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버려진 돌에서 솟아나는 생명, 초대교회를 일깨운 부활의 능력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미처 다듬지 못한 미완성 대리석상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차가운 돌덩이 깊은 곳에 갇혀 있던 형상이 마치 보이지 않는 영원한 빛을 향해 몸부림치며 밀고 나오는 듯한 엄숙한 침묵의 긴장감을 마주하게 됩니다.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아 투박해 보이는 그 미완의 형태가 뿜어내는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는, 사도행전 4장 속에서 역동적으로 요동치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과 무척 닮아 있습니다. 인간이 쓸모없다 여겨 사정없이 내버린 길가의 돌을,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건물의 가장 중심이 되는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우시는 바로 그 찰나, 온 세상을 짓누르던 죽음의 사형 선고는 단숨에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라는 영광스러운 반전으로 뒤집힙니다. 사도행전 4장에 나타난 이 찬란한 구속사의 현장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원초적인 도(道)가 어떻게 지상 교회를 탄생시켰는지, 그리고 위기 속에서 부어지는 성령의 담대한 능력이 연약한 공동체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없는 반석 위에 세웠는지를 가슴 벅차게 증언합니다.
사도행전 4장의 무대는 안온한 신학적 토론장이나 종교적인 명상의 자리가 아니라, 기존 기득권 체제와의 타협할 수 없는 격렬한 영적 정면충돌의 한복판에서 열립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 하나만으로 평생 단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지체장애인을 일으켜 세운 기적은, 예루살렘의 종교 기득권자들도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어 성문 앞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나 이 치유의 사건 뒤에서 장재형 목사의 강단이 강력하게 붙드는 복음의 실체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초자연적인 기적의 신비함 그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육체의 치유는 나사렛 예수의 권능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거부할 수 없는 시각적 표지였을 뿐이며, 참된 이정표가 가리키는 궁극적인 실체는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였습니다. 부활의 복음이야말로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초대교회를 거침없이 전진하게 만들었던 가장 깊고 깊은 생명의 시원(始原)이었습니다.
당시의 성전을 장악하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수비대, 그리고 내세의 부활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며 현실의 풍요를 누리던 사두개파 권력자들이 사도들을 긴급히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 표면적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단순히 세간의 이목을 끄는 또 하나의 사회운동이나 소수 종교 분파의 양적인 성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심장부와 기득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불씨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실패자 예수를 두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라고 선언하는 그 엄숙한 도(道)의 전파였습니다. 사도들이 선포한 부활의 메시지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없다고 확신하며 성전 권력을 지탱해 온 사두개인들의 철학적 기초를 완전히 무너뜨렸고, 로마 권력과 결탁해 구축한 종교적 정당성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힘으로 진리를 누르려 했던 그들의 조직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흘러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정직하게 들은 수많은 군중 가운데 회개하고 믿는 역사가 일어나 남자의 수만 족히 오천 명에 이르는 놀라운 영적 대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생명의 복음이 인간이 가하는 그 어떤 폭력과 억압보다 훨씬 더 깊고 질기며, 더 빠르게 영혼의 대지를 적시고 번져 나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신학적 선언은 명료하고 단호합니다. 지상의 참된 교회는 세상의 세련된 문화적 승인이나 영웅주의적 체면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오직 인간들의 교만과 이기심에 의해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버려졌으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죽음의 사슬을 끊고 다시 살려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영원한 기초 위에 서 있습니다.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는 사도들의 고백은, 신학 서적에나 박제되어 있는 지적 구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잔인한 죽음의 절벽 앞에 직면한 유한한 인간이 영원의 세계를 향해 붙잡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참된 소망이자 유일한 생명의 동아줄을 가리키는 실존적 증언입니다. 쓸모없다고 버려진 건축가의 돌이 가장 아름다운 성전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선언은, 인간의 얕은 지혜와 왜곡된 판단을 단숨에 초월하여 완전히 새로운 우주적 구원의 질서를 주권적으로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통치에 대한 눈물겨운 신앙고백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맥락 속에서 초대교회의 탄생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단순히 뜻이 맞는 이들이 모인 사회적 종교 단체의 형성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이 땅의 질서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하늘의 새로운 통치가 이 땅에 육화되기 시작한 영적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버리고 지워버려야 할 실패자로 취급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 거절당한 이름을 영원한 인류 구원의 중심 우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가 처음부터 심장에 새기고 물려주었던 유산은 고상한 도덕률의 나열이나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조직적인 권력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가장 깊은 뿌리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주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도 성령을 통해 지금 이곳에 여전히 살아 계셔서 친히 다스리신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권능의 이름 안에서 인류의 가장 원초적 비극인 죄와 죽음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선포, 즉 ‘부활의 복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2부: 사법적 위협 속에서 더 맑아지는 십자가의 진리
서슬 퍼런 종교 공회는 사도들을 삼엄한 법정 중앙에 세워두고 “너희가 대체 무슨 세력과 누구의 이름을 빌려 이 발칙한 일을 행하느냐”며 다분히 위협적인 어조로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고압적인 질문은 단순히 치유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려는 사법적 절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공적 광장에서 예수의 이름이 더 이상 속삭여지지도 못하도록 영원히 매장하고 침묵시키려는 거대한 세속적 압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슬에 묶인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의 타고난 웅변술이나 기적을 행한 영적 능력, 혹은 제자라는 종교적 자격을 조금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공회의 가슴을 향해, 너희들이 무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망을 부수고 다시 살려내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바로 이 기적의 실체라고 담대히 선포할 뿐이었습니다.
