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문학의 서늘한 거장 프란츠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이 독자에게 남기는 가장 기괴하고 서늘한 비극의 장면은,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갑작스러운 흉측한 육체적 변화 그 자체보다도 닫힌 방문 너머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향해 그가 필사적으로 뱉어내는 핏빛 외침이 더 이상 상대에게 닿지 못하고 한낱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한 소음으로 전락해 버린 무서운 영적 단절에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의 이사야 50장 4절 강해 설교는, 일상 속에 숨겨진 이 비극적인 단절의 문제를 ‘학자들의 혀와 귀’라는 신학적이고 영적인 질문으로 깊이 있게 전환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목 놓아 부르셔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의 완악하고 닫힌 귀, 그리고 극심한 절망과 삶의 무게 앞에 무너진 곤고한 사람을 향해 단 한 마디 생명의 말도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 무기력한 혀는 과연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 안에서 온전히 회복될 수 있습니까.
은혜는 먼저 닫힌 귀를 깨운다
선지자 이사야가 바라본 이사야 50장의 하나님의 백성은 바벨론 포로라는 기나긴 절망의 어둠 속에 무기력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무서운 환란의 한복판에서 백성들에게 가장 먼저 선명하게 밝혀 보여주시는 것은 그들을 버렸다는 차가운 사실이 아니라,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는 변함없는 신실한 진실입니다.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향해 자신이 그들을 이혼 증서를 써서 내어버린 적도 없으며, 채주에게 돈을 받고 팔아넘긴 적도 결코 없다고 부드럽게 물으십니다. 그들이 겪는 참혹한 포로 생활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 아버지의 숭고한 사랑이 식었거나 구원의 손길이 짧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거룩한 말씀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불순종을 일삼은 백성 자신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본문 말씀이 폭로하는 인류의 가장 깊은 본질적 위기는 내 삶을 둘러싼 외형적인 환경의 무너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차갑게 닫혀 버린 영적인 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과 은혜로 목 놓아 부르셔도 끝내 응답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이 부드럽게 들려와도 마음 깊은 곳에서 겸허히 받아들이지 못할 때, 인간은 수많은 세속의 소리 가운데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무서운 영적 침묵 속에 갇히게 됩니다. 마땅히 들어야 할 하늘의 거룩한 음성을 듣지 못한 사람은, 마침내 말을 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도 비겁하게 침묵하거나 오히려 상처받아 신음하는 지친 이들에게 아무런 영적 힘도 되지 못하는 허무한 말만을 쏟아내게 됩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깊이 있게 붙드는 영적 과제는 입술의 현란한 언어적 기술이나 화술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할 영적인 순종과 들음의 자세입니다.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길고 혹독한 환란의 시간은, 우리가 평소에 과연 무엇을 참된 토대로 의지하며 살아왔는가를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예배의 형태나 모임의 방식이 크게 달라지고 일상의 익숙한 질서들이 흔들릴 때에도, 하나님께서 결코 그분의 피로 사신 교회를 무책임하게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이 선포하는 은혜의 흐름은 이 땅의 가정이 신앙을 보존하고 파수하는 마지막 거룩한 보루임을 엄중히 일깨우며,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가 서로 흩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서로를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거룩한 교회와 성도 공동체의 참된 회복은 멀리 있는 거대한 구호나 거창한 운동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내 바로 곁에 있는 가장 가까운 이의 숨겨진 신음 소리를 다시금 겸허히 듣는 작은 순종에서 출발합니다.
이사야 50장 4절의 위대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고난받는 그분의 종에게 “학자들의 혀”를 친히 선물로 주시고, 아침마다 그의 영적인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알아듣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거룩한 구속사의 예언은 궁극적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완전하게 성취되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안에 거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복된 약속으로 해석됩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 신음하는 곤고한 영혼을 온전히 살려내는 생명의 말은, 인간 스스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세속적인 재능이나 화려한 기교가 아니라, 아침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가장 먼저 청종하게 하시는 하늘의 깊은 은혜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됩니다.
“아침마다”라는 구절의 나지막한 표현 속에는 신앙생활의 가장 선명하고 거룩한 영적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성도의 혀가 세상을 향해 움직이기 전에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귀가 먼저 활짝 열려야 하고, 누군가를 가르치고 지도하기 전에 주님 앞에서 겸손히 배워야 하며, 절망에 빠진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기 전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먼저 통회함으로 일으켜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을 묵상하는 복된 시간은 그저 관념적인 신학 지식을 머릿속에 채우는 정적인 시간이 아니라, 세속의 물결 속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다시금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조율되는 거룩한 영적 스파크의 시간입니다. 성도의 진실한 믿음은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구체적인 방향으로 겸허히 받아들이는 순종을 통해 비로소 선명해지는 법입니다.
