 11장

11: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이게 복음이다. 최후의 만찬에서는 이러한 여인의 행위를 제자들이 보고 시험에 들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다 이 여인의 행위가 전해질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복음을 안자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나사로가 아프다는 거다. 죽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거다. 이 예수님의 놀라운 믿음을 보자.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다 사랑하셨다. 복음을 드러낸 자, 복음을 안자들을 이렇게 주님은 사랑하신다. 사랑하시는 이가 어찌 되었는가?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병이 들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이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지만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다.

11: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이틀이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는 유대로 가신다. 드디어 나사로에게 가시는 거다.

11: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아..유대인들일 방금도 돌로 치려 했다는 거다. 이게 뭔가? 우리는 최후의 만찬 후 안나스와 가야바 그리고 빌라도의 법정에 대해서 보자. 그러면 안다. 유대인들은 사사로이 죽일 수 있었다. 돌로쳐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스데반이 그렇게 순교를 당했다.

제자들이 유대로 자고 하시니 놀라서 묻는다.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쳐 죽이려고 했는데 다시 가십니까?’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정말 애매 모호한 말씀을 하시지만 또 명확하게 하신다. 그렇다. 진리 가운데 거하면 실족하지 아니한다. 진리가 우리의 가는 길을 밝힐 뿐 아니라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라고 했다.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나사라고 이때 죽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내가 깨우러 가겠다’라고 하신다. 놀라운 말씀이다. 정말 놀랍다. 여기에 우리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도 계시지만 예수님이 가지신 능력이 무엇인가? 잠든 자를 깨우시는 능력이 우리 예수님 안에 있다. 아멘 할렐루야

11: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1: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가겠다는 것을 정말로 그가 잠이 들어 쉬고 있으니 예수님이 깨우러 간다고 생각했다는 거다. 제자들이 부활에 대해서 잘 몰랐다.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들이 더 이해하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이때 제자들이 잘 알아 듣지 못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나사로가 죽었다”

제자들의 당황하던 모습을 생각해보자. 죽었는데 어떻게 살리지? 예수님이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가? 너무나 놀랐을 것 같다.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도마의 “우리도 주와 함게 죽으러 가자” 이 말이 무엇인가? 유대인들이 또 돌로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것이고 죽으실 수도 있다는 거다. 제자들은 늘 이렇게 위험에 노출 되어 있었다. 그들이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저 평안함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이 아니라 늘 살해의 위협에 처해 있었다. 도마의 이 말은 베드로의 말이 생각나게 한다. 내가 죽어도 주와 함께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용기 아닌가?

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하루 길이셨나보다. 이틀을 더 계시고 하루 만에 나사로에게 왔는데 이미 그는 무덤에 잠들어 있었다.

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오리는 우리 나라로 치면 약 2킬로 정도 되는 거리이니 동네 사람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 하러 왔던 거다. 왜 위로를 하는가?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장례를 치룬 것이다.

11: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는 예수가 늦게라도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 가는 데 향유 옥합을 부은 마리아는 집에 앉아 슬픔 가운데 있다. 이게 현실적인 우리의 모습이다. 마리아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지 모른다.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슬픔에 젖어 있기는 마르다도 마찬 가지다. 주님의 발 아래 앉아서 말씀을 들었던 마리아는 이렇게 슬픔에 젖어 있고 밥을 차리던 마르다는 주님께 가서 슬픈을 토해 낸다.

“예수님이 여기 계셨면 오빠를 치료 해주셨을 텐데…” 이 마르다의 믿음도 놀랍다. 예수님 안에 능력이 있다는 고백 아닌가? 그 능력이 무슨 능력인가? 병든자를 치유할 수 있는 치유의 능력이다.

11: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말씀을 들었던 마리아가 이 이야기를 한게 아니다. 밥을 준비하고 섬겼던 마르다의 고백이다. 이게 사도행전에 나온 스데반과 같을지 모른다. 마르다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사로가 죽었지만 예수님게서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거라는 거다.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고백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입니다라는 고백이다. 당신이 구주이며 그 능력은 죽은 자도 살리실수 있지않냐는 것이다.