이 엄숙한 법정의 대치는, 성경을 펼쳐 들고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을 향해서도 날카로운 양날의 검과 같은 거울이 되어 다가옵니다. 종교가 본연의 영적 순수성을 잃고 비대해져 권력화될 때, 아이러니하게도 진리를 보수한다는 명목의 화려한 예식과 율법의 칼날이 오히려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참된 생명의 길을 가로막는 무서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잔혹한 십자가 형틀로 몰고 간 책임이 빌라도로 대표되는 이방의 세속 권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수호하려 했던 완악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깊이 얽혀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가슴을 찢으며 드려야 할 회개는, 저 불신 세상을 향해 쏟아내는 도덕적 훈계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교회라는 성벽 안에 은밀히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세상의 평판을 갈구하는 세속적 자기 보존의 욕망을 하나님 앞에 발가벗겨 드러내어 자복하는 실존적 엎드림이어야 합니다.
위협하는 자들을 향한 베드로와 요한의 답변은 눈이 부시도록 단호하지만, 결코 호전적이거나 거칠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구원의 실체를 도저히 입을 닫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그들의 짧은 진술 속에는, 정적들과의 신학적 논쟁에서 이겨보겠다는 값싼 지적 우월감이나 분노 섞인 고집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오직 구주의 죽음과 부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한 목격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맑고 정직한 떨림과 깊은 신뢰가 담겨 있을 뿐입니다. 참된 믿음은 나의 유익을 위해 억지로 짜내어 조작해 낸 심리적 확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 영원을 관통해 버린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우주적 사건 앞에 압도당하여,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하고 두 손을 드는 영혼의 깊은 순종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그토록 뜨겁게 역설하는 부활 신앙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것이 상실될 때 교회의 생명력은 쇠퇴합니다. 만약 교회가 세상의 조롱과 갈등이 두려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은밀히 축소하거나 희석한다면 눈앞의 핍박과 갈등은 잠시 모면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순간 교회는 자신의 생명이 흘러나오는 탯줄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우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의 성도들이 그토록 담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결코 그들을 둘러싼 외부적 환경이 우호적이거나 안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눈앞에 다가온 날카로운 심문과 모진 채찍질, 차가운 감옥의 투옥과 순교의 위협이 너무나 선명하게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들의 순수한 믿음은 불순물이 걸러진 정금처럼 더 맑고 투명하게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복음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아무런 마찰이 없는 안전하고 편안한 서재 안에서만 점잖게 토론되어야 할 가벼운 철학적 사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를 지배하던 절망의 정점인 죽음을 생명으로 삼켜버린 부활하신 왕의 소식이기 때문에, 어떠한 서슬 푸른 칼날의 위협 앞에서도 결코 침묵할 수 없는 절대적인 증언입니다. 이 설교는 초대교회의 거룩한 담대함을 한낱 무모한 영웅주의적 오만이나 호기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마주하고 부활을 실제로 호흡하는 자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본질적인 영적 순종의 열매로 보게 만듭니다.