복음은 곤고한 사람의 이름을 먼저 듣는다
성경이 말하는 학자들의 혀는 결코 많은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의 화려한 언변이나 세속적인 웅변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거룩한 혀의 참된 목적을 오직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깊이 아는 사랑의 섬김에 두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언어는 말하는 사람의 우월한 지식이나 능력을 세상을 향해 증명하는 교만한 수단이 아니라, 절망 속에 지친 영혼이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보며 일어설 수 있도록 꼭 필요한 생명의 말씀을 겸손히 건네는 거룩한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건네는 참된 생명의 말은 언제나 내 입을 열기 전에 타인의 슬픔과 아픈 형편을 깊이 있게 듣는 겸손함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아무리 인간적으로 뛰어난 혀와 화려한 말재주를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혼을 살리지 못하는 무기력한 혀에 불과하다고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인간의 감상적인 말은 잠시 사람의 마음을 다독이거나 감정을 움직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깊은 죄악을 깨닫게 하고 진실한 회개로 돌이키며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품게 만드는 위대한 영적 능력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만 흘러나옵니다. 그렇기에 복음이 지닌 거룩한 권위는 내 목소리의 크기나 표현의 세련됨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진리의 말이 과연 어디에서부터 흘러나왔으며, 누구를 살리기 위해 자기 비움으로 사용되고 있는가에 완전히 달려 있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깊이 있게 들으려는 영적인 귀가 없이 인간의 말만 무성하게 많아지면, 거룩한 진리조차 쉽게 왜곡되고 상처를 주는 도구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상대방의 고통과 아픔을 충분히 공감하며 듣지 않은 채 경솔하게 던지는 성급한 충고는, 아무리 정답처럼 보이는 바른 말일지라도 상처 입은 영혼을 더욱 깊은 절망으로 밀어 넣는 또 다른 가해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겸허히 묻지 않은 인위적인 열심은 사람을 세우기보다 무겁게 짓누르는 종교적 멍에가 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의 귀는 단순히 타인의 말을 잘 받아 적는 인간적인 기술이 아니라, 성령의 나지막한 음성과 곤고한 이들의 아픈 신음 소리를 동시에 올바르게 분별해 내는 영적인 감각입니다. 그처럼 깊이 들은 사람만이 때에 온전히 맞는 위로와 책망, 그리고 진리와 사랑을 균형 있게 건넬 수 있게 됩니다.
이 설교는 성도의 혀가 깨끗하고 정결해지는 복된 길을 진실한 회개의 눈물과 성령의 불이라는 강력한 영적 이미지로 깊이 있게 설명합니다. 스스로의 죄를 깊이 자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눈물이 마음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내고, 성령의 불길이 내 안에 오래도록 쌓여 있던 죄의 습성과 교만을 남김없이 태워버릴 때, 비로소 인간의 언어도 거룩하게 새로워집니다. 회개함으로 깨어지지 않은 혀는 진리를 말하면서도 타인을 차갑게 정죄하기 쉽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은밀하게 자기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쉽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자신의 완악함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한 사람만이, 다른 이의 아픈 상처를 함부로 다루지 않고 주님의 심장으로 품을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말은, 세상에서 많이 배운 입에서 교만하게 나오기 전에 하나님 말씀 앞에서 온전히 깨어진 성도의 겸손한 마음에서 태어납니다. 그러한 복음의 언어는 죄의 엄중한 무게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절망한 죄인에게 다시금 돌아올 생명의 길을 따뜻하게 비추어 주며, 하나님의 진리를 흐리지 않으면서도 삶에 지친 사람을 무참히 짓밟지 않습니다. 이처럼 은혜와 진리가 결코 분리되지 않고 온전히 하나로 만나는 영적 공간에서, 성도의 혀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거룩한 복음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침묵에서 부활의 말이 태어난다
선지자 이사야가 영안을 열어 바라본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의 환상은, 마침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통해 완전하고 온전하게 드러났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입에서 선포된 모든 말씀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권위가 서려 있었지만, 그 하늘의 권위는 결코 자신의 고난을 회피하거나 스스로를 높여 세속적 영광을 취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오직 말씀으로 곤고한 자들을 온전히 일으켜 세우셨고,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구속적 뜻에 완벽하게 순종하사 차가운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학자들의 혀’를 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화술이나 말의 기교만을 닮고 싶다는 사사로운 소원이 아니라, 그분의 말과 완벽하게 하나를 이루었던 숭고한 사랑과 낮아짐,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십자가의 삶 자체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거룩한 고백이자 기도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라는 장재형 목사의 강력한 선언은, 인간이 겪는 고통 그 자체를 가학적으로 미화하거나 높이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의 영광을 고단한 현실을 무책임하게 외면하는 값싼 낙관론이나 세속적인 위안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는 복음의 엄중한 질서입니다. 