1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나사로가 다시 살리라”

11: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네 주님, 마지막 날 부활에 다시 살 것입니다”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질문을 누구에게 한 것인가? 마르다다.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이 놀라운 질문을 하신다. 마리아가 아니다. 마르다다.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지만 주님을 만나러온 마르다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 마르다가 없었다면, 죽은 나사로가 없었다면 이 기록이 있었겠는가? 없었을 거다.

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눈물이 나는 마르다의 고백이다. 주님 그렇습니다. 이게 베드로의 고백과 다를게 없다 성경에는 마르다의 고백, 베드로의 고백 그리고 도마의 고백이 있다. 이 세 가지 고백이 다 성령께서 그리 하신거다.

11: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예수님게께서는 마리아를 부르셨다. 슬픔에 빠진 마리아, 슬픔 가운데 넋을 잃은 마리아를 부르신다.

“예수님이 널 찾으셔”

11: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11: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왜 예수님은 안 들어가셨을까?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를 맞이하던 그 자리에 그저 계셨을까? 요한 사도가 이것을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

11: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마리아의 이 고백도 놀랍다. 마르다와 간다. 마르다와 마리아 이 두 여인, 이 시대에는 여인이 천대 받던 시대인데 이 두여인의 사랑을 보라. 주를 향한 사랑과 믿음이 이들 안에 있다.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가? 십자가의 생명만 있는게 아니라 우리에게는 부활의 믿음이 있다. 나사로의 부활은 우리가 마지막 날에 경험할 부활은 분명 아니다. 왜냐? 나사로는 다시 죽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능력이 무엇인가?

11: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11: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1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함이러라

12: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2:11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부활한 나사로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되어 있다. 죽고 다시 살아난 능력을 예수님이 가지고 계셔서일까?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그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장재형 목사가 부활 이후에 늘 설교하는 본문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엠마오의 두 제자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유명한 구절이기도 하고 또 그림 작품도 있다. 이들의 이름은 글로바와 마리아이다.

누가복음 24장 13절부터

24: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24: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24: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24: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24: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24:19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24: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4: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24: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24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4: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4: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4: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24: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부활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예수님도 부활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 하셨는데 부활이라는 건 좀 어렵다. 사순절 기간 십자가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고 나서 부활에 대해서 묵상해야 하는 중이다. 그 부활에 대해서 묵상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건 바로 엠마오의 두 제자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분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도 누구 보다 더 잘알았다. 왜냐? 그들은 제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가 잡히셨던 날이던지 죽으셨던 때인지는 모르지만 이들은 예수를 떠났고 다시 그들의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누구다 아는 그 그림의 두 주인공이다.

며칠 전 누군가 나에게 부활에 대해서 물었다. 부활이 무엇인가? 그건 죽고 다시 사는 거다. 십자가가 전제가 되어야 부활이고 십자가만 있는 것은 바울 사도의 말 처럼 우리의 믿음이 헛것인거다. 죽어버리고 나서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믿어야 할 이유가 없다.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는 건데 기독교는 특별히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이게 다른 종교와 분명하게 다른 것이다.

부활은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는 누구인가? 타락한 아담의 자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피조물들이다. 새롭게 되긴 했는데 이전의 악한 습관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 우리의 신앙이 늘 놓여지게 된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의 모습 처럼, 미래의 원대한 꿈이 있었지만 그 꿈을 잃어버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예전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이 팬의 목소리를 기억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이렇게 깨우신다.

“나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희생이었다고. 대속이었다. 그래서 그 죽음은 헛된게 아니라 너희에게 생명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에 대해서 가르쳤다고 하셨는데 장재형목사는 이 율법은 레위기 16장이고 예언서는 이사야서 53장이라고 이야기 한다. 레위기 16장의 속죄양과 이사야서 53장의 고난의 주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님은 부활 이후에 두 제자에게 이야기 하신 것이라고 장재형목사는 늘 이야기 했다.