3부: 성령의 진동 속에서 일어나는 나눔과 코이노니아의 기적
살기등등한 공회의 손아귀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이 가장 먼저 발걸음을 옮긴 곳은 안전한 은신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며 구주의 대속을 노래하던 눈물의 기도 공동체로 즉각 돌아갔습니다. 종교 권력자들의 혹독한 경고와 살벌한 위협의 말들을 남김없이 전해 들은 성도들은, 두려움에 질려 뿔뿔이 흩어지는 대신 도리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하늘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뜨거운 동심기도는 언제나 “하늘과 땅과 바다, 그리고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모든 만물을 친히 조성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 고백하는 창조론적 감사와 경외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당장 영혼을 집어삼킬 듯 으르렁거리는 권력자들의 사법적 핍박이 바로 눈앞에 엄존해 있었지만, 성도들은 그 세상의 위협이 자신들의 영원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보다 결코 크지 않음을 분명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초기 교회의 성도들은 고대 시편 2편의 예언적 언어들을 빌려와, 온 세상 열방이 어리석게 분노하며 세상의 권력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메시아를 대적하여 꾀하는 모든 음모조차 결국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안에서 한낱 허사로 돌아갈 뿐임을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참담한 현실을 외면한 채 공상 속에 빠져드는 어리석은 낙관주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세상의 온갖 적대감과 증오가 사실은 이미 구약성경의 예언 속에서 완벽하게 해석되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영적으로 관통하고 있었기에, 닥쳐온 핍박의 바람보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훨씬 더 크고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영혼의 참된 소망은 내 삶을 위협하는 온갖 환난과 풍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고요한 온실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계획과 선한 뜻이 세상이 가하는 그 어떤 폭력과 위협보다 훨씬 더 깊고 온전하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한복판에서, 소망의 닻은 더욱 단단하게 영혼의 깊은 심연에 박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는 자신들을 둘러싼 현실의 고난과 아픔을 즉각적으로 없애 달라고만 떼를 쓰는 기복적인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저 세상의 오만한 위협을 하나님께서 엄히 굽어보아 달라고 호소하면서도, 주님의 보잘것없는 종들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늘의 생명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도록 영적인 지지와 용기를 달라고 오직 간구할 뿐이었습니다. 또한 아픈 이들에게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내밀어 치유해 주시고, 놀라운 표적과 기사가 오직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향해 막힘없이 흘러가게 해 달라는 그들의 눈물 어린 간구는, 구원의 길을 결코 멈추지 않겠다는 생명 선언이었습니다. 간절한 기도가 끝났을 때 성도들이 모여 있던 거룩한 처소가 성령의 권능으로 세차게 흔들렸고, 모인 무리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었다는 기록은, 교회가 세상 권력이 가하는 물리적 압박감보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거룩한 인재와 통치에 의해 온전히 움직여지는 초자연적인 하늘 공동체임을 온 천하에 보여주는 명백한 사건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으키는 신비로운 변화는 단순히 강단에서 선포되는 언어의 담대함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불길이 임한 사도행전 4장 후반부의 교회는, 자신이 소유한 소중한 재화와 물건들을 아낌없이 서로 통용하고, 가난으로 신음하는 지체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나누어 주며, 눈물의 기도와 기쁨의 찬송 속에서 추상적인 사랑을 실제적인 삶으로 육화해 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신학적인 교리 체계나 세련된 문장으로만 남겨질 때 차갑게 식어 가지만, 고통받는 이웃들의 실존적인 필요를 성심껏 돌아보는 구체적인 나눔의 삶이 될 때 비로소 세상 가운데 선명한 생명력으로 고동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거저 받은 구원의 은혜는 강단에서 외쳐지는 만큼 반드시 우리의 일상 속에서 타인을 향해 흘러가야 하며, 복음의 메시지는 입술로 선포되는 깊이만큼 우리의 연약한 몸과 삶을 통해 증명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초대 기독교의 성도들은 단순한 도덕적 종교 집단을 뛰어넘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이곳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증명해 내는 거룩한 천국 공동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옷 입는다는 것은 신비로운 개인의 감정이나 일시적인 황홀경 속에 홀로 갇히는 폐쇄적인 경험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위협을 돌파하는 말씀의 용기, 형제의 눈물을 닦아주는 자비로운 사랑의 질서, 그리고 나의 욕망을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고 기쁨으로 나누는 거룩한 습관의 형성을 통해 공동체 전체의 연대성으로 찬란하게 발현됩니다. 오늘날 지상의 교회가 참으로 살아 숨 쉬고 있는가를 분별하는 기준은 외형적인 화려함이나 성전의 규모를 과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구주 예수의 이름을 두려움 없이 부르며 뜨겁게 기도하고 있는가, 소외되고 상처 입은 이웃을 내 몸처럼 소중히 섬기며 세우고 있는가, 그리고 세상의 거대한 공포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훨씬 더 실제적인 현실로 여기며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4부: 회개의 겨울을 지나 참된 교회로 서는 영원한 소망