참혹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의와 다함 없는 사랑이 완벽하게 드러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길이 비로소 활짝 열렸기에, 주님의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포해야 할 소망은 결코 막연한 세속적 위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온가지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끝내 하나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게 만드는 굳건한 믿음의 증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깊이 있게 가르치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약속된 성령을 예루살렘에서 간절히 기다리게 하신 거룩한 흐름 역시 이 영적 질서 안에 놓여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별 설교를 통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은 성도들을 이 세상에 외로운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예수께서 친히 전하신 생명의 말씀을 깊이 있게 가르치시며 생각나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마침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의 불길이 임하자, 지극히 평범하고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의 입술은 천국 복음을 대담하게 선포하는 학자들의 혀로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먼저 하늘의 음성을 깊이 들었고, 주님의 약속을 참고 기다렸으며, 마침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성도들이 비로소 세상을 향해 거룩하게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깊은 신학적 통찰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이 위대한 구속사의 역사를 결코 과거의 초대교회에만 존재했던 특별한 사건으로 가두어 두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동일하신 보혜사 성령님, 그리고 동일한 구원의 복음이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온전히 함께하고 있으며, 그 생명의 말씀은 이미 우리의 입과 마음 가까이에 매우 가깝게 다가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존재하는 진짜 문제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주지 않으셨다는 부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삶에 성령으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영적으로 둔감해져 있거나, 이미 거저 받은 가늠할 수 없는 은혜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사용하지 않는 나태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는 세속의 화려하고 새로운 말의 유행을 좇아갈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변함없이 선포되어 온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오늘을 살아가는 곤고한 영혼들에게 어떻게 생명의 참된 말이 될 수 있는가를 겸허히 다시 물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남겨야 할 것은 살리는 말
하나님이 주시는 학자들의 혀는 결코 거룩한 예배당 건물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따뜻하게 돌보고, 절망과 압제에 갇혀 신음하는 이들의 아픈 고통을 무심히 외면하지 않으며, 영적인 위로와 간절한 기도, 그리고 삶에서의 실제적인 도움을 함께 손잡아 건넬 때, 비로소 우리의 말은 구체적인 삶의 몸을 입게 됩니다. 교회가 선포하는 영원한 복음이 인간의 영혼을 향하고 있다면, 그 영혼이 고단하게 견뎌내고 있는 아픈 삶의 세속 현실 또한 결코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법입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의 실천과 진리의 담대한 선포는 결코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하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가 함께 마땅히 걸어가야 할 거룩한 하나의 길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세상을 향해 훈계하고 지배하려 드는 권위적인 집단이 아니라, 오직 섬김의 종의 모습으로 세상의 발을 씻기는 겸손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을 품는다는 미명 아래 타협하며 진리의 거룩함을 잃어버려서도 결코 안 됩니다. 들어야 할 하늘의 귀가 없이 내 주장만 무성하게 많아지면 복음은 타인을 향한 차가운 정죄로 기울고, 마땅히 말해야 할 복음적 용기가 없이 들으려고만 한다면 이웃의 참혹한 고통 앞에서 무기력하게 침묵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배우는 듣는 귀와, 세상을 향해 담대히 진리를 증언하는 혀가 균형 있게 함께 존재할 때, 교회는 세상의 거센 환란 속에서도 영원한 소망의 이유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마침내 소망을 이룬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인간이 겪는 고난과 아픔을 결코 미화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는 굳건한 믿음으로 고통의 시간을 견디어 낼 때, 심지어 과거에 깊은 상처를 입은 피폐한 공동체조차도 다른 누군가의 아픔을 품어주는 거룩한 은혜의 그릇으로 새롭게 빚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내게 맡겨진 가정을 믿음으로 지켜내고, 성경 말씀 앞에 아침마다 귀를 활짝 열며, 내 곁에 있는 곤고한 이들의 눈물을 따뜻하게 닦아주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 나라의 동일한 거룩한 사명에 속해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의 작은 순종과 헌신들이 하나둘 모여, 교회를 세상을 향해 진정한 생명의 말을 건네는 복된 공동체로 지켜내는 것입니다.
복음이 선포하는 거룩한 언어는 세상을 향해 내 목소리를 높여 큰소리를 내는 세속적인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나지막한 음성을 깊이 듣고 깨달은 성도가 곤고함 속에 신음하는 이웃의 곁에서 겸손히 건네는 생명의 말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입술에는 이미 세상의 수많은 생각과 지식, 그리고 나를 변호하기 위한 수많은 말들이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많은 말들은 정말로 아침마다 하나님께 깊이 듣고 깨달은 거룩한 말씀입니까, 아니면 내 안의 불안과 교만한 자존심이 만들어낸 부질없는 세속의 소음입니까. 그리고 지금 바로 나의 곁에서, 내가 먼저 내 입을 다물고 조용히 그 아픔을 들어주어야 할 곤고한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