누가복음 24장

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차갑게 식어버린 두 제자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가슴이 뜨거워져서 다시 사도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지금 교회는 부할을 맛 보고 오순절을 향해서 가고 있는 절기에 놓여져 있다. 그런데 부활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는 십자가 즉 레위기 16장과 이야서 53장의 대속과 고난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그 대속과 고난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빵이 찢어지고 나서 내가 그걸 먹으면 생명이 된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거다.

물론 부활이라는 건 마지막 심판의 날에 주님께서 오셔서 잠든 모든 이를 나팔로 깨우신다. 그래서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시는 심판을 받게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 또한 5백명의 제자들 가운데 일시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본 자들 중에 잠든 자도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들은 죽은게 아니라 잠들어 있는거다. 어쩌면 우리에게 정말 죽음은 심판 이후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의 생명이 다 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저 마지막 날을 고대하면서 고이 잠드는거다. 이때도 중요하다.

하지만 또 중요한게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면서 매일 매일 겪는 절망과 고난 속에 우리가 리옹의 유니폼을 입었던 이 선수들 처럼 우리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게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를 날 마다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우리가 덧입는 것 밖에 없다.

바울 사도는 날마다 죽고 다시 산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죽어야 할게 있고 죽지 말아야 할게 있다. 죽지 말아야 할 것을 죽이게 되면 죽여야 할게 우리를 죽게 만든다. 리옹 선수를 봐라. 저들의 능력이 새롭게 되는 건 그들이 무엇을 덧입고 있느냐? 그들이 입은 유니폼이 무엇인가? 역사와 전통을 깨닫고 나서 그것을 훼손할 자격이 우리에게 없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거다.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가? 나인가? 아니다. 나의 주인이 나 인것 처럼 살아가는 건 자신을 속이는 거다. 속이는게 얼마나 무서운건가? 신지애라는 골프 선수가 있다. 아버지가 목회자라고 한다. 이분을 잘 아는 한 신학대학교 교수님은 골프를 정말 좋아하셔서 나와 종종 라운딩을 함께 하는 데 자주 신지애 선수와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신다.

그런데 신지애선수의 우승 횟수가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2023년 8월 현재 KLPGA 통산 21승(아마추어 1승 포함), LPGA 통산 11승, JLPGA 통산 28승, 기타 투어 5승 등 전 세계 투어 통산 65승(프로 통산 64승)을 기록 중이다. 골프 선수가 한번도 우승을 못하고 은퇴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신지애 선수는 65승이나 했다.

골프에는 심판이 없다. 자신의 양심이 심판이 되어서 점수를 기록하고 제출해야 한다. 최근 어떤 프로 테스트를 한 세명의 선수들이 점수를 조작해서 1차 테스트를 통과했고 나중에 이것이 적발 되었다고 하더라. 또 미래가 촉망받던 한 여자 골퍼는 남의 공을 자신의 공이라고 쳤는데 나중에 이것을 알고 스스로 알리지 않고 경기를 마쳤다고 한다. 나중에 이 선수가 우승도 하고 그랬는데 캐디가 이를 문제 삼았따고 한다. 한달이 지나서..그리고 이 여자 프로골퍼는 징계를 받고 최근 복귀했다.

신지애선수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말 하고 싶은게 아니라 ‘진실함’이다. 65번 우승하려면 얼마나 많은 경기에 나섰겠는가? 그 경기내내 그는 진실하게 플레이를 한거다. 유혹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지만 신지애 선수가 그렇게 스스로에게 엄격했고 진실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실력도 뛰어난 골프 선수인거다.

미래가 촉망 받던 한 여자 골프 선수는 단 한번의 욕심으로 은퇴때까지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야 한다. 물론 그녀에게 좋은 경험이었을 거다. 그래서 그 선수도 이제는 그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을거다. 노력은 하지 않겠나? 같은 걸 두번 반복하면 그의 선수 생명은 끝날거다.

하나의 스포츠도 이러한데 그리스도 인들은 어떠한가? 죄를 짓고 죄를 짓고 하는 것이 용서가 되고 용서가 됨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오히려 악용하지 않은가? 장재형목사는 종종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헤이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값비싼 피로 산 자들이다”

장재형 목사와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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