사도행전 4장의 엄숙한 고발은 먼지 쌓인 역사책 속의 고대 영웅담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화려함 뒤에 가려진 오늘날 지상 교회의 부끄러운 실상과 민낯을 가차 없이 드러내는 준엄한 말씀의 거울입니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유일성과,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부활의 실제성을 몹시 불편해하며 끊임없이 타협을 요구해 옵니다. 동시에 교회 내부에는 세속적인 권위주의와 명예욕, 그리고 탐욕스러운 재물의 유혹이 슬그머니 기어들어와 영적인 눈을 멀게 만듭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사도행전 4장의 영광 뒤에 숨겨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적인 다음 장면까지 우리의 시선을 엄히 확장시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를 위태롭게 흔드는 것은 외부의 사나운 핍박과 폭력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에 은밀히 자라나는 위선과 탐심, 그리고 하나님을 속이려는 세속적 정욕이 공동체의 순결한 생명을 안으로부터 좀먹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가 눈물을 흘리며 다시금 성찰해야 할 본질적인 질문은, 우리가 얼마나 화려한 제도적 시스템과 재정, 그리고 영향력 있는 조직망을 구축해 놓았는가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에게 죽음을 이긴 예수의 부활 신앙이 삶의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살아 있는 권능으로 역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구원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고 변두리에 세워두는 순간, 제아무리 화려하고 유익한 종교적 활동과 자선 사업을 벌일지라도 세상의 이익 집단이나 도덕 단체와 본질적으로 아무런 다를 바 없는 무기력한 조직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영원히 쇠하지 않는 부활의 복음이 신자들의 영혼 중심에 불타오르고 있다면, 비록 연약하고 배우지 못한 소수의 사람들이 모인 초라한 공동체라 할지라도 세상을 향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언하는 강력한 성령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가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진 오늘날의 신자들의 귓가에 조용한 나팔 소리처럼 큰 울림을 주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본질적인 영적 권위의 회복을 외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흔들릴 수 없는 교회의 뿌리이며, 보혜사 성령의 임재는 교회를 안에서부터 박동하게 만드는 거룩한 생명력이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교회가 마지막 날까지 증거해야 할 유일무이한 사명입니다. 이 세 가지의 핵심 기둥은 사도행전 4장에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물줄기를 든든히 지탱하는 거대한 삼중의 중심축입니다. 교회가 이 본질적인 하늘의 고백을 망각하고 타협하는 순간 세상의 기업들을 닮아 가며 급속히 쇠락하겠지만, 이 시원적 고백을 눈물로 통회하며 회복해 낼 때 가장 연약해 보이던 공동체조차 어두운 세상을 향해 사자처럼 담대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지닌 참된 깊이와 고결함은, 나를 방해하는 사나운 바람과 시련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평안한 때에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닥쳐오는 차가운 시련과 위협의 절정 속에서, 내가 진정으로 가슴에 품고 있는 이름이 무엇인지, 그리고 누구의 주권 위에 영혼의 발을 딛고 서 있는지를 통해 비로소 선명하게 검증되는 법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도 소리 없는 거대한 영적 공회가 끊임없이 열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오직 내 개인의 마음속 사적인 위안이나 조용한 취미 생활 정도로만 가두어 두라고 속삭이는 차가운 사회적 분위기, 생명의 복음을 위해 좁은 길을 걷기보다 내 삶의 육체적 안전과 안락함을 끊임없이 계산하는 비겁한 타성의 습관들,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 있는 시선보다 사람들의 평판과 체면을 먼저 앞세우며 위선적인 종교 생활을 이어가려는 마음의 음모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의 부활의 도(道)를 진실로 믿는 성도는, 인간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철저히 버린 모퉁이의 돌 같은 상황 속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온 우주의 머릿돌로 세워 가실 영광스러운 승리의 아침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대체 무엇이 두렵고 부끄러워 진리의 입술을 닫은 채 비겁하게 침묵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내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다시금 눈물로 붙잡아야 할 참된 구원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이제는 거짓된 가식을 모두 벗어던지고, 오직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가난하고 잃어버린 이웃들을 향해 담